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회이기에 한국은 여전히 ‘민심‘이 세상을 지배한다. 민심이란 말은 일본어에도 중국어에도 있지만, 일상적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하물며 우리처럼 정치적으로 막강한 힘을 갖는 어휘도 아니다. 한국인들이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을 이렇듯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것을 알면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은 아마도 놀랄 것이다. 그 민심은 지금도 여론조사와 군중집회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중이다. - P41
한반도 세력에게 일본제국은 약 40년간 패자였고 이후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의해 미국이 그 자리를 대신한 지 60년이되었다. 그 샌프란시스코 체제도 동요하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명청 교체기, 구한말 같은 지역 질서의 격변기가 코앞에다가와 있는 것이다. - P58
질서 있는 변혁은 자칫 구체제와 타협하거나 철저한 개혁 앞에서주춤거리기 쉽다. 이걸 돌파하는 관건은 기성 체제의 일부였던변혁 주체가 얼마만큼 자기부정과 자기혁신을 할 수 있느냐에 있다. 메이지유신은 사무라이의 신분적 자살이며, 사무라이를 배신한 사무라이 정권이었다. - P61
586세대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오랫동안 누리고 있다는 것을 칼바람 맞듯,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혁신, 자기연마해야 한다. 역사는 아직 586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586에게는 유신의 길밖에 없다. 만약 우리 사회에 정말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들이 대상이 될 것이므로, - P75
국제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강대국이 아닌 이상, 어떤 나라도 그에 주파수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섣불리 민족자주‘ 운운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길을 가지 않으면, 혹은 그 길을 찾아낼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민족자주는 공염불이다. - P79
인재는 대개 반항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 내말 잘 듣는다고 발탁한다면 뽑은 사람은 유능한 인사권자가아닐 것이며, 뽑힌 사람은 에노모토 같은 인재는 아닐 것이다. - P88
1한국의 역사는 중국처럼 수천 년간 지역의 패자로, 문명의 센터로 지내온 역사도 아니고, 일본처럼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서 지정학적 행운을 즐기며 자폐적으로 살아온 경우도 아니다. ‘고투의역사‘에 대해 적절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지적으로 이만큼 흥미를 자극하는 역사도 드물 것이다. 독특한 조건 속에서 분투해온한국사의 경험은 역사에서 지혜를 구하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교훈과 영감을 줄 것이다. - P94
반대로 한국사에 대한 자기폄하를 살펴보자. 사실 대다수한국인들의 역사 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패배주의이며, 열등 콤플렉스다. ‘위대한 상고사‘와 과도한 민족주의적 역사해석의 저변에는 이것이 자리 잡고 있다. 열패감을 지우기 위해 ‘위대한 역사‘에 환호하는 것이다. - P96
1910년 조선이 망한 것은 반일 감정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일본을 증오하고 규탄하는 사람들은 전국에 넘쳐흘렀고, 일본을 깔보고 멸시하는 사람들도 사방에 빽빽했다. 모자랐던 것은 메이지유신 이후 40여 년간 일본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게 우리의 운명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었다. - P142
서울 지하철 젊은 여성의 손에 도쿠가와 시대 역사서가 들려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아니라 나쓰메 소세키夏뿐만도 베스트셀러가 되며, 중년 남성들의 술집 대화에서 메이지유신 지도자 이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고, 학교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으로서의 이토 히로부미만이 아니라, 그런 자가 어떻게 근대 일본의 헌법과 정당정치의 아버지로평가되는지, 그 불편함과 복잡성에 대해 파헤치는 그런 한국을, 일본은 정말 두려워할 것이다. - P146
‘반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하는 반일인가‘가 중요하다. - P152
미국의힘이 엄존하고, 전후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유권자들이 있는한 불가능할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일본을 무장 해체시켰던 미국이 일본이 군사비를 배로 올린다고 해도 반기는 눈치고, 총리가 적국의 기지를 타격할 수 있다고 한 그 적국이 북한이 될 수도 있는 이 엄청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인가다. - P159
우리가 열도의 반도 관련 유적 앞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민족‘이 아니라, 거꾸로 ‘민족‘(이것이 근대에 형성된 개념과 용어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이라는 것을 모르고도 교류하고 자부심을유지하고 억척스레 땅을 갈아 훌륭한 삶을 영위한 사람들이, 또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바로 그 점이다. 우리가 영원불변의가치라고 믿는 ‘민족‘이 고대인들의 눈에는, 아마 미래에 살사람들의 눈에도 특이하게 보일 수 있다는 그 통찰 말이다. - P164
일본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을 만나 얘기해보면 한국에 대한 묘한, 그리고 복잡한 심사가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국이일본보다 한참 뒤져 있을 때에는 다정한 어조로 한국의 분발을 격려하지만 그 격차가 좁혀지거나 어느 한 분야에서라도 앞서는 조짐이 보이면 당황하면서 좀처럼 그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어하는것이다. 한국이 발전하는 것은 점잖은 지식인으로서 환영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밑에 있어야 한다는 묘한 심리가 있는 것 같다. - P176
일본 국민의 의식은 ‘천황‘ 아래 억눌려 있고, 일본의 민주주의 역시 그 이름 아래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공화국의 시민이다. 황제가 됐든, 천황이 됐든, 임금이 됐든 우리는 그 세계와 연을 끊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황‘을 쓰느냐 어떤 연호를 쓰느냐가 조선 백성에게는 중요했을지 몰라도 우리 공화국 시민에게는 아니다. - P210
천황은 역사상 오랫동안 권력은 없고 권위만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에게 권력을 갖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근대 천황제의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는 단호히 거부했다. 권력에는 성패가 있어 천황이 권력을 행사하는 순간 그 권위는 상처 입을 것이라고 권력과 권위의 분리다.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었더라면 히로히토는 아마도 패전 후에 맥아더의 처형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1억 총자숙‘ 무드는 권력은 없지만 구름 위의 신성한 권위는 패전 후에도 건재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 P221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약 400년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간과 금세기 초 식민 지배 35년간입니다. 이렇게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토착왜구의 말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다. 그것도 1998년 일본 국회에서 행한 연설에서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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