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모던 컬렉션 시리즈 6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임지연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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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장 미국다운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평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다. 사실 선입견이 좀 있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대략의 줄거리가 많이 떠돌고 있었던 터이며 그 정보만을 가지고 나의 뇌는 '뻔한 남녀간의 치정과 사랑이야기...내가 좋아하는 해피엔딩이 아닌 결말이 우울한 연애이야가'로 정보가 입력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한참전부터 읽고 싶은 소설 리스트에서 삭제되어 버렸다.

 

이렇게 유명한 고전은 내가 삭제킨다고 해서 쉽사리 삭제되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위대하신 개츠비씨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 도처에 자리하고 있어서 대출환영 김미영팀장처럼 느닷없이 내게로 다가오곤 했다. 나는 내가 졌소이다하며 개츠비씨를 만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무시하기엔 너무 위대했던 것 같다.

 

개츠비씨를 만나고 난 지금도 솔직히 그가 왜 위대한 개츠비인지 잘 모르겠다. 별로 위대한 구석이 없어보인다. 가진 것 없는 약간은 찌질한 젊은이가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아주 예쁘고 속삭이듯 유혹하는 말투를 가진 한 여자를 사랑하고 배신당하고 부자가 되어 다시 몇 년뒤 그녀앞에 큰 집을 사서 보란듯이 나타난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진달래꽃'이나 '소나기' 정도로 인정받는 작품이다. 미국청소년를 비롯 미국인이면 꼭 읽어야 하는 소설로 꼽힌다고 한다. 무엇일까? 내가 모르는 내가 느끼지 못하는 이 작품의 중요성이.

 

그냥 슬쩍 보기엔 그런 저런 사랑, 배신, 복수의 이야기같다. 별다른 특별한 것도 없어보인다. 눈에 띄는 것이라면 시대배경정도. 사실 이 소설의 배경은 미국의 암울한 시기 중 하나인 1920년대 중반이다. 1929년 대공황이 오기 바로 전인 이 시기에 금주법과 같은 국민의 뜻에 반하는 규제들이 생겨나고 폭락이 있기 전의 거품이 한창 부풀어 오른 시기였다. 사람들은 흥청망청거리고 금주법에도 불구하고 술과 유흥과 파티로 나날을 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이 시기에 신분상승을 꿈꾸는 한 젊은이가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부자가 되어 마침내 신분상승으로 이루었고 첫사랑 그녀앞에 당당히 나선 것이다. 개츠비의 이러한 신분상승을 미국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신분상승은 정당한 것도 아니었고 에버에프터(ever after)도 아니었다. 아메리칸 드림이 허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텐데 왜 이 작품이 20세기 최고의 소설 중 하나이며 가장 미국적인 소설인건지 납득이 어렵다.

 

읽기 전 계속 나를 따라다녔던 개츠비씨는 내가 그를 읽고난 이후에도 계속 나를 따라다닐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를 사랑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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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여인 세계문학의 숲 35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김규종 옮김 / 시공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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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홉은 단편소설과 희곡의 대가로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이다. 그러나 나는 이 '귀여운 여인'을 통하여서 처음으로 그의 명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팟캐스트 중에서 '일당백'이라고 일생동안 당신이 읽어야 할 백권의 책이라는 콘텐츠가 있다. 정영진, 정미녀 그리고 정박이라는 삼J가 진행하는 책 소개 관련 팟캐스트인데 거기서 안톤 체홉의 귀여운 여인과 갈매기라는 작품을 소개받았다. 먼저 귀여운 여인을 읽었다.

솔직히 귀여운 여인은 선입견이 있었다. 워낙 유명해서 이름을 옛날부터 많이 들어봤으나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귀여운 여인'이 먼저 개봉하고 내가 그 영화를 먼저 본 바람에 체홉의 소설도 그 비슷한 사랑을 찾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닐까 막연히 먼저 생각하고 가볍게 여겨 여태껏 책을 보지 않았던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책이 아니더라도 이렇듯 오만과 편견이 무서운 것이다.

 

책을 보는 내내 왜 올렌카가 귀여운 여인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요소 요소에서도 "귀여운 여자야!"라고 그녀의 남편, 그녀의 이웃들이 올렌카를 보고 감탄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책에서 올렌카는 항상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여 마치 자신이 오래전부터 그 생각을 해왔던 것 처럼 자기화한다. 그리곤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가 흡수한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대화의 소재와 주제로 삼곤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와 생각을 진심을 다해 자기화하여 밝게 때로는 우울하게 표현하는 그녀를 보며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늘 "귀여운 여자야!"라고 칭하고 귀여운 여인 올렌카라는 것이 공식화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왜? 올렌카는 귀여운 여인인가?

처음 작품을 접할때는 자신의 주관이 없고 견해가 없고 그저 남을 따라하기만 하는 줏대없는 여자로 판단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된다, 여전히) 올렌카를 보면, 지금까지 사회문제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주관이 없이 남편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는 그런 여성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은 아직 여전히 많다. 우리 여성들은 정치, 경제문제애 대해서는 교육 연예 사회 문제와 비교하여 볼 때 견해가 없는 사람이 좀 더 많은 것 같다. 따라서 올렌카는 이런 여성 혹은 성의 구분없이 사회 전반과 지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을 상징화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이 작품의 올렌카를 당시 러시아의 민중으로 치환하고 이 소설이야말로 러시아 최고의 문학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순수의 결정체이며 그래서 계몽의 대상으로 러시아 민중을 생각했고 올렌카는 이러한 러시아 민중의 잘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올렌카는 사랑하는 사람의 의견을 수용할 때 편견이 없이 그대로 수용한다. 한치의 의심과 잣대를 둘러댐이 없다. 사랑하는 이의 이야기라면, 진실로 믿고 진심으로 그들을 대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나의 편견이 여성학적 관점에서만 판단되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를 소환하면서 그의 의견을 갖다댄다는 것은, 나 또한 올렌카일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나만의 주관이 없이 톨스토이라는 권위자의 말에 솔깃하여 '아~ 그런가'하고 나를 의심하고 반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과연 사람이 온전히 자신만의 견해를 갖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얼마나 나를 단련해야 하는가. 온전한 내 의견과 외부 견해의 유입은 어떤 비율이어야 황금비율이 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내 것화해야하는 가.

책을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귀여운 여인의 정의는 무엇인지 나는 귀여운 여인인지 어떤지, 나를 자꾸 의심하게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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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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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막장 드라마가 반복되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계속 되풀이되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 현실과 비교해볼 때 그렇게 터무니없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의 고전들만 봐도 얼마나 막장적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그 작품들을 클래식이라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여기 스토리만 볼 때 막장 아침드라마이지만 클래식이라 부르는 권장도서가 있다. 바로 인생의 베일’. 주요 등장인물은 키티, 그의 남편 월터, 키티의 애인 찰스 타운센드, 워딩턴 그리고 원장 수녀님, 5명 정도가 되겠다.

      줄거리를 잠깐 요약해보자면, 키티는 많은 수입이 있는 남자와 결혼을 잘하는 것이 여자의 인생의 목표라고 굳게 믿고 있는 어머니밑에서 다행히(?) 아주 예쁘게 태어나고 자라 어머니의 교육대로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 외모와 사교를 가꾸는 여자이다. , 백치미가 탁월한 지적인 수준은 좀 떨어지는 여자이다. 이런 키티가 이런 저런 이유로 혼기를 놓쳐 초조해하고 있을 때 별 매력도 없지만 그저 착해 보이는 월터의 청혼을 승낙하여 결혼을 한다. 하지만 쫓기듯 한 결혼생활이 만족스러울 리 없다. 이런 부족함은 찰스라는 언변좋고 매력있는 부총독(직업도 그럴싸하다)과 혼외정사를 벌이는 상황으로 이끌었다. 둘의 관계가 월터에게 발각이 되고 분개한 월터는 일종의 복수심에 콜레라가 창궐하는 중국 메이탄푸로 키티를 데리고 가버린다. 메이탄푸에서 콜레라의 참상과 부모잃은 어린이의 비참한 삶, 거리의 불결함과 거지들 그리고 이 모든 어려움을 희망과 신앙으로 헌신하는 수녀들의 삶을 보면서 키티는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철없이 살아왔고 잘못된 삶을 살아왔는지 깨닫게 된다. 이런 성장하는 키티와는 다르게 월터는 그 자신은 콜레라 치료를 위해 너무나 많은 헌신을 하고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지만 정작 자신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남편의 죽음 후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키티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 욕정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 역시 후회를 하면서 영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화해하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이렇듯 간단해보이고 어쩌면 좀 뻔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서머셋 몸의 필력덕분인가. 그 속의 캐릭터들은 하나하나 영화를 보는 듯 살아 움직이고 있다. 외모만 가꾸고 좀 더 형편이 좋고 인물도 좋은 남자를 찾았던 키티. 그녀는 전혀 공부라고는 하지 않고 교양을 가꾸는 데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외모와 애교가 아니라면 대화를 이어갈 이유가 없을 여인이다. 그녀의 장점은 솔직함과 유연함일 수 있다. 그녀는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주저없이 순간 순간 솔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인의 배신과 남편의 복수, 원장 수녀의 헌신, 워딩턴의 지조를 보면서 키티는 어쨌거나 잘못을 자각하고 바로 바로 자신을 수정할 줄 알았다. 책의 초반기에는 충실하지 않고 외모와 언변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키티가 너무 멍청해보였다. 이 여자에서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내 마음을 주기는 싫었다. 그래서 책을 건성건성 넘겼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고 난관이 닥칠 때마나 키티는 인지를 제대로 하고 워딩턴에서 물어보며 무엇이 무엇이고 이유는 무엇이며 배경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수긍하고 시도하고 자신을 변화시킨다. 언제든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캐릭터이다.

      반면, 월터는 높은 학식과 지적 수준에도 불구하고 키티를 얻기 위해 자신을 숨기고 약간 멍청해보이는 역할을 연기하는 실력있는 사람이지만 그 표현방식이 너무 서툴렀다. 그랬기에 키티는 도무지 왜 월터가 그녀와 결혼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월터는 그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쌍방이 아닌 혼자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키티와 찰스와의 불륜을 알고나서도 한바탕 소동을 피운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지를 만들어 놓고 키티를 메이탄푸의 사지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메이탄푸에서 월터는 자신의 본래 성정인 희생과 헌신을 메이탄푸의 환자들에게 쏟아 붓는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나누지 않고 혼자서 다 떠안고 표현하지 못하고 아내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그러나 복수심을 연소하지 못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결국 콜레라 균을 연구하다 죽음을 맞이하지만 어쩌면 그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수도 있다는 여지를 작가는 남겨놓았다. 나는 좀 답답해 보이긴 하지만 이 월터에게 연민과 동정이 느껴졌다. 우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수많은 보통사람들과 가장 유사하기 때문은 아닐까. 말하지 못하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고 못하고 약간은 자신감도 없고 그러나 능력은 있는. 하지만 능력있음을 남에게 어필을 잘 하지 못하는. 그러기에 끝에는 월터가 지산을 툭 터놓고 키티와 해패 엔딩이기를 바랬으나 그랬다면 클래식에 끼워지지는 못했겠지. 그냥 저냥 로맨스 소설 칸에 꽂혀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솔직하고 발랄한 키티보다 약간은 우울하고 소심한 월터에게 마음이 쓰였다.

      찰스는 전형적인 잘난체하는 성공지향적인 인물이다. 외모를 위해 운동을 하고 식이조절을 하고, 본인의 능력보다는 인맥을 만드는 데 열중이며 인맥을 사용하여 능력을 과시하고 인정받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변 사람들과 사회는 찰스가 능력있고 사람좋고 친절하다고 인정한다. 키티처럼, 그 와이피 도로시처럼. 우리는 내면을 보기보다는 겉모양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데 바로 이 찰스같은 인물이 그러하다. 소설을 읽으면서는 , 얘는 이런 사람이야고 알지만 실생활에서는 교묘히 자신을 감추는데 우리가 어떻게 쉽게 파악을 하겠는가. 키티도 초반에 그저그런 사람이었을 때는 찰스가 좋은 사람인줄 알았다. 그러나 고난과 실패 끝에 키티가 인생의 배움을 실천한 후에는 찰스의 진면목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끈임없이 배우고 익히며 사고를 통해서 자신의 격을 높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워딩턴. 현명하고 현실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아내에게 지조를 지키고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 알며 또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즐기는지를 잘 아는 그런 인물이다. 키티는 워딩턴을 통해 많은 것을 알고 느끼게 된다. 워딩턴이 한 말중에 현실의 땅에 제대로 발을 딛고 있는 사람은 저와 부인(키티)뿐이에요. 원장수녀님은 하늘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고 당신 남편 월터는....암흑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이죠.”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이야말고 워딩턴이 얼마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사람과 상황을 꿰뚫고 있는 캐릭터인지는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

      뻔한 스토리에 생동감있는 캐릭터로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 서머셋 몸의 소설, 인생의 베일. 한 사람의 변화와 또 한 사람의 변화하지 않음을 글로서만 독자를 설득시키고 있는 작가의 역량이 다시금 대단하고 느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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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 99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소연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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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

 

   1928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한 말이다. 여기서 돈에 대하여 버지니아는 연간 500파운드라고 설정해놓았다. 버니지아는 500파운드의 돈이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자기만의 방이라 함은 사유할 수 있는 독립적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500파운드는 우리나라의 경우를 대비해볼 때, 1930년의 노동자 평균월급이 30원이었고 요즘 월급은 약 2백만원이라고 계산할때 약 67000배이다. 이 계산을 대입하면, 연간 500파운드라는 돈은 요즘으로 환산하면 연간 약 33.5백만원이 된다. 즉 노동자 평균급여의 중위값정도되는 금액이니 버지니아 울프는 생계 걱정없이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금액으로 이 돈을 가정한 듯 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한 강연을 이듬해 편집, 수정하여 책으로 펴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자기만의 방이다. 유럽이나 미국이나 1920년대 후반, 1930년대를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여성현실과 비교해보았을 때 하등 더 낫을 것이 없는 처지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이 책에서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여성은 제대로 된 자기의 방이 없이 공동의 거실에서 사유했으며 가사와 바느질, 육아 등으로 제대로 사유할 틈이 없었슴을 그로 하여 제대로 된 글 한줄 쓸 수가 없었슴을 여러차례 언급하고 있다. 살롯 브론테, 제인 오스틴, 메리 카마이클 등 몇몇의 여성작가를 언급할 때도(특히 살롯 브론테) 자기만의 방이 아닌 공동의 거실에서 그들은 작품을 썼으며 작품도 그에 따른 한계를 지니고 있슴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아무리 유명 작품을 써서 명성을 쌓았다하더라도 아직 여성의 지위가 사회 바닥근처에 머물러있었을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여성이 연간의 꾸준한 수입이 있어야 하며 또 오로지 자기만의 공간이 있어야 함을 역설한 것은 쉽지않았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또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여성에게 수동적 자세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남성의 여성과 함께 남성성을 여성에게는 여성과 함께 남성성을 가지고 비록 어려운 시절일지라도 보다 적극적으로 시대적 어려움을 헤치고 능동적으로 교육받아야 한다고 역설한 점은 그녀의 사고가 얼마나 선진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당시는 신분이 낮은 남성보다도 그 어느 신분이라하더라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기에 버지니아 울프는 울분과 답답함을 느끼고 강연에서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강하게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청춘'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아직까지 여성의 지위나 경제여럭이 남성들과 비교해볼때 동등해지거나 적어도 거의 따라잡았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여전히 우리는 여성이 살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급여의 차이라던지 경력단절에 대한 부분 등-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기득권의 세대로 편입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뤄진데에 대하여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시점에서는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한다고 역설해야 할 대상은 우리나라의 '청춘'들이 아닐까.

   40,50,60대가 만들어놓은 대한민국에서 이제 막 성인이 되어 자신의 노력이라는 날개를 펼쳐 비상하려고 하는 20~30대 청춘들은 기득권 세대에 의해 이미 높아져버린 진입벽 혹은 너무 멀어져버린 출발선에 다가가려는 것 하나도 너무 힘들어져 버렸다. 이들에게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수입은 커녕 연간 500파운드의 빚이라도 없으면 그저 감사하고 다행인 것이 되어버렸다. 자기만의 방은 고사하고 사유를 나눌 공동 거실조차 가지기 힘든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취업경쟁률이 그 어느 시대보다 가장 치열하고 좋은 직장을 잡기가 우주선을 띄우는 것처럼 어렵게 되었다. 결혼을 하려고 해도 집값이 너무 비싸 연애고 결혼을 대책없이 미루는 젊은이들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는 혼인률의 감소와 출산율의 감소로 자연스레 이어지는데 언론과 어른들이 요즘 젊은이들은 편하게만 살려고 결혼을 하지않고 아이를 낳지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근본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는 집값 상승의 주범(?)이자 그 오른 집값의 수혜자는 바로 이 언론과 어른들인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버지니아 울프가 남성들을 거울에 비춰 두배로 밝게히주고 크게 해주는 여성의  무지를 남성들이 불평했다고 책에서 말한 부분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우리의 언론과 어른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버지니아 울프의 표현데 따르면 기성세대의 이익을 두배로 키워주는 젊은세대라는 거울에 그들을 비춰보면서 젊은이들은 열심히 살지 않고 편하게만 살려한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비단 여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 있건 누군가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역할을 하고있는 집단이 누군인지, 그들이 과연 사회를 꾸려가는 구성원으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있는지, 즉 최소한의 수입과 최소한의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여력이 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는 2019년 대한민국에서는 우리 한참 푸르른 아들 딸들이 아닐까 하며, 그들에게 연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지게끔 노력을 할수있는 뒷받침과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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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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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한 요즘 젊은 작가의 단편 7개를 모은 소설집. 7개중 2편이 퀴어(중국산 모조비아그라....& 자이툰파스타)관련이고 다른 2편이 옴니버스처럼 엮인(패리스힐튼을 찾습니다.&부산국제영화제) 작품이다. 따옴표가 없이 대화와 서술이 섞여 어지럽니다. 핫하다니 이해하려 노력하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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