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사 지구의 과거를 연구하는 지질학자들 같았다. 하늘의 청, 사암의 적, 굳은 용암의 흑, 관목의 녹이 진한 색의 대비를 이루었다. 암반과 암벽의 수많은 주름들이 창망한 바다의 물비늘 또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의 기하학적 무늬처럼 느껴졌다. - P11
오래된 질문처럼 남아 있는 돌 하나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가네단 한 번도 흘러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식어가는 돌 아직 내 손에 있네_ 뜨거운 돌 중 - P77
허기로 견디던 한 시절은 가고, 이제밥그릇을 받아놓고도 식욕이 동하지 않는 시대발자국조차 남길 수 없는 자갈밭 같은 시대_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중 - P78
새가 너무 많은 것을 슬픔이라 부르고 나니새들은 자꾸 날아와 저문 하늘을 가득 채워버렸습니다이제 노 젓는 소리 들리지 않습니다_ 기러기떼 중 - P51
같은 자리로 내려앉는 법이 없는저 물결, 위에 쌓았다 허문 날들이 있었다거대한 점묘화 같은 서울,물결, 하나가 반짝이며 내게 말을 건넨다저 물결을 일으켜 또 어디로 갈 것인가_ 저 물결 하나 중 - P53
그만 지고 싶다는 생각늙고 싶다는 생각삶이 내 손을 그만 놓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_ 고통에게 중 - P66
오, 버섯이여산비탈에 구르는 낙엽으로도골짜기를 떠도는 바람으로도덮을 길 없는 우리의 몸을뿌리 없는 너의 독기로 채우는구나_ 음지의 꽃 중 - P74
그날 나는 벽보 벗기기 작업을 하는 순간만큼은 아버지에 대해서뭔가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신은 아마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블랙홀처럼 주변을 휘감아온 당신의 운명과어떤 식으로든지 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맞닥뜨려 대결하고 싶었던건지도 몰랐다. 아울러 그런 애비의 모습을 아들인 내게 단 한 번이나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튼 그 대결 끝이 아무리 참담할지라도 그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언제부턴가 모르게 삶이 자꾸 버거워질 때마다 그 백보 속의 아버지를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 P137
떨어지는 꽃잎,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아, 저기 버스가 온다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난다_ 오분간 중 - P21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그런 저녁이 있다_ 그런 저녁이 있다 중 - P27
김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이 마치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_ 연두에 울다 중 - P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