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었던 그림을 다시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까까머리시절 지도 보며 상상하던 도시들을 화판 위로 불러내는 일을하게 될 줄은 더 몰랐다. 그림과 지리와 역사와 사람이 만나『비행산수가 됐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필연이 된 셈이다. 내가 살아온 이력이기도 하다. _ 들어가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형님이 다랑쉬오름보다 아끈다랑쉬오름을 더 아꼈다고, 거대하고 반듯한 옆 오름의 직선보다 낮고 여린 이 오름의 곡선을 더 사랑했다고. _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중 - P391

제주에서는 쌀밥을 ‘곤밥‘이라고 한다. 곱다에서 ‘곤‘이 나왔다. 제주 사람은 음식을 두고, 그것도 그저 허연 쌀밥을 보고 곱다고 표현했다. 곤밥은 형용사 곱다에 관한 가장 서러운 용례다. _ 따라비오름 중 - P400

여행에서 음식은 맛보다 공간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_ 따라비오름 중 - P402

용눈이오름의 관능적인 곡선이 연상되는데, 구릉 모양인 용눈이오름과 달리 따라비오름은 풍만하다. _ 따라비오름 중 - P406

오름밭에서는 오름들이 서로의 풍경이되어주고 서로의 전망이 되어주고 서로의 배경이 되어준다. 그렇게 고만고만한 것들이, 그렇게 서로 어우러지고 섞이며 서로의 곁을 내어준다. 못난 놈은 못난 놈을 알아본다고, 나는 이 오름밭이 그렇게 좋았다. 내 제주 여행의 팔 할은 이 오름밭에서 뒹구는 일이었다. _ 손자봉, 모자봉 중 - P411

지금 당신 눈앞의 메밀밭은 처음부터 메밀밭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제주에서는 이것저것 심어봐서 안 되면 메밀이나 심는다. 그 덕분에 중산간 오름밭은 초여름마다 소금을 뿌린 것 같은 메밀꽃 피는 풍경을 연출한다. 메밀 하면 「메밀꽃 필 무렵의 고장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이 먼저 떠오르지만 제주가 메밀 생산량 전국 1위를 놓친 적은 없다. 스토리텔링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손자봉, 모자봉 중 - P416

나는 인연을 믿는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의 차이를 나는 믿는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고 했나. _ 손자봉, 모자봉 중 - P417

해발고도 300미터 언저리 중산간에도 숲이 좋은 오름이 있다. 하나 오름의 원형은 민둥산에 가깝다. 붉은 흙 드러낸 벌거숭이산이 아니라 풀이 덮인 언덕초원오름의 원래 모습이다. _ 동검은이오름 중 - P423

돌아보니 내 오름 여행은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땅을 떠도는 일이었다. 산은 신의 땅이고 들은 사람의 땅이므로, 나의 오름 여행은 그중간 어딘가에서 헤매는 일이었다. 그 애매하고 모호한 공간이 나는좋았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람이 너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좋았다. _ 동검은이오름 중 - P430

작고 낮은 화산이지만 오름에도 저마다 이름이 있다. 이 책에도 오름 마흔 개의 이름이 있다. 한라산처럼 세상을 호령하는 산이 되지는못하지만, 제주에는 368개나 되는 이름의 오름이 있다. 도시의 삶이자꾸 겉도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해서다. 하나같이 미스터 김이고 이 과장이어서다. 한라산처럼 거대한 세상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비록 누추하나 나만의 세상 하나씩은 우리도 만들면서 산다. 하여 우리의 오름 여행은 정겹고 또 눈물겹다. 고만고만한 삶이 고만고만한 또 다른 삶을 찾아가는 여정이니 편안하고 또 서러울 뿐이다. 김영갑은 사진을 찍는 건 기다리는 일이라고 했다. 당신 곁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삽시간의 황홀을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기다리는 것은 결국 남을 품는 일이다. _ 동검은이오름 중 - P434

"밀실에서 광장으로 확장되는 변곡점, 소우주인 자기 집에서 우주로나아가는 최초의 통로." _ 말미오름 중 - P271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길과 길 안쪽의 집을 연결하는 공간이올레다. 그런데 올레는 곡선이다. 구불구불한 돌담 사이로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놓여 있다. 단순한 통로라면 직선이 효율적이다. 그러나올레는 굳이 휘어지고 구부러졌다. 훨씬 불편한데도 곡선을 선택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올레의 본래 역할은 길에서 집을 감추는 것이었다. 올레는 밀실과 광장을 잇는 길이자, 밀실을 숨기는 문이었다. _ 말미오름 중 - P272

지미봉에 올라서면 발아래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인다. 그 바다에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노랗고 빨간 테왁이 점점이 떠 있다. 테왁을 발견하면 잠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일 일이다. 호오익호오익, 바닷바람을 타고 숨비소리가 먼 나라의 소식처럼 들려올 터다. 그래, 우리도살다 보니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땅끝은 서러운 사연을 품고 있다. _ 지미봉 중 - P296

제사를 드릴 때도 옥돔은 꼭 있어야 한다. 호남 제사상에는 덕자(병어 큰놈)가 오르고, 영남 제사상에는 돔베기(상어)가 오르는 것처럼 제주 제사상에는 옥돔이 오른다. 노릿하게 구워서 올린다. 제주에서는생선국도 옥돔국이고, ‘고깃국도 옥돔국이다. 제사상에 올리는 옥돔국은 보통 미역을 풀고, 식당에서 파는 옥돔국은 대체로 무를 깐다. 소금간만 해서 국물이 맑은데 찌릿할 정도로 맛이 개운하다. 해장에도 탁월하다. 옥돔을 회로도 먹는다는데, 아직 그런 호사는 누리지 못했다. _ 제지기오름 중 - P3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역선, 고립. 격리. 이는 인류 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개념이다. 인간은 감염병을 옮기는 주체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이해하기 훨씬 전부터, 심지어 그것을 하느님의 행위라고 여기기도 훨씬 전부터 이런 것을 실행해 왔다.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단계 이전부터 인간은 자신을 감염원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는 전략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_ 8장 분필로 문에 십자가 그리기 중 - P165

이러한 근대적 도시에서 감염을 막기 위한 조치는 중앙 권위체에 의해 하향식으로 취해져야 했다. 그리고 성공을 거두려면 그 권위체에는 세 가지가 필요했다. 첫째는 시기적절하게 발병 사례를 파악한 다음 감염의 이동 방향을 확정 짓는 능력, 다음은 질병이 어떻게 전파되는지 (수인성전염인지, 공기를 통한 전염인지, 곤충을 매개로 한 전염인지) 이해해서 차단 가능성이 높은 방법을 알아내는 능력, 마지막으로 주민들이 그러한 방안에 확실히 따르도록 하는 수단이었다. 9장 분필로 문에 십자가 그리기 중 - P169

1918년 스페인독감이 신고 대상이 되고 범유행병이라는 사실이 인정되자마자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라는 비상수단이 동원됐다. 최소한 그럴 여력이 있는 나라는 그렇게했다. 학교와 극장, 예배 시설이 폐쇄되었고 대중교통의 사용도 제한되었으며 대중 집회는 금지됐다. 항구와 철도역에는 격리 조치가 내려져 환자를 가려내 병원으로 보냈고, 병원에서는 이들을 일반 환자와 분리 수용하기 위해 격리병동을 따로 마련했다. 또 공공정보 캠페인을 통해 사람들에게 재채기를 할 때는 수건을 사용하고 규칙적으로 손을 씻도록 했다. 이와 함께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을 피하되 창문은 계속해서 열어 두도록 했다(세균이 덥고 습한 조건에서 증식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_ 8장 분필로 문에 십자가 그리기 중 - P1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주, 오름, 기행 - 제주를 두 번째 여행하는 당신을 위한 오름 40곳
손민호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주올레는 일상에 치이고 속도에 떠밀리는 우리네가 아무 때고 기댈 수 있는 위안의 꿈이다. _ 삼매봉, 사라봉 중 - P322

여행기자로서 나는, 역사는 책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
역사는 현장에 있었다. 제주의 역사는 당연히 제주 땅에 있었다. 그역사는 여태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역사였다. 먼저 기록을 보자. _ 수산봉, 안오름 중 - P3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레길도 꼬박꼬박 오름을 올랐다 내려왔다. 제주올레 1코스 말미오름 정상에서 내다본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우도가 눈앞에서 소처럼 누워 있었고 멀리서 아침햇살 받은 성산일출봉이 번뜩이고 있었다. 김영갑이 섬 동쪽 중산간의 오름밭을 일러주었다면 올레는 바다를마주 보고 선 오름을 가르쳐주었다. 하나 오름에 기대어 사는 제주 사람의 삶은 해안이나 내륙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들 가난했고 막막했다. 꼬닥꼬닥 제주올레를 걸으면서 오름에 얹힌 인연이 또 이렇게이어지는구나 생각했다. _ 들어가며 - P12

오름은 사람의 얼굴을 한 산이다. 잘나고 번듯한 저들이 아니라 못나고 후줄근한 우리가 비벼대고 사는 산이다. 한라산이 오롯이 우러러야 하는 신의 산이면, 한라산 자락을 따라 얼기설기 얹힌 오름은 우리네와 부대껴 땀내 흥건한 사람의 산이다. 오름은 지지리도 못난 우리네 산이다. 낮고 작아 보잘것없는 우리네 꼴이다. 산을 닮은 어느 늙은시인의 노래처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신경림, 「산에대하여 부분). _ 들어가며 - P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