아직 생존해 계신 친정 어머니는 팔순을 바라보시건만도 세상 변화를 어린애처럼 즐거워하시면서 백 살을 살아도 죽을 때는 억울할 것 같다고 한탄을 하신다. 그런데 내가 직조해내는 나의 일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수없이 떴다 풀었다 다시 뜨는 듯한 낡은 실이 몇 가닥씩 어떤 때는 온통 끼어들곤 했다. - P20
나는 속에서 활활 열불이 날 것 같은 예감에 지레 괴로워하면서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유리창으로 보기보다는 차가운 날씨였다. 블라우스 소맷부리로 힘센 날짐승처럼 휘몰아친 바람이 소매를 럭비공처럼 부풀렸다. 노인정 너머로 마주 보이는 동회 옥상에 꽂힌 태극기와 새마을기와 시 마크가 들어 있는 청색기도 어찌나 세차게 펄럭이는지 무지비한 채찍질을 연상시켯다. - P37
날로 고조되어가는 나의 관심이 나도 모르게 가연이네 생활을 조금씩 간섭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침투에 가연이는 조금도 방어적이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나타나기 전부터 그녀는 이미 생황르 방기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넉넉지 못하기로서니 그렇게 황폐를 도처에 처바르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 P53
만나본 그는 우리를 가르칠 때의 송사묵 선생님을 너무나도 빼닮아 사람이 자식을 남기고 죽는 한 아주 죽는 게 아니라는 걸 소름이 끼치도록 분명히 깨닫게 했다. - P186
나도 방금 달을 밀어올린 숲이 웅성대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웅성거림은 미세한 바람이 되어 우리가 앉은 옥상의 공기를 소곤소곤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이 행복이라는 거 아닐까. - P358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에서 무거운 추가 아래로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곤 한다. 내 가슴속엔 도대체 추가 몇개쯤 달린 걸까? 내려앉아도 내려앉아도 또 내려앉을 게 남아 있으니. 그 추는 내 안에 있으면서도 내 체온과는 무관하다. 무겁고도 차디차서 배창자를 뚫고 지나가는 통로를 선연히 느낄 수가 있다. - P361
전에는 중요하던 게 지금은 하나도 안 중요해진 게 또 뭐가 있냐구요? 형님이야말로 왜 안 하던 짓을 하실까? 전혀 귀담아들으실 것 같지 않은 얘기에 관심을 보이시니 말예요. 전에는 형체가 있어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한 줄 알았는데 그후엔 아니었어요. 눈에 안 보이는 걸 온종일 쫓을 적도 있어요. 아녜요. 육체와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구요. 그건 나한테는 너무 거창해요. 장미꽃과 향기의 문제예요. 장미꽃은 저기 있는데 향기는 온 방안에 있다. 향기는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 걸까? 고작 그 정도예요. - P392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어찌 그리 독한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네 형님? 그나저나 그 독한 세상을 우리가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 P402
수자는 아득하게 들리는 기적 소리를 식별하려고 청각을 곤두세우듯이 그녀 안에서 웅성이는 불안한 소요를 감지하려고 신경을 모은다......수자는 마치 마음에 드는 그림엽서를 마땅한 벽면에 찾아 붙여놓듯이 싱숭생숭해지려는 마음의 갈피를 이렇게 고정시켜버린다. 창 밖의 봄은 이미 예감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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