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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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형규는 그 이후로도 대마초를 계속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안해질 때마다 어절 수 없이 조금씩 피운다던 그것은 형규의 입지가 단단해질수록 오히려 횟수를 늘려갔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다는 건 언젠가는 그걸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까지 함께 얻는 것이었으므로.

<둥둥> 중에서 - P53

그저 내가 요양보호사의 모든 것을 좋아하진 않아도 안필순 할머니는 좋아하듯이, 원준도 복싱의 모든 부분을 좋아하진 않지만 어떤 부분은 좋아하겠거니 생각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브로콜리 펀치> 중에서 - P84

무심한 대답에 울컥 화가 치밀었는데 이상하게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마음이 개펄에 빠진 것마냥 푸욱 아래로만 가라앉는 것 같았다.

<브로콜리 펀치> 중에서 - P95

왜가리를 보면 그래요, 되게 타이밍을 잘 잡잖아? 여기서 좀 재미 봤다 싶으면 귀신같이 알고 다른 데로 날아가고. 여기는 이제 글렀다, 재들이 이 타이밍을 어떻게 잡는지가 난 너무 궁금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좀 알 것 같아요. 몇 번 실패하면 거기는 튼 거예요. 그럼 그걸 알았으면 날아가버리면 되거든. 거길 뜨면 되는 거야.

<왜가리 클럽> 중에서 - P171

왜가리는 그 생김새도 미끈하니 좋고 물고기를 잡는 모습도 노련하여 멋있었으나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사냥에 실패했을 때였다. 오랫동안 도사리고 집중해 부리를 내리꽂았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물방울만 사방에 튀기며 고개를 드는 왜가리가. 분명 나였다면, 아니 사람이었다면 민망하여 헛기침이라도 한번 하며 혹시 누가 이 창피한 꼴을 보지는 않았나 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법한 보기 좋은 실패였다. 하지만 왜가리는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패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같은 무게로 여기는 것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그도 그럴 것이 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왜가리가 특별히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왜가리에게는 그저 매번 잘 노려서 잘 내리꽂는 것만이 중요했고 그 뒤의 일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두 같았다. 그것이 멋있었다고, 가슴이 뻐근하도록 부러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왜가리 클럽> 중에서 - P171

처음 한 번의 시도에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했다면 인류는 여기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치즈 달과 비스코티> 중에서 - P198

남자는 몸뚱아리가 조그맣긴 했지만 확실한 성인의 얼굴을 달고 있었고 심지어 새어머니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였다. 조그맣고 동그란 눈이며 뭉툭한 콘 주변으로 흉한 주름이 자글자글한 탓이다. 평생 인상을 찌푸리고 살아온 사람들이 나이 들어 갖게 되는 그런 주름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소리 지를 때, 그 고함의 절반은 자기 얼굴에 도로 가서 들러붙게 된다. 그것들이 얼굴의 팬 곳곳마다 고이고 묵어서 꼭 저런 모양으로 남는 것이다.

<평평한 세계> 중에서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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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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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한 인간이 수행하는 역할은 그보다 휠씬 더 성숙한 인간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내 눈에 이들은 놀이터에서 노는 어린애들처럼 보인다.

<이해> 중에서 - P81

너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움직이는 목표를 조준하는 것과 같아. 너는 언제나 내 예상보다 앞서 나가 있을 거야.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에서 - P188

우리 관계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내가 매일 자각하게 되는 것은 네가 처음 걷기 연습을 하면서부터야. 너는 쉬지 않고 어딘가로 달려나가겠지. 네가 문지방에 부딪히거나 무릎이 까질 때마다 나는 너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게 돼. 마치 말을 안 듣고 멋대로 행동하는 팔이나 다리가 하나 더 생긴 듯한 느낌이지. 내 몸의 연장이니까 지각 신경이느끼는 아픔은 고스란히 나한테 전달되지만, 운동신경은 전혀 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 꼴이야.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에 - P193

사고란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말하는 과정이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에서 - P203

물론 천국이 지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곳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닐의 눈에는 부나 명성이나 매력처럼 가까운 자기 일로 생각하기에는 언제나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닐과 같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죽으면 갈 곳은 지옥밖에 없었고, 그것을 피하고 싶은 목적에서 인생 전체를 완전히 재구성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신은 닐의 인생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것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요행이나 불행이 결코 신의 의지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갈 가능성에 대해 닐은 아무런 공포도 느끼 않았다.

<지옥은 신의 부재> 중에서 - P325

닐은 자신이 신의 의식 너머에 존재함으로써 신에게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지만, 이것도 그의 감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신의 의식 너머에서 오랜 세월을 지옥에서 살아온 지금도 닐은 여전히 신을 사랑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지옥은 신의 부재> 중에서 - P363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경기하는 걸 보면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나? 물론 그렇지 않지. 그러기는커녕 경이감을 느끼고 감탄하지 않나. 그토록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는 거야. 그런데 왜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같은 느낌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건가?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반응을 보이는 우리에게 반성해야 한다고 하겠지. 페미니즘은 미학을 정치로 치환하려고 하니까. 그런 시도가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의 문화는 빈곤해질 거야.
세계 최고의 미인을 목격한다는 건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가슴 벅찬 일일세. 재능 있는 사람들만이 그 재능의 혜택을 받는 것은 아냐. 우리들 모두가 그 혜택을 받는다는 얘길세. 받을 수 있다는 편이 더 정확하겠군. 그럴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은 범죄나 마찬가지야.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다큐멘타리> 중에서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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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 살림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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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적당한 돈을 지불하고 대신 안락함을 얻는 일에 너무 인색하지 말 것. 그렇게 얻어지는 평화가 창조에 기여할 수 있다면 물질을 아끼지 말 것. - P51

나는 알고 있다. 말이 많고 망설임이 많은 고객일수록 점원들에게 얕보임을 당한다는 것을. 당연한 일이다. 많이 드러낼 수록 바닥이 보이는 법이니까. - P69

내가 받은 전화의 거의 대부분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것은 상담이란 이름의 자기 고백, 더욱 잔혹하게 몰아붙이자면 자기 과시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살았고 세상은 나를 이렇게 유린했으나 나는 고귀한 희생으로 그것을 견디었다는 것.
견딤. 고통의 인내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이 미덕이라는 주장은 기득권을 쥔 자들의 염치없는 요구일 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정신의 진보를 억압한다. 억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 P71

고요한 밤의 시간, 깊은 밤의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거룩한 밤‘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고요하고 깊은 것은 모두 거룩한 것이다. 나는 언어의 표피를 만지는 것보다 그것의 본질을 만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쓸데없는 말의 낭비는 딱 질색인 것이다. - P96

할 수 있는 일은 이 비극이 황홀해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듯이 황홀함에 대한 척도도 물론 다르다. 모두들 자기 방식대로 내용을 완성하고 자기 주장대로 형식을 이끌어 간다. 평가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가는 신이 내린다 해도 절정을 느끼는 것은 삶의 주인공인 바로 우리들이다. 황홀함은, 다른 모든 것은 다 절대자가 관장한다 하더라도, 그 감정만은 우리들이 소유한다.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래서 모든 비극은 황홀감을 지향한다. - P202

목숨을 던지는 일보다 사랑을 참는 일이 더 힘이 들었습니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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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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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상징체계를 전복할 힘이 없는 개인이 스티그마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주어진 장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 P20

근대는 공간을 압축하고, 거리를 말소하며, 장소를 파괴한다. - P21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 P26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 P31

노예는 한번도 태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까닭에 죽었을 때도 아무런 의례를 거치지 않고, 다만 "그 장소에서 치워진다." - P35

권력이란 ‘우리‘를 만드는 능력이자,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행동의 잠재적 가능성이다. ...... "권력은 함께 행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서 사람들이 흩어지는 순간 사라진다." 주인들은 ‘우리‘를 만들 줄 알았기에, 권력이 있고 지배할 수 있다. - P39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말해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은 또한 장소의존적이다. 실종자의 예에서 보았듯이 특정한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사람의 지위를 상실할 수 있다.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사회란 다름 아닌 이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 P57

몰락하고 명예를 잃은 인간은 노예와 비슷해진다. 노예의 굴욕을 날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노예와 비슷해지는 것만큼 큰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 P62

문화적 지식이나 상호작용의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실제로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특볋한 도움이 필요함을 의미할 뿐이지, 그에게 사회 구성원의 자격이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사회적 성원권을 요구하는 데는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이미 들아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 P65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 P73

사람이 수행적이라는 것은 사람다움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사람다움은 우리에게 있다고 여겨지며,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체하는 어떤 것, 서로가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 P83

얼굴은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의 내부나 표면이 아니라, 만남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흐름 속에 퍼져 있다. - P87

사람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의미가 가면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역사적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어떤 역할을 속에서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 또한 이 역할들 속에서이다. - P88

얼굴은 결코 가면과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가면의 뒤에 있다고 상상되는 무엇이다. 어떤 사람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가 만들어내는 것이 가면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그 가면을 굳이 벗기려 하지 않을 때, 나아가 그의 연기에 호응하면서 그가 가면을 완성하도록 도와주고, 실수로 가면이 벗겨지더라도 못 본 체할 때, 한마다로 그의 가면 뒤에 있는 ‘신성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할 때 그 사람은 얼굴을 갖게 된다. - P90

모욕은 존엄을 공격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무너뜨린다. 배타적 민족주의운동이나 파시즘은 먼저 배제하고자 하는 집단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데서 출발한다. 모욕당하는 집단이 여기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면, 그리하여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이런 모욕이 일상화되면, 그때부터는 법적으로 이 집단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일이 가능해진다. - P104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개인은 그러므로 다른 참가자들의 사람다움을 확인해주고, 사람이 되려는 그들의 노력을 지지해줄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역으로, 그는 남들이 자신을 사람으로 대우해주기를 기대할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 P116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 P131

사회적 성원권은 의례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 P144

굴욕과 모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욕에는 언제나 가해자가 있지만, 굴욕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 P159

모욕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모욕감을 강조하면서 단호하게 항의할수록 효과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반면에 굴욕을 당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가능한 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사건 자체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굴욕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나타내는 두 단어가 ‘쿨하다‘와 ‘찌질하다‘이다. - P160

우정은 차별성의 인정이다. 우정이란 무수히 많은 사람 가운데 어느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를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 P174

우정은 일종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정을 나누려면 먼저 증여자가 되어야 한다. - P182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망각으로부터 사회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 P217

어미가 병이 깊으면 약이나 침으로 치료하는 데 그쳐야 하며, 자기 몸을 손상시키면서까지 고치려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라 불효라고 주장하였다. - P224

유교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람다움을 증명하는 한에서, 조건부로만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인격은 지속적인 시험 아래 놓이며, 언제나 잠재적인 비난에 노출되어 있다. - P226

어떤 생명체가 사람이냐 아니냐는 그 생명체의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개입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 P249

윤리학의 과제는 당사자들을 대신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기보다, 그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토론을 위한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 P265

도덕적 발화가 효력을 갖는 것은 그것을 듣는 사람이 발화자와 동일한 도덕적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믿을 때에한해서이기 때문이다. - P273

한 장소를 떠나는 것은 그 장소에 속한 다른 모든 사람들을 떠나는 것이며,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 뿐 아니라 우리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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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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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고온은 시간의 속도를 늦췄다. 나무들은 낮잠을 자고 바람은 멈춰 있었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땅이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땅이 숨 쉬는 소리는 숙면 중에 나는 진한 소리였다. 대지는 다음 비가 오기 전까지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 P15

그녀는 혼자 부엌에 숨어서 눈을 감고 여주 껍질을 만지는 걸 좋아했다. 종기 같은 것들이 잔뜩 돋아 험준하게 기복하는 느낌이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도 이런 촉감이 아닐까 추측했다. 사실 그녀의 마음속에도 하나하나 수많은 종기가 감춰져 있었다. 종기는 단단하고 완고하고 건조하게 밤낮으로 조금씩 성장한다. 어떤 약물로도 치료되지 않고 끊임없이 악화되기만 한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스체터처럼 자신의 안과 밖을 뒤집을 수 있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면, 자신은 추한 종기가 잔뜩 돋아나 있는 괴물일 것 같았다. - P66

기억은 나의 존재이자 순환의 매개다. 나의 기억과 타인들의 기억을 통해 나는 존재한다. 이곳에 존재하고 현장에 존재하고 여기에 존재하고 저기에 존재한다. 나는 기억에 의지하고 기억에 기생한다. 기억이 있는 곳, 말할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있는 현장이자 구전의 역사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과 구강과 혀끝에 존재한다. - P76

하지만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식탁 위 솥에 담긴 죽을 일가족 아홉 식구가 다 먹고 나면, 먼저 아찬에게 방금 먹은 죽이 묽었는지 진했는지 묻고, 이어서 내게 물었다. 이어서 다섯 딸에게 묻고 다시 두 아들에게 물었다. 제각기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고 대답도 둘 중 하나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 수많은 ‘중간‘이 있었다. 한 가닥 줄로 이 ‘중간‘을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진함과 묽음 사이는 한 가닥 줄이다. 어떤 외부의 힘도 이 줄을 곧게 펼 수 없다. 줄은 왜곡되어 선회하면서 수많은 굴곡과 모퉁이를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매듭을 형성한다. 모든 굴곡에는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그 그림자가 보호처를 제공하므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죽이 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마음속으로는 진했다고 할 수 있고, 진했다고 말한 사람은 더 진하기를 갈망할 지 모른다. - P77

거울을 보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반년 전에 염색하고 파마한 머리칼은 웨이브가 죽고 색깔도 바랬다. 얼굴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눈꺼풀이 처지고 주름도 깊었다. 얼굴에 밤낮으로 지진이 일어나 이렇게 깊은 주름과균열이 생긴 것 같다. - P112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돌아갈 것이다.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고 머리로생각할 필요도 없다. 두 발이 가는 길을 알 것이고 도착하면 열쇠를 찾을 필요도 없이 문이 열릴 것이며,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등불이 켜져 있을 것이고, 더운물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며, 침대와 이불이 잇을 것이다. 식탁에는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테지만 음식은 다 식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입들이 전자레인지가 되어 차가운 음식들은 금세 따스해질 것이다. - P125

화훼 농가에서는 국화밭에 전구를 추가로 설치하고 있었다. 전기 선로에 이상이 생겨 수천수백 개의 전등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늘의 별들이 전부 국화밭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 P159

그 남자들 눈빛 속의 호수가 그녀의 몸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어린 시절 검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갑자기 비를 만났을 때 같은 느낌이었다. 개는 진흙탕 속을 뒹굴고 그녀는 개를 끌어당기다가 덩달아 진흙탕에 빠지고 말았다. 여름날의 빗물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진흙탕에도 그 열기가 남아 있었다. 개는 몸을 뒤집고 사람은 마구 뛰고 지렁이들이 꿈틀거렸다. 몸이 즐거움에 완전히 점령되어 더럽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 영화 속 남자들은 그녀에게 따스한 진흙탕에 젖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 P236

아주 먼 곳에서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며 연기와 더위, 습기를 실어다 타운 하우스에 내려놓았다. 바람이 너의 얼굴과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귀와 수염 자국이 남아 있는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너는 누군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뇌에서? 목구멍에서? 아니면 마음에서 오는 것일까?
가끔은 말이 바람으로부터 오기도 하지. - P286

너는 펜과 키보드로 소설을 썼지만 너희 엄마는 입으로 소설을 썼다. 입으로 이야기를 지어낸 다음, 그 위에 색을 입히고 인물을 첨가하여 소문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허황된 소문일수록 더 잘 믿게 되는 법이다. 소문의 바이러스는 침을 통해 전파되면서 무수한 사람들의 입을 거쳐 수많은 낯선 사람들에게 옮는다. 그런 소문은 추풍나무도 듣고 양어장의 물고기들도 듣게 된다. 베틀후추도 듣고 국화도. 마지막으로 떠돌아다니는 귀신들도 듣게 된다. 바람이 불면 소문은 바람에 말려 모든 사람의 귓가로 전파되는 거다. - P288

뚱뚱한 주인은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용징 사람들 모두가 한꺼번에 귀신을 본 것 같네."
.
.
.
이런 경이로움에 그녀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정말로 귀신을 본 것 같았다. 시골 들판의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귀신을 보진 못한 것 같았다. 처음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그녀는 온몸을 떨면서 입을 막아 날카로운 비명을 억제했다. 귀신을 만났을 때의 기분이 꼭 이럴 것 같았다. - P318

엄마가 그를 때릴 때면 주먹은 칼이 되고 발길질은 검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매섭고 흉악한 것은 역시 입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불처럼 뜨거웠다. - P338

샤오촨을 잡아 둔 데는 목적이 있었다. 외부 사람이 있으면 최대한 예의를 갖추게 되고 서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의를 갖춘 말은 농구 골대에 마구 공을 던지는 것과 같아서, 절대 정확하게 던지지 않고 누구도 핵심에 다가가지 않으며 골을 넣지 않는 게 가장 바람직했다. 공허한 대꾸는 상처를 주지 않았다. 날씨를 얘기하고 일출과 일몰을 얘기하고 낙엽과 바람, 비를 얘기했다. 중원절을 얘기하고 귀신을 얘기하고 닭갈비를 얘기했다. 감사를 얘기하고 예의를 얘기했다. 요컨대 서로를 얘기하지 않는 것이다. 예의로 서로를 대한다는 것은 언어의 예절을 이용하여 서로를 가능한 한 멀리 밀어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누구도 강가에 닳지 못하고 계속 표류하는 것이다. 자신이 외로운 섬이 될까 두려워 거미가 거미줄을 토하듯이 액체 상태의 말을 분출하여 공기 중에서 가는 실을 만들고, 섬유 상태의 가는 실로 서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 P363

그는 누나 등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누나의 어깨에는 도처에 지뢰가 있었다. 어디든지 누르면 끊임없이 신음 소리가 폭발했다. - P408

천텐홍은 자신이 외부인이라 전장에 개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말다툼을 할 줄도 몰랐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기름기가 없는 사람이고, 차가운 몸은 불을 만나도 금세 꺼져 버릴 거라고 생각햇다. 그와 T는 말다툼을 전혀 하지 않았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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