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진이네와 우리는 이웃간의 흔한 다툼 한 번 없이 지냈다. 먹을거리를 주고받기도 하고, 복도에서 마주치면 웃으며 소소한 이야기를나누기도 하면서. 그러나 이웃끼리 응당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당시의 분위기를 따른 것이지, 속으로도 서로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_ 601, 602 중 - P68
어른들은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했고, 아무것도 훔치지 말라고 했으면서, 아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한통속이었다. "너희 할아버지는 네가 딸이라고 처음엔 쳐다보지도 않으셨단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웃던 친척들의 웃음을 나는 곱씹어보았다. _ 601, 602 중 - P74
엄마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나를 바라보다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거짓말을 했어. 엄마는 늘 친구를 도와야 한다고 했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나는 슬픔 속에서도 엄마의 반응에 분노를 느꼈다. 외로움이 서린 분노였다. 나는 나중에 아줌마에게서 엄마가 로봇을 부순 것에 대한 보상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보상금은 어린 내가 상상할 수없는 액수였고, 나는 깊은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_ 601, 602 중 - P76
학위를 받았지만 윤희는 어느 때보다도 허전했다. 무언가를 이룬게 아니라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장 큰 성취를 이루었을 때조차그 순간을 즐기지도, 자신을 격려하지도 못하는 자기 모습이 익숙하고 한심했다. 그렇다고 이런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윤희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_ 지나가는 잠 중 - P85
윤희가 스물넷, 주희가 스물이던 그해 가을, 둘은 엄마와 같이 살던그 집을 나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동거가 끝나자 윤희와 주희의 관계를 이어줄 마지막 명목조차 사라졌다. 형식적으로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유대가 끊어지자 둘은 더욱 데면데면한 사이가 됐다. 엄마 기일에 만나 밥을 먹고 서로의 생일에 짧은 문자를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_ 지나가는 밤 중 - P90
세상에는 그런 자매들이 있었다.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핸드폰으로 영상통화를 하고, 같이 여행을 가기도 하고, 같이 살기도 하고, 싸웠다가도 금세 화해하는 자매들이 그렇게 평생을 친구처럼, 부부처럼, 헤어질 수 없는 사람들로 연결되어 있는 자매들이 서슴없이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매들이 _ 지나가는 밤 중 - P93
혼자를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찾게 될 때가 있잖아. 그게 잘못은 아니지. 외롭다는 게 죄는 아니지. 알면서도 왜 네가 그러고 지내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을까. 너에게서 내 모습이 보여서였나봐. 그게 너무 지긋지긋해서 그랬나봐.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그저 그 마음을 억눌렀던 것뿐이었으니까. 너랑 그렇게 헤어지고 미국에서 지낼 때 사람이 외로움 때문에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날이 있었어. 그때 처음 생각나는 사람이 주희 너였어. 윤희는 주희를 차마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침묵했다. _ 지나가는 밤 중 - P93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_ 지나가는 밤 중 - P97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_ 지나가는 밤 중 - P99
"기도가 통하는 세상이면 그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니겠지. 정말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그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간절히살기를 바란 게 아니란 말이야?" _ 지나가는 잠 중 - P100
미주는 볼 때마다 몸이 조금씩 불어나 있었다. 건강하게 살이찌는 게 아니라 어딘가 아픈 것처럼 부은 모습이었다. 나의 고향에서는 그런 살을 벌살이라 했다. 벌살이 붙은 얼굴에 다정한 눈빛만은 여전했는데, 그 여전함이 마음을 쓰리게 했다. _ 고백 중 - P188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_ 고백 중 - P195
시간이 상처를 무디게 해준다는 사람들의 말은 많은 경우 옳았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상을 알아갈수록 더 깊은상처를 주기도 했다.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진희에 대해서, 진희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 미주는 대학에 와서야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었다. 겉으론 의연한 척하면서도 여렸던 그애가 받았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미주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애가 얼마나 용기를 내어 커밍아웃을 했을지, 그때 자신과 주나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끔찍한 짓거리였는지도, 미주는 그 사건으로부터 일 년 반이 지나서야 솔직히 인정할 수 있었다. 진희가 자길 버린 게 아니라 자기가 진희를 버렸다는 사실을 미주는 그제야 참담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후회로 울어자기 마음을 위로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쏟아지는자신의 눈물이 미주는 역겨웠다. _ 고백 중 - P202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없는 슬픔을 느끼니까.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_ 고백 중 - P208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_ 고백 중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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