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칸토레크 같은 사람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 P17
포탄에 맞는 것도 우연이듯이 내가 살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연이다. 포탄으로부터 안전한 엄폐부에서도 나는 당할 수 있다. 그리고 엄폐물이 없는 전쟁터에서 열 시간 동안 포탄이 비 오듯 쏟아져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할 수 있다. 어떤 군인이든 온갖 우연을 통해서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리고 군인이면 모두 이런 우연을 믿고 신뢰하는것이다. - P85
우리들은 사나운 맹수로 변했다. 우리는 싸우는 게 아니라 초토화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 우리들은 인간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우리 뒤에서 철모를 쓴 채 두 손을 들고 쫓아오는데 그 순간 우리에게 무슨 생각이 있겠는가? - P95
우리는 서로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죄다 잃어버렸다. 쫓기는 우리의 시선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누가 누군지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감정이 없는 죽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속임수와 위험한 마술을 써서 달리고 또 달리며 그저 살인을 저지를 뿐이다. - P97
오늘날 우리는 여행객처럼 청춘의 풍경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실들에 의해 불타 버린 상태에 있다. 우리는 장사꾼처럼 차이점들을 알고 있고, 도살자처럼 필연성을 알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근심 없이 지낼 수 없는데도, 끔찍할 정도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고 있다. 우리가 존재하고는 있지만 과연 살고 있는 걸까? - P102
그냥 엎드리고 있으면 공포는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곰곰 생각하다가는 공포에 질려 죽고 만다. - P114
우리 가족은 그리 애정이 넘친 적이 없었다. 힘들여 일해야 하고, 걱정거리가 많은 가난한 집에는 그런 게 흔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잘 알지 못한다. 어차피 알고 있는 내용을 뻔질나게 표현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얘야>하고 말한다면 이는 다른 어느 누가 말한 것 이상으로 많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 P129
이들은 나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한다. 이들에게는 걱정, 목표, 소망이 있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그들과 똑같이 파악할 수 없다. 때때로 나는 그들 중의 한 명과 작은 음식점에 앉아, 이렇게 조용히 앉아 있는 게 나의 유일한 낙임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려고 한다. 그들은 물론 내 말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고,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단지 말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러한 것이다. 이들은 내 말에 공감하지만 늘 단지 절반밖에 공감하지 않는다. 이들의 나머지 절반은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다. 이들의 생각이 이렇게 분산되어 있으니, 아무도 온몸으로 나의 말에 공감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나 자신도 나의 의견을 그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P136
나는 아무 말 없이 이런 것들 앞에 서 있다. 마치 법정 앞에 선 피고처럼. 낙담한 채 기가 꺾여 있다. 말들, 말들, 말들, 그 말들은 나의 폐부를 찌르지 못한다. 천천히 나는 그 책들을 다시 책꽂이의 빈 곳에 꽂아 넣는다. 끝났다. 조용히 나는 방에서 나간다. - P140
오직 삶만은 죽음의 위협에 맞서 계속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삶은 우리에게 본능이라는 무기를 주기 위해 우리를 생각하는 동물로 만들었다. 명료하고 의식적인 사고를 할 때 우리를 덮치는 공포로부터 우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삶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둔탁하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고독의 심연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삶은 우리 마음속에 동료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삶은 우리가 야수처럼 모든 것에 무관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긍정적인 자세를 갖고, 밀려드는 허무의 공격에 맞설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극도로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닫혀 있는 가혹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어쩌다가 어떤 사건이 불꽃을 던져 줄 뿐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놀랍게도 무겁고도 끔찍한 동경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 P214
다들 평화와 휴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모두들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가 다시 무산된다면 이들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토록 평화에 대한 희망이 간절하다. 만약 이들의 희망을 앗아 간다면 이들은 폭발하고 말 것이다. 평화가 오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 P228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보다 앞선 한 세대가 자라고 있는데, 이들은 사실 여기 전선에서 몇 년 세월을 우리와 함께 보냈지만 이들에게는 침대와 직업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에 돌아가면 옛 직업에 복귀해서 진쟁 따위는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뒤에는 예전의 우리와 비슷한 한 세대가 자라고 있다. 우리에게 서먹서먹한 이 세대는 우리를 옆으로 밀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인간이 되었다. 하여튼 우리는 커 나가서, 몇몇은 적응해서 살아가고, 다른 몇몇은 순응해서 살아갈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 이럭저럭 세월이 흘러가고, 결국에는 우리는 파멸하고 말 것이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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