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9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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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인 에어를 처음으로 읽었던 것은 아마도 대학을 갓 졸업한 후였을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20대의 처녀가 상당히 두꺼운 제인 에어를 읽어낼 수 있었던 힘은 로맨스때문이었다. 동화책과 할리퀸에서 많이 읽었던 어려운 처지의 처녀가 역경을 딛고 부자인 남자와 결국은 해피엔드로 행복하게 오래도록 잘 살았다는 이야기. 어린 시절 순정만화와 사춘기 시절 하이틴 로맨스를 교과서보다 더 많이 읽어냈던 나는 20대 중반에 읽은 제인 에어도 그런 맥락에서 읽었다. 감동적인 해피엔딩의 연애소설로 기억을 하며 많은 이들에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고전으로 제인 에어를 추천하였고 단 한 번도 원망을 들은 적이 없다.

제인 에어를 처음 읽었던 나이만큼의 세월이 지난 후 제인 에어를 다시 읽게 되었다. 나는 제인 에어를 아주 잘 쓰인 로맨스 소설로 여기고 있던 터라 줄거리를 다 아는데 또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세상도 흉흉하니 가벼운 연애 소설로 마음을 몰캉하게 하고 싶기도 해서 4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 2권 분량의 완역본을 찬찬히 읽게 되었다.

, 우리는 고전이라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읽지도 않고서 읽었다고 착각하거나 읽었음에도 기억을 못하는 것이 고전이라고 했던가! 20대 처녀였던 내가 만난 제인 에어와 지금 다시 만난 제인 에어는 내가 든 나이만큼이나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같은 작품 같은 인물이 많이 다르게 나에게 다가왔다.

로맨스를 그리기 위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갖다 쓰고 돈 많은 중년의 남자 주인공을 만들어 낸 줄 알았는데, 제인 에어라는 여성이 어떻게 성숙하고 성장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어린 시절의 우울을 배경으로 깔았고 돈 많은 중년의 남자를 조연으로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지금은 눈에 띄었다. 과거와 현재에 내가 느낀 독후의 차이는 그 만큼 내가 성숙했다는 증거이겠지만, 왜 처음 제인 에어를 만났을 때 이 성숙된 감상을 가지지 못했는지 왜 세월이 흘러서야 푹 고아낸 사골 국물 같은 깊이가 나와야 한 건지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느낀 성찰과 감상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이번에 제인 에어를 읽으면서 깨달은 두 가지 고전의 법칙이 있다.

첫째, 주인공은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떠나야 이야기가 시작되고 떠나야 고전이 된다.

제인 에어는 자신을 키워준 리드부인의 저택을 떠났고 유년기를 보낸 로우드 학교를 떠났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집을 떠났다. 오디세우스가 문학작품에서 가출(?)의 시작을 알렸고 같은 그리스의 영향권아래에 있던 오이디푸스도 그러했다. 동양권에서는 서유기의 손오공이 삼장법사와 길을 떠났고 우리나라에선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울분에 못 이겨 집을 떠났다.

경계 안에 머물게 하는 울타리는 안전하지만 역경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아픔과 성장은 역경을 동반하는 것. 그래서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떠나고 있다. 엄마를 찾아 삼만 리나 되는 길을 떠나고(엄마 찾아 삼만 리), 배 안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를 따라 섬으로 떠나고(그리스인 조르바), 떠날 구실이 마땅치 않으면 비행기 사고라도 내서 섬에 표류하게 만들며(파리 대왕), 이즈마엘처럼 배 타고 멀리 바다로 떠나보내지(모비 딕) 못한다면 작은 배라도 만들어 매일매일 주인공을 바다로 내몰곤 한다(노인과 바다). 삶도 고전이 되려면 일단 떠나야 하는 것일까?


두 번째로는 주인공의 독백과 생각이 많아야 한다. 스토리만으로는 고전이 될 수 없다.

내가 20대에 제인 에어를 읽었을 때 로맨스만 기억했던 이유는 줄거리만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같은 출판사의 같은 텍스트를 읽었다. 그때의 나는 주인공의 독백과 생각은 건너뛰고 대화와 줄거리만을 쫓았다. 그러다보니 제인 에어가 어떤 생각의 지도를 어떻게 그렸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있으니 제인 에어의 생각을 따라 책을 읽어 나갔다. 어떤 순간과 상황에 맞부딪힐 때 그녀는 어떤 생각을 가졌고 어떤 결심을 하였나에 더 관심을 두었다. 제인은 소설의 처음과 결말에 사고가 변화하였다. 여러 개의 사건과 사고를 경험하면서 그녀의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어지고 깊어진 탓일 게다.

인생 속의 상황이라는 것이 소설이든 실제이든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태어나고 친구를 만나고 연인을 만나고 헤어지고 이별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이런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극복하고 성장해나가느냐는 것이 우리네 인생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숙제이다.

고전에서는 독백과 생각의 흐름이 많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작품의 반 이상의 주인공 알료샤의 독백과 생각이거나 알료샤와 조시마 장로의 대화이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는 철학이 있고 가치관이 있으며 질문이 있고 해답이 있다. 이것은 순전히 줄거리만 따라간다면 독자들은 책을 읽고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작품인지 전혀 파악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알료샤의 독백과 조시마 장로의 생각과 그 둘의 대화를 곱씹어 읽으려니 고전을 읽는 것이 품이 상당히 드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또한 웬만한 철학책에 맞먹는 이해와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비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만 그렇겠는가? 현재 우리가 고전이라고 일컫는 작품들의 대다수가 생각과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시대정신과 가치관과 철학을 향유하게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고전에서 나오는 생각들은 작품이 처음 발간되었을 때나 세월이 몇 십, 몇 백 년이 흐른 지금에나 원형은 같다. 인간의 삶과 고민은 형태를 달리할 뿐 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근원은 거의 같기 때문인데,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제인 에어는 어린 시절 헬렌 번즈라는 친구를 잃고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스스로 고난을 찾아 떠났다.

"나는 자유를 원했다. 자유를 갈망했다. 나는 자유를 원해서 기도를 올렸다. 기도 소리는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흩어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기도를 그치고 좀 더 겸손한 탄원을 했다. 변화와 자극을 달라고 기원했다. 그 간절한 애원마저 막연한 공간 속에 휩쓸려 들어가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거의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게 새로운 고생살이를 하도록 해주소서!"(152)


새로운 고생살이를 찾아 떠난 제인은 손필드 저택에서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였다. 이러는 동안 제인은 스스로 단단해져 가며 한 인간으로 완성되어갔다. 로체스터의 비밀을 알게 되고 손필드 저택을 떠나 옆구리를 할퀴는 기아까지 경험하면서, 제인은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하게 되고 성숙된 인간으로서 자아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생명은 모두 요구와 고통과 책임을 그냥 지닌 채로 아직도 나의 것이었다. 지워진 짐은 날라야 했다. 욕구는 충족되어져야 하고, 고난은 견디어야 하고 책임은 다해야 했다. 나는 출발했다." (P175)

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 스스로 진리를 터득하고 삶의 나침반을 가다듬은 제인 에어. 제인 에어를 다시 읽으면서 심장을 간질이는 로맨스뿐만 아리나 내 뇌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인생 훈련법을 또 하나 배우게 되었다. 이래서 고전은 읽는 나의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르게 다가오는 것인가 보다.


나는 어디로 떠나야 할까? 어떤 방향을 기준점삼아 출발을 해야 할까? 고전을 덮으면서 내 의문은 더 늘어만 간다. 답은 떠나야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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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0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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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불타고 기대에 차 있던 여인, 거의 신부가 될 뻔했던 제인 에어는 다시 싸늘하고 외로운 처녀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인생은 창백해고 전도는 황량했다. 한여름에 크리스마스 때의 서리가 내렸고 12월의 폭풍이 7월에 휘몰아쳤고, 얼음이 익은 사과를 뒤덮었고, 눈보라가 피어나는 장미를 짓밟아 버리고, 콩밭과 목초지는 얼어붙은 수의로 뒤덮여 버렸다. 어제 꽃이 만발하던 오솔길은 오늘 인적도 없이 눈에 덮여 사라졌고, 열두 시간 전에 열대의 숲처럼 울창하고 향기롭게 물결치던 숲은 이젠 겨울철 노르웨이의 소나무숲처럼 황량하고 쓸쓸하게, 흰빛 일색으로 평쳐져 있을 뿐이었다. 나의 희망은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 P116

그러나 생명은 모두 요구와 고통과 책임을 그냥 지닌 채로 아직도 나의 것이었다. 지워진 짐은 날라야 했다. 욕구는 충족되어져야 하고, 고난은 견디어야 하고 책임은 다해야 했다. 나는 출발했다. - P175

기아라고 하는 독수리가 이처럼 내 옆구리에 부리와 갑톱을 박아놓고 있는 한, 고독도 고독이 아니고 휴식도 휴식이 아니었다. - P180

"(...) 그들의 잠을 깨우고-그 노력을 하도록 설득하고, 권유하고 그들이 어떠한 재능을 타고났으며, 어째서 그 재능은 주어졌는지를 가르쳐주고-그들의 귀에 하느님의 사명을 전달하고, 하느님이 선택하신 지위를 직접 하느님의 명령으로 그들에게 주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그들 자신의 마음이 우선 본인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는 게 아닐까요?" - P325

그는 병사가 좋은 무기를 존중하듯이 나를 존중할 뿐이다. - P331

"선량하고 위대한 분이에요. 그러나 그분은 매정스럽게도 자신의 커다란 포부를 찾는 데 급급해서, 위대하지 못한 사람의 감정이나 권리는 생각지 않는 분이세요. 그러니까 하찮은 인간들은 그분 앞에서 물러나야 해요. 그분의 발에 밣히지 않도록." -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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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9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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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음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를 나는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 것인가! 그러나 그 대답을 챙기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이들이란 감정은 풍부해도 그 감정을 분석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설령 분석이 머릿속에서 얼마쯤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분석의 결과를 말로 표현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타인에게 털어놓음으로써 내 슬픔을 달랠 수 있는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기회를 놓칠까 보아 나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빈약하기는 하지만 거짓이 없는 대답을 하려고 애를 썼다. - P38

그날 오후는 평화와 조화속에 지나갔다. 밤이 되자 베시는 내게 아주 재미ㅣ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일 좋은 노래도 불러주었다. 내게도 인생이 햇빛을 번뜩여 주었던 것이다. - P68

그녀의 눈길은 안으로 향해서 자기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있는 성싶었다. 눈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지사를 보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 P89

지금 나는 이러한 경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팔 년간의 습관이 단지 반나절 사이에 진절머리 나는 것으로 변했다. 나는 자유를 원했다. 자유를 갈망했다. 나는 자유를 원해서 기도를 올렸다. 기도 소리는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흩어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기도를 그치고 좀 더 겸손한 탄원을 했다. 변화와 자극을 달라고 기원했다. 그 간절한 애원마저 막연한 공간 속에 휩쓸려 들어가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거의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게 새로운 고생살이를 하도록 해주소서!‘ - P152

외양이라고 하는 것은 젊은이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는 법이다. - P176

사람이란 안온한 생활에 만족해야 하는 법이라고 말해보았자 그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사람이란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엔 필경 만들어내고야 만다. - P198

사건이 일어났다가 내게서 떠나가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로맨스도 없고 흥미도 없는 평범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조한 생활의 한 시간에 변화를 갖다 준 셈이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희구되었고 또 나는 그것을 부어하였다.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이 내게는 기뻣다. - P209

차라리 그 당시에 괴롭고 불안정한 생활의 폭퐁 속에 내던져진 몸이 되어, 갖은 고생을 다 한후 지금 내가 불만을 가지고 있는 평온한 생활을 동경하게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렇다. ‘너무 편한 의자‘에 눌러앉아 있기가 싫증이 난 사람에게 긴 산책이 좋듯이 그게 내게는 더 좋았을 것이다. - P210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다든가 세상 경험이 많으시다는 것만 가지고는 제게 명령을 할 권리가 없으시다고 생각해요. 우위를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시간과 경험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에 달려 있다고 봐요." - P243

"(...)하지만 조심은 지나쳐서 손해나는 일이 없다고 난 생각해요. 문의 빗장을 지르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고 자신과 재양 사이에 빗장을 질러두는 것이 좋은 일이죠. 사람들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나보고 얘기하라면 하느님이 재앙을 막는 수단까지 보살펴주시는 건 아니죠. 수단이 신중하게 강구되었을 때엔 축복을 내려주시지만."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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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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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벼무려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세심하게 바라보고 관찰하여 구체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라도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면 오래도록 관찰하고 연구하였기에 박제가는 결코 얼버무리는 법이 없었다. 조선 양반들의 냉대 속에서 박제가는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쉽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밤을 책 더미 속에서 안타까워하며 괴로워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그의 고통과 고뇌가 나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책만 보는 바보>가 발행된 2005년에 내가 왜 이 책을 외면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책 표지의 뒷짐 진 선비가 고리타분해 보였거나, ‘책만 보는 바보’라는 제목에 공연한 반감을 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15년 전의 내가 그저 책을 멀리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책을 읽은 모든 사람들이 아는 귀한 보석 같은 내용을 나만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가 15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묘한 낭패감마저 느껴진다.


궁궐 공부와 답사를 위해서 창덕궁 궐내 각사에 있는 ‘규장각’과 그에 딸린 부속 건물인 ‘검서청’에 간 적이 여러 번이다. ‘규장각’과 ‘검서청’을 공부하기 위해서 참고로 한 자료에는 “‘검서청’은 규장각에 딸린 부속 건물로 규장각의 관리인 ‘검서관’들이 야근할 때 주로 이용한 곳입니다.”라고 설명이 되어있었다. 그리곤 덧붙여져 있었다. “규장각 검서관으로는 잘 아시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이 있었습니다.”

굳이 그 참고 자료가 아니더라도 나는 진즉부터 박제가와 유득공이야 유명한 저서인 <북학의>와 <발해고>덕문에 이름을 알렸다고 하지만 이덕무는 왜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었다.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북학의>와 <발해고>는 들어보았지만 이덕무의 저서나 업적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만 보는 바보>로 인해서 간밤에 쌓인 눈이 다음 날의 눈부신 햇살에 이른 아침부터 사르르 녹듯이 내가 가진 의문점도 사르르 녹아버렸다.


‘간서치(책만 보는 바보)’였던 이덕무는 정조 임금님을 보필하여 수많은 정책의 산실이자 보고(寶庫)였던 규장각을 규장각이게끔 만든 장본인 중 한 사람이었다. 역사 속에서 제 몫을 다한다는 것은 꼭 전쟁에서 적군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것도 아니요, 반드시 어떤 물건이나 유산을 창조해야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저 제 자리에서 제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해내는 것, 지름길을 찾지 않고 능력껏 임무를 완수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충분히 잘 굴러갈 수 있다. 이런 단순한 진리에 요령을 피우기 때문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간혹 빠지기도 하고 수레가 넘어지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참을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도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엄중한 신분 체제 아래에서 서자로 태어나 ‘창고 속의 누렇게 뜬 곡식과 같이 세상에 쓰일 데가 없다’는 것에 좌절을 느끼던 이덕무. 책과 벗들과 함께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니 그 쓰임을 다하는 날이 왔다. 임금이 바뀌었고 규장각이라는 새로운 도서관이 생겼으며 비록 정기적인 녹봉을 받지는 못하지만 검서관이라는 관직도 하사받았다. 책만 보고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이덕무는 늘 가슴 아래가 묵직한 청춘을 보냈지만 마침내 마침맞는 보직을 하사받아 스스로가 빚어낸 삶이 희미한 빛을 내게 되었다.

<책만 보는 바보>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당연히 ‘책’과 관련된 것이고 둘째는 이덕무의 벗과 스승에 대한 것이며 마지막 셋째가 규장각과 검서관으로서의 이야기이다.


이덕무는 일곱 살 즈음에도 밖에서 놀기보다 책과 함께 노니는 것을 더 즐겼다. 그런 그였으니 책과 함께 하는 순간에 작은 그의 서재(청장 서옥)는 더 이상 작은 곳이 아니라 푸른백로(청장)가 맘껏 날갯짓을 할 수 있는 드높은 창공이었을 것이다. 이덕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책이었다.

하지만 이런 책도 질투할 만큼 이덕무가 더 사랑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벗 들이다.


<책만 보는 바보>에서 내 가슴이 가장 흔들렸던 부분도 바로 이덕무의 벗들 때문이었다. 그저 국사 책에서 한 줄의 딱딱한 글자로만 접했던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홍대용, 박지원은 역사 속 죽은 인물이 아니었다. 이덕무와 함께 다가온 그들은 나에게도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고 친구였으며 스승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박제가에게 특히 더 마음이 갔다. 기골이 장대했던 박제가는 서자로서 비뚤어진 세상을 원망하고 제 몫을 하지 못하는 양반들에게 분노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받기도 하고 비웃음을 사기도 했던 박제가는 그렇지만 표현하지 않은 가슴속 따스함을 가진 사내였다.


얼벼무려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세심하게 바라보고 관찰하여 구체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라도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면 오래도록 관찰하고 연구하였기에 박제가는 결코 얼버무리는 법이 없었다. 조선 양반들의 냉대 속에서 박제가는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쉽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밤을 책 더미 속에서 안타까워하며 괴로워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그의 고통과 고뇌가 나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원래 나는 메이저보다 마이너에게 마음이 쓰이는 사람이다. <책만 보는 바보>에 나오는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대개다 조선의 마이너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 한마디, 마음 한구석,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흔들었다. 왜 이덕무와 그의 마이너 한 벗들을 2005년부터 사귀지 못하였나 하는 안타까움이 이 벗들을 대하면 대할수록 깊어지고 있었다.책, 벗, 공부법, 세상을 바라보는 법 - <책만 보는 바보>를 읽고 느낀 점도 수십 가지이고 나눌 말도 몇 십여 가지이지만 가끔은 말은 아낄 때 더 빛이 나는 법. <책만 보는 바보>의 마무리는 ‘벗’에 대한 박제가의 생각으로 하고자 한다.


벗과의 사귐은 술잔을 앞에 두고 무릎을 맞대고 앉거나 손을 잡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것, 여기에 벗과의 진정한 사귐이 있습니다."(121쪽)

두 살, 일곱 살, 아홉 살 그리고 열세 살 어린 벗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눈 이덕무와 친구들- 백동수, 유득공, 박제가 그리고 이서구. 위의 박제가의 말처럼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진정한 벗이 생각나는 이 밤, 잘 못하는 소주 한 잔 기울이고픈 머언 고향의 친구들이 저절로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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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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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나는 사실로 문살을 반듯하게 짠 다음 상상으로 만든 은은한 창호지를 그 위에 덧붙여 문을 내 보았습니다. 이 문을 통해 햇살도 드나들고, 바람도 드나들고, 옛사람과 우리의 마음도 서로 드나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P7

이 방의 문고리를 잡을 때마다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등을 보이며 가지런히 꽃혀 있는 책들이 모두 한꺼번에 나를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만 같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책 속에 담긴 누군가의 망므과 내 마음이 마주치는 설렘. - P13

겨울 햇살은 어느새 책상 위에서 내려와 방바닥을 굴러다닌다.(...) 오랜만에 짓빛 구름을 걷어 버리고 나와서인지, 햇살의 움직임이 한결 바겹다. 책장의 보풀도 따라 일어나 햇살이 공중에서 지나가는 길을 보여 주며 함께 동동거린다. - P15

책읽기의 이로움을 나는 이렇게 써 두었다.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휠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둘째,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 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 P24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사람들 사이의 어떠한 곳에서도 우리가 마음 편히 있을 자리는 없었다. 우리가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에 맞는 벗들과 함께 있는 그 순간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러한 벗들이 그리웠다. 내 입으로 글을 읽어도 듣는 것은 나의 귀뿐, 내 손으로 글을 써도 보는 것은 나의 눈 뿐, 오로지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아 위안해 온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 P39

청장이 푸른 날개짓을 하듯이, 나는 날마다 방 안에서 책 속을 누비며 다녔다. 수백 년, 수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하고, 가 보지 않은 낯선 곳에 마음껏 내 발자국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림을 보듯, 소리를 듣듯, 나만의 작은 방에서 마음껏 책 속에 빠져 들었다. - P50

내가 윤회매 만들기를 좋아한 까닭은, 살아 있는 꽃 못지않은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모으고 매달릴 수 있는 그 일이 좋아서였다. 나는 유회매를 만드는 손끝에 나 지신을 모두 실었다. - P57

"나는 위아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정말 싫습니다. 예의를 지키라는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집안이나 신분,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이는 것을 정하라는 게 아닙니까? 옳고 그름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여야지, 어찌 그 사람의 껍데기만 보고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 P63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그는 비로소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오게 된다. 좀 더 마음을 기울이면 그가 살아온 이야기, 그의 가슴속에 담은 생각들을 알게 된다. 더욱더 마음을 기울이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벗이 되리라. 박제가와 나처럼. 우리와 다른 벗들처럼. - P75

‘붉다‘는 그 한 마디 글자 가지고
온갖 꽃을 얼버무려 말하지 말라.
꽃술도 많고 적은 차이 있으니
꼼꼼히 다시 한 번 살펴봐야지.

-박제가 - P76

얼버무려 말하지 않는 다는 것, 그것은 세심하게 바라보고 관찬하여 구체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라도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면 오래도록 관찰하고 연구하였기에 박제가는 결코 얼버무리는 법이 없었다. - P76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쉽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그는 얼마나 많은 밤을 책 더미 속에서 안타까워하며 괴로워했을까. 또 얼마나 많은 날들을 거리로 나아가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았을까. - P78

"유득공의 마음속에는 우물 하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근심 걱정도 한 번 담갔다 하면 사뿐하게 걸러져 밝은 웃음으로 올라오게 하는 우물 말입니다." - P85

"나도 내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무언가를 붙들고 싶습니다. 내가 끝까지 부여잡은 그것이, 후대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탄뿐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득공 - P94

"하늘 아래 가장 고귀한 우정은 가난할 때의 사귐이라 합니다. 벗과의 사귐은 술잔을 앞에 두고 무릎을 맞대고 앉거나 손을 잡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것, 여기에 벗과의 진정한 사귐이 있습니다."
-박제가가 백동수에게 주는 편지의 첫 구절 - P121

가슴속에 담긴 생각은 얼굴에도 그대로 드러나는 법. 흐르는 시간은 그 표정들을 놓치지 않고 사람의 얼굴에 새겨 둔다. 바람과 함께 온 세월이 바위의 얼굴을 조금씩 깎아 놓는 것처럼, 서로의 온기로 그늘이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나, 나와 벗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근심 어린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 P130

"...그대는 침착하고 슬기로워 바탕과 재질을 갖춘 데다 나이 또한 한창이니, 다른 분야도 폭넓게 공부하기 바라오. 그러면 창고 속에서 누렇게 뜬 곡식과 같은 나처럼, 이 세상을 헛되이 살았다는 탄식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
-이덕무가 이서구에게 - P135

스승은 자신의 훌륭한 인품으로 제자들을 서서히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두 마디 말로 제자들에게 번뜩이는 영감과 충격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 P154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느끼고 샢은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사물을 받아들인다.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싶은 것, 인정하고 싶은 것을 미리 정해 두고, 그 밖의 것은 물리치고 거부한다. 그러한 마음에 기초가 되는 것은 역시 지난날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은 자신만의 감각이나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선입견이다.
(...) 그리하여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동물인 코끼리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비좁은 틀에 거대한 코끼라의 몸을 구겨 넣으려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코끼리를 다리가 다섯 개인 하마라든가, 주둥이가 새의 부리처럼 별나게 긴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 P176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비참한 것은 쓰일 데가 없다는 것이다. 책만 파고들면 무엇 하나? 내 말과 글로는 세상을 조금도 바꾸어 놓지 못하는 것을. 몸을 움직여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이던가? 고작 종이를 묶어 책을 만들거나 밀랍으로 윤회매를 만드는 것뿐. 그러나 살아가는 데는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일들이었다. - P185

우리 일행 중에는 이러한 연경 거리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청나라의 관리들이 없을 때면, 황제의 도시 북경이 주인을 잘못 만나 천박하고 정신없는 저잣거리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며 혀를 차기도 하였다. 그들은 옛 성인들의 묘나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 곳만 찾아다니려 할 뿐, 연경 거리로 나와 지금 중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실제 생활을 보지 않으니 느끼는 것도 없을 터였다. 이처럼 옛 글귀나 외우고 있는 고루한 선비들에게 나라 살림을 맡기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생각하면, 박제가의 가슴속에는 더욱 불길이 이글거렸을 것이다. - P200

이층 주합루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무성한 나무들이 계절따라 옷을 바꾸어 입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늘 가슴 아래가 묵직한 세월을 보내 온 나는, 그때마다 연못 위에 떠 있는 연잎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 P212

아버님의 시대보다 나의 시대가 더 나아졌듯, 나의 아들들의 시대는 좀 더 나아지리라. 머지않아 세상에 태어날 나의 손자의 시대는 더욱 그러하리라. 우리의 후손은 못난 조상처럼, 소중한 삶을 탄식과 분노로 오랫동안 소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노라면 스스로가 빋어 낸 삶이 희미한 빛을 낼 때가 있지 않을까. - P245

틈나는 대로 유득공은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역사는 책장 속에 고이 모셔져 있기보다, 팔딱팔딱 뛰는 아이들의 가슴속에 자리해야 한다고 여기는 그였다. - P246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흔적은 사람의 기억과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섦속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길을 내기도 하고, 각자의 시간을 서로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 (...)
시간을 나누다는 것은, 반드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옛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들의 시간을 나누어 받기도 한다. 옛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이 오롯이 담겨 있는 책들, 그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산과 들을. 내 안에 스며 있는 그 시간들을 느낄 때면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을 수 있었을까. 나라면 그 순간 이런 마음이었을 텐데 하며, 겪어보지 못한 아득한 옛일이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샘솟듯 흘러나오는 건, 내 안에 이미 그 시간이 스며든 까닭일 것이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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