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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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나는 사실로 문살을 반듯하게 짠 다음 상상으로 만든 은은한 창호지를 그 위에 덧붙여 문을 내 보았습니다. 이 문을 통해 햇살도 드나들고, 바람도 드나들고, 옛사람과 우리의 마음도 서로 드나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P7

이 방의 문고리를 잡을 때마다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등을 보이며 가지런히 꽃혀 있는 책들이 모두 한꺼번에 나를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만 같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책 속에 담긴 누군가의 망므과 내 마음이 마주치는 설렘. - P13

겨울 햇살은 어느새 책상 위에서 내려와 방바닥을 굴러다닌다.(...) 오랜만에 짓빛 구름을 걷어 버리고 나와서인지, 햇살의 움직임이 한결 바겹다. 책장의 보풀도 따라 일어나 햇살이 공중에서 지나가는 길을 보여 주며 함께 동동거린다. - P15

책읽기의 이로움을 나는 이렇게 써 두었다.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휠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둘째,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 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 P24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사람들 사이의 어떠한 곳에서도 우리가 마음 편히 있을 자리는 없었다. 우리가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에 맞는 벗들과 함께 있는 그 순간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러한 벗들이 그리웠다. 내 입으로 글을 읽어도 듣는 것은 나의 귀뿐, 내 손으로 글을 써도 보는 것은 나의 눈 뿐, 오로지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아 위안해 온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 P39

청장이 푸른 날개짓을 하듯이, 나는 날마다 방 안에서 책 속을 누비며 다녔다. 수백 년, 수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하고, 가 보지 않은 낯선 곳에 마음껏 내 발자국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림을 보듯, 소리를 듣듯, 나만의 작은 방에서 마음껏 책 속에 빠져 들었다. - P50

내가 윤회매 만들기를 좋아한 까닭은, 살아 있는 꽃 못지않은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모으고 매달릴 수 있는 그 일이 좋아서였다. 나는 유회매를 만드는 손끝에 나 지신을 모두 실었다. - P57

"나는 위아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정말 싫습니다. 예의를 지키라는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집안이나 신분,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이는 것을 정하라는 게 아닙니까? 옳고 그름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여야지, 어찌 그 사람의 껍데기만 보고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 P63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그는 비로소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오게 된다. 좀 더 마음을 기울이면 그가 살아온 이야기, 그의 가슴속에 담은 생각들을 알게 된다. 더욱더 마음을 기울이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벗이 되리라. 박제가와 나처럼. 우리와 다른 벗들처럼. - P75

‘붉다‘는 그 한 마디 글자 가지고
온갖 꽃을 얼버무려 말하지 말라.
꽃술도 많고 적은 차이 있으니
꼼꼼히 다시 한 번 살펴봐야지.

-박제가 - P76

얼버무려 말하지 않는 다는 것, 그것은 세심하게 바라보고 관찬하여 구체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라도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면 오래도록 관찰하고 연구하였기에 박제가는 결코 얼버무리는 법이 없었다. - P76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쉽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그는 얼마나 많은 밤을 책 더미 속에서 안타까워하며 괴로워했을까. 또 얼마나 많은 날들을 거리로 나아가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았을까. - P78

"유득공의 마음속에는 우물 하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근심 걱정도 한 번 담갔다 하면 사뿐하게 걸러져 밝은 웃음으로 올라오게 하는 우물 말입니다." - P85

"나도 내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무언가를 붙들고 싶습니다. 내가 끝까지 부여잡은 그것이, 후대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탄뿐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득공 - P94

"하늘 아래 가장 고귀한 우정은 가난할 때의 사귐이라 합니다. 벗과의 사귐은 술잔을 앞에 두고 무릎을 맞대고 앉거나 손을 잡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것, 여기에 벗과의 진정한 사귐이 있습니다."
-박제가가 백동수에게 주는 편지의 첫 구절 - P121

가슴속에 담긴 생각은 얼굴에도 그대로 드러나는 법. 흐르는 시간은 그 표정들을 놓치지 않고 사람의 얼굴에 새겨 둔다. 바람과 함께 온 세월이 바위의 얼굴을 조금씩 깎아 놓는 것처럼, 서로의 온기로 그늘이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나, 나와 벗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근심 어린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 P130

"...그대는 침착하고 슬기로워 바탕과 재질을 갖춘 데다 나이 또한 한창이니, 다른 분야도 폭넓게 공부하기 바라오. 그러면 창고 속에서 누렇게 뜬 곡식과 같은 나처럼, 이 세상을 헛되이 살았다는 탄식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
-이덕무가 이서구에게 - P135

스승은 자신의 훌륭한 인품으로 제자들을 서서히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두 마디 말로 제자들에게 번뜩이는 영감과 충격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 P154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느끼고 샢은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사물을 받아들인다.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싶은 것, 인정하고 싶은 것을 미리 정해 두고, 그 밖의 것은 물리치고 거부한다. 그러한 마음에 기초가 되는 것은 역시 지난날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은 자신만의 감각이나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선입견이다.
(...) 그리하여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동물인 코끼리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비좁은 틀에 거대한 코끼라의 몸을 구겨 넣으려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코끼리를 다리가 다섯 개인 하마라든가, 주둥이가 새의 부리처럼 별나게 긴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 P176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비참한 것은 쓰일 데가 없다는 것이다. 책만 파고들면 무엇 하나? 내 말과 글로는 세상을 조금도 바꾸어 놓지 못하는 것을. 몸을 움직여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이던가? 고작 종이를 묶어 책을 만들거나 밀랍으로 윤회매를 만드는 것뿐. 그러나 살아가는 데는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일들이었다. - P185

우리 일행 중에는 이러한 연경 거리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청나라의 관리들이 없을 때면, 황제의 도시 북경이 주인을 잘못 만나 천박하고 정신없는 저잣거리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며 혀를 차기도 하였다. 그들은 옛 성인들의 묘나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 곳만 찾아다니려 할 뿐, 연경 거리로 나와 지금 중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실제 생활을 보지 않으니 느끼는 것도 없을 터였다. 이처럼 옛 글귀나 외우고 있는 고루한 선비들에게 나라 살림을 맡기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생각하면, 박제가의 가슴속에는 더욱 불길이 이글거렸을 것이다. - P200

이층 주합루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무성한 나무들이 계절따라 옷을 바꾸어 입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늘 가슴 아래가 묵직한 세월을 보내 온 나는, 그때마다 연못 위에 떠 있는 연잎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 P212

아버님의 시대보다 나의 시대가 더 나아졌듯, 나의 아들들의 시대는 좀 더 나아지리라. 머지않아 세상에 태어날 나의 손자의 시대는 더욱 그러하리라. 우리의 후손은 못난 조상처럼, 소중한 삶을 탄식과 분노로 오랫동안 소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노라면 스스로가 빋어 낸 삶이 희미한 빛을 낼 때가 있지 않을까. - P245

틈나는 대로 유득공은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역사는 책장 속에 고이 모셔져 있기보다, 팔딱팔딱 뛰는 아이들의 가슴속에 자리해야 한다고 여기는 그였다. - P246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흔적은 사람의 기억과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섦속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길을 내기도 하고, 각자의 시간을 서로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 (...)
시간을 나누다는 것은, 반드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옛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들의 시간을 나누어 받기도 한다. 옛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이 오롯이 담겨 있는 책들, 그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산과 들을. 내 안에 스며 있는 그 시간들을 느낄 때면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을 수 있었을까. 나라면 그 순간 이런 마음이었을 텐데 하며, 겪어보지 못한 아득한 옛일이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샘솟듯 흘러나오는 건, 내 안에 이미 그 시간이 스며든 까닭일 것이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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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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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주의자

토크니즘이란 이렇게 역사적으로 배제된 집단 구성원 가운데 소수만을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차별시정정책을 말한다. 토크니즘은 차별받는 집단의 극소수만 받아들이고서도 자별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기회가 열려있는 것처럼 보이고 노력하여 능력을 갖추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는 기대를 주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은 이상적인 평등의 상황과는 꽤 먼 상태임에도 평등이 달성되었다고 여기는 착시를 일으킨다. - P24

누군가는 여전히 특권이란 말이 불편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혹은 남성으로서 이렇게 살기 힘든데 나에게 무슨 특권이 있는 거냐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불평등이란 말이 그러하듯, 특권 역시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유리한 질서가 있다는 것이지, 삶이 절대적으로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고기에 비유해 생각해보자. 흐르는 물결을 따라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그 물결을 가로지르거나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보다 편하다. 하지만 물결을 따라가며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고 그저 편하다고만 할 수 없다. 삶은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를 힘들게 한다. 게다가 기회가 주어지는 만큼 과업이 따르고,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책임이 무거워지는 법이다. - P33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진 집단은 차별을 덜 인식할 뿐만 아니라 평등을 실현하는 조치에 반대할 이유와 동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차별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국가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쳐왔지만 주류로서 자신이 가진 특권을 인식하지 못하여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진보 정치인을 종종 보는 것처럼 말이다. - P36

우리는 때로 의식적으로 사회적 편견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평소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는 사람이 정장을 갖춰 입고 구두를 신을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취업 면접을 갈 때이다..(중략)...인생에서 중요한 일일수록 그 선택은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최대한 안전한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 P75

당신은 차별이 보이는가? 구조적 차별은 우리의 감각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인식하기 어렵다. 노예제 시대에는 노예를 자연스럽게 여겼고,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는 시대에는 그것이 당연해 보였다. ...(중략)...우리는 생각이 시야에 갇힌다. 억압받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이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문제라고 생각하나다. 그래서 차별과 싸우기보다 "어쩔 수 없다"며 감수한다. 유리한 지위에 있다면 억압을 느낄 기회가 더 적고 시야는 더 제한된다.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다" "불평이 많다""특권을 누리려고 한다"며 상대에게 그 비난을 돌리곤 한다. - P79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역사적으로 억압되었던 집단이 평등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이런 현상은 반복된다. 기존의 억압을 유지하기 위한 비하성 언어와 기존의 권력에 맞서기 위해 등장한 비하성 언어가 대립하는 것이다. - P97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 P99

한 가지 교훈은 분명하다. 때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도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상처를 주는 잔인한 의미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다문화는 낙인이고 차별과 배제의 용어가 되었다. - P133

우리는 꽤 자주 누군가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 거리에서 시선을 사용한다...(중략)...거리는 모든 사람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허용된 공간이 아니다. 거리에는 살마과 행동을 규율하는 규칙과 감시체계가 있다.
즉 거리는 중립적인 공간인 듯 보이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익명의 다수가 시선으로써, 말이나 행위로써, 혹은 직접적인 방해나 법적 수단을 통해 그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온한 존재들을 단속하는 데 동참한다.
그래서 때로는 소수자가 스스로 숨어 있기로 결정한다. 소수자가 안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다. - P139

낙인을 피하기 우해 사회가 ‘정상‘ 또는 ‘주류‘로 여기는 정체성으로 보이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이를 어빙 고프먼은 ‘패싱‘이라고 부른다. - P140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는 싫다는 표현은 다르다. 사장이 어떤 직원을 싫다고 말할 때, 교사가 어떤 학생을 싫다고 말할 때, 이건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며 권력관계의 변동도 아니다. 바로 권력 그 자체이다. 무사한 차별이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하다.
그렇기에 이성애자가 하는 "동성애자가 싫다"는 말은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싫다"고 하는 말과 같지 않다...(중략)...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주체 사이의 권력관계가 그 말의 의미와 결과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 P143

2005년에는 헌법재판소가 호주제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부계혈통주의에 기반한 가족제도는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우려하던 사회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질서가 생겼을 뿐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혼인의 자유를 누리고 행복하게 되었으며 세상은 조금 더 평등하게 되었다. - P161

롤스에 따르면 시민 불복조잉란 "법이나 정부의 정책에 변혁을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이긴 하지만 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를 말한다. 단순히 법을 어긴다고 시민 불복종이 되는 것이 아니다. 대개 사람들이 법을 어길 때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남모르게 행동한다. 반면 시민 불복종은 공개적으로 위법 행동을 함으로써 대중에게 문제 상황을 알린다.
시민 불복종은 일종의 ‘말 걸기‘행위다. 매우 절실한 형태의 말걸기다. 사안의 긴급함과 중요성이 주목받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할 때, 그래서 통성적인 경로를 통해 효과적으로 의견이 전달되지 않을 때 시민 불복종이 나타난다. 합법적인 수단으로는 효과가 없고, 소수자의 의제에 다수자가 무관심하거나 변화의 의지가 없을 때, 불복종의 방식으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모으고 사안에 대해 알리는 것이다. - P166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의는 누구를 비나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은 아직 충분히 정의롭지 않고, 부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 P171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공존의 조건으로서 평등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고정된 ‘옳은‘ 삶을 규정하지 않는 이 해체의 시대가 버겁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는 인류가 지속적으로 갈구하는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왕족이나 귀족이라는 소수가 누리던 자유를 민중이라는 다수가, 그리고 다음 단계로 사회 바깥에 놓여 있던 모두가 향유하게 될 때까지 세상은 아직 더 변해야 한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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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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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젊은 나이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부모는 항상 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서른 살 때 이미 쉰 살처럼 보였다. 노동으로 인해 몸이 구부정해진 아버지는 아무 희망 없는 눈으로 식구들을 근근이 먹여 살리는 척박한 땅을 지긋이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 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P9

집은 대략 정사각형 모양이었으며, 칠을 하지 않아 맨살이 드러난 포치와 출입문 주의의 목재들은 축 늘어져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이 집은 마른 땅의 색깔을 닮아갔다. - P10

스토너는 집에서 하는 허드렛일보다 조금 덜 피곤한 허드렛일을 하듯이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 P10

그가 일하는 시간은 고용주가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만큼 늘어났다. - P17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빡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에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갈색 피부에 감탄하고, 뭉툭한 손끝에 꼭 맞게 손톱을 만들어준 그 복잡한 메커니즘에 감탄했다. - P22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그리고 이때 생전 처음으로 그는 고독을 느꼈다. 밤에 다락방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방구석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램프의 불빛이 구석의 어둠에 맞서 너울거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둠이 빛 속으로 모여들어 그가 읽던 책에 나오는 상상의 모습들을 펼쳐 보였다. 그러면 자신이 시간을 초우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의 중에 아처 슬론이 말을 걸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과거가 어둠속에서 빠져나와 한데 모이고, 죽은 자들이 그의 앞에 되살아났다. 그렇게 과걱와 망자가 현재의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오면 그는 순간적으로 아주 강렬한 환상을 보았다. - P26

그는 자신의 장래를 수많은 사건과 변화의 가능성의 흐름이라기보다 탐험가인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보았다. ...(중략)...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 P38

하지만 윌리엄은 부모에게 아무 할 말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와 그의 부모는 벌써 낯선 타인들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이런 상실감 때문에 사랑이 더 커졌음을 느꼈다. - P39

그는 가을학기가 시작되기 전 일주일 동안 강의계획을 짜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보게 마련인 가능성들을 보았다. - P40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 되네. 인류가 겪은 패배와 승리 중에는 군대와 상관없는 것도 있어. 그런 것들은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할 때 이 점을 명심하게. - P54

그에게는 지금까지 내면을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도 들엇다. 자신이 자신에게 내놓을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 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나자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 P55

전에는 죽음을 문학적 사건 또는 불완전한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조용하게 마모되어 가는 과정으로 생각했다. - P59

그는 데이브와 그랬던 것처럼 로맥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런 마음을 스스로 인정한 뒤에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은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 P133

그는 잔신이 영문학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강의실에서 전달하는 내용 사이에 커다란 큼이 있음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는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면 그 틈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가장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감정들이 강의에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생기가 넘치던 것들이 그가 하는 말 속에서 시들어버렸고, 그에게 가장 감동을 주었던 것들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처럼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각 때문에 너무 고민한 나머지 이제는 그 고민이 습관이 되어 구부정한 어깨만큼이나 그의 일부가 되었을 정도였다. - P158

하지만 그의 머리는 그가 원하는 곳으로 이끌려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수년 전부터 읽으려고 마음먹고 있던 책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그가 원하는 곳으로 이끌려 가려고 하지 않았다. 생각은 그가 들고 있는 책에서 멀어져 방황했고, 그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마치 그가 알고 있던 것들이 때로 머리에서 싹 비워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의지력이 모든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자신이 식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자신을 찔러 활기를 되찾아줄 뭔가를 갈망했다. 고통이라도 좋았다. - P251

"그렇게 걱장할 필요 없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죠. 세월이 흐르면 다 잘 풀릴 겁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이 말을 학 나자 갑자기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자기 말에 담긴 진실을 느낀 그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절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 P264

나이 마흔 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 P272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게 몇 년전이더라?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 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엇다. 하지만 지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 P353

시간이 생겨도 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걸세. 스토너가 말했다.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으니까. - P355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잔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중략)...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중략)...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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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쏟다
고만재 지음 / 마들렌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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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의 동일함은 공감의 영역을 넓힌다. - P105

스타가 달리 스타냐. 누군가 바라봐 주면 그게 스타지. - P181

남녀관계든, 이민이든, 장점은 언제든 단점이 될 수 있다. - P225

대문짝만한 큰 창을 통해 강렬한 햇살이 테이블과 의자를 바짝 말리고 있었다. 딱히 추운 날이 아니었음에도 눅진한 마음을 햇살에 말리고 싶었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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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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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을 밝혀라"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떠돌이 기사로서 신분 따위는 없었다. 사람들은 꽤나 근본을 중시했다. 원산지를 따져가며 농수산물을 사 먹듯 인간도 누구에게서 생산되었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내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나는 그냥 나다. 물론 나를 태어나게 한 생물학적 부모는 존재할 테지만, 내가 그들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서 키워지지 않았다 해서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나느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부모가 누구인지보다 휠씬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 P44

생각이 많다는 건 칭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물론 가끔은 쓸데없는 생각들이 세상을 바꾸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 P51

세상의 모든 부모는 불안정하고 불안한 존재들 아니예요? 그들도 부모 노릇이 처음이잖아요. - P111

우리가 원하는 진짜 어른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볼수 있다고 믿고, 자신들이 모르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 P112

누군가를 알아 간다는 건 그 만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 P146

가족이란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먼발치‘라는 말의 뜻은 시야에는 들어오지만 서로 대화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떨어진 거리, 라고 한다. 그게 부모와 자식 간의 마음 속 거리가 아닐까. - P160

재능은 얼마나 잘하는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절대 멈추지 않는 것, 그게 재능 같았다. - P167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이론을 알고 있다고 해서 삶이 바뀌는 건 아니라고. - P178

"생각이 많다고 해서 걱정도 많은 건 아니예요." - P195

모른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배울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으니까. 삶이란 결국 몰랐던 것을 끊임없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긴 여행 아닐까?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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