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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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들이 추앙받았다는 사실은 우리를 의아하게 한다. 따지고 보면 18세기는 계몽주의와 정치 경제, 과학 실험의 세기였지 않은가?

_ 18세기 중 - P305

신규 도로가 여행의 질을 높였다면, 수로는 화물 운송의 질을 높여주었다.

_ 18세기 중 - P312

16세기의 탐험가들과 17세기의 자연철학자들처럼, 18세기의농업 개혁가들도 자신의 발견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했다. 사실 농업 개혁가들은 자신의 발견을 뽐냈다.

_ 18세기 중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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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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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암담한 예측치들의 배경에는 기후 변화라는 근본 요인이있었다. 지난 40년 동안 역사가들은 17세기를 ‘작은 빙하기‘라고 불렀지만, 최근에서야 우리는 날씨의 영향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_ 17세기 중 - P264

기근과 질병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17세기의 역설과 더불어 이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17세기가 황금기로 불린 이유를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17세기 사람들은 분명 끔찍한 고통을 겪었지만, 훗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일이었다. 17세기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농사를 짓는 것으로는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던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떠나 도시로 이주했다.

_ 17세기 중 - P266

우리가 천문학적 발전에 관해 ‘그래서 뭐?‘라고 물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1600년 이래로 과학적 이해가 크게 진보했다는사실을 드러낸다.

_ 17세기 중 - P272

이것은 우리를 가장 난해한 문제로 인도한다. 커다란 변화는새로운 지식 그 자체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지식을 판단하는 권위를 지닌 주체가 변한 것 역시 크나큰 변화였다. 중세에는 교회 지도자들과 지역사회의 민간전승자들이 이러한 권위를 누렸지만, 16세기 중반부터는 자연철학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_ 17세기 중 - P276

그러나 17세기 중반, 과학계는 사회적 의구심을 진정시키고 새로운 균형 상태를 만들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행성이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는 존재가 아니라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태양 주위를 도는 존재라는 지식이 정설로인정되면서 비로소 미신이 줄어들었다. 왕실 인가를 받은 과학 단체들은 지난 세기 초부터 부재했던 안정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뉴턴과 다른 왕립학회회원들이 그 책을 이해했으며 자신들을 불안하게 했던 우주의 수많은 현상을 이들이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 새로이 얻은 자신감에 힘입어 사람들은 마술에 관한 경험적 증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는 결론은 심지어 자백한 마녀들조차 아무 이유 없이 화형이나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것이었다.

_ 17세기 중 - P280

그러나 이 무렵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의료전문가에게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인류의 안녕이 하느님에게서 의료 전문가의 손으로 이전된 것은 사회가 경험한 가장 심오한 혁명 가운데 하나였다. 이전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건강회복을 염원하며 성당과 예배당, 교회와 성지를 세우고, 병자들을위해 성지 순례를 떠나고, 성인들과 성유물에 기도를 드렸음을 떠올려 보면 말이다. 12 사실 의학 혁명은, 극도로 종교적이고 집단적사고를 했던 중세 유럽인들이 양심적이고 개인적인 근대 유럽인으로 변화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 가운데 하나였다.

_ 17세기 중 - P285

비록 이 시점까지는 실제로 이주한 사람 수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신대륙으로 이주한다는 생각은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다음 두 세기 동안 인구 압력이 더욱 심화되면서 유럽인 수백만 명이 신대륙으로 몰려갔고, 훗날 자신들이 떠나온사회에 필적하게 될 사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_ 17세기 중 - P292

이 모든 변화의 근원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출현이 있었다. 극동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모든 비단과 향신료를 사들이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새로이 등장한, 취향의 결정권자인 부유한 중산층이었다.

_ 17세기 중 - P296

진실은 근대 세계가 그리 쉽게 태어나지 않았다는것이다. 근대 세계는 핏덩이 갓난아기처럼 발길질하고 울부짖으며 존재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세계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법이 17세기의 가장 큰 업적으로 느껴진다면, 우리는 이 시기에 수만 명이 유럽 전역의 마녀의 집과 화형대, 교수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_ 17세기 붕 - P301

갈릴레오는 과학적 방법론을 대중화했을 뿐만 아니라 기구 제작, 기초 물리학, 시간 기록, 천문학 분야를 선도했다. 지식 분야에서 계속 권위자 행세를 하려 들던 교회에맞서 갈릴레오는 당대의, 아니 어느 시기의 누구보다도 강하게 도전했다. 자유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과학적 발견에 깊은 믿음을 표현한 갈릴레오는 일련의 과학적 사실 이상의 것을 옹호했다. 그것은 진리 그 자체였다.

_ 17세기 중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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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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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세계에서는 분쟁이 기술 진보를 가속한다는 사실이 자명하다. 각국이 서로 경쟁할 뿐만 아니라 분쟁이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세기에도 분쟁이 기술 진보에 도움이 되었을까?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쟁들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풍부한 기회를 제공했다. 화가들은 서로 경쟁하는 가문들과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프로파간다 전쟁에서 그림 실력을 발휘했다. 성벽과 교량을 건설하는 기술자들도 마찬가지로 더 큰 힘과 기술을 얻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군국화는 예술가와 과학자, 작가들을 위한 후원금을 줄였다. 폭력과 불확실성은 무역을 억제했다. 그럼으로써 육지와 해상의 적들에게 생계를 위협받는 도시와 항구의 활력도 떨어뜨렸다. 실제로 여러 도시의 규모가 작아졌다. 구텐베르크와 콜럼버스의 세기에, 결과적으로 전쟁은 어떤 면에서는 변화를 촉발시켰고 다른 면에서는 변화를 억눌렀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_ 15세기 중 - P185

지는 않았다. 흔히 그렇듯 중요한 것은 기술 혁신이 아니라 탐험에대한 정치적 의지와 돈이었으며, 이 둘은 흔히 서로 뒤엉켰다. 기술은 그저 정치적 의지와 돈이 결합해 생긴 강렬한 야망을 실현할수 있게 했을 뿐이다.

_ 15세기 중 - P186

그러나 끝없는 호기심과 매년 탐험 원정대에게 장비를 갖추어줄 정도의 재력을 동시에 갖춘, 한 고등 교육을 받은 왕자가 부에 굶주린 선원들과 만났을 때 세상이 바뀌었다.

_ 15세기 중 - P187

포르투갈 제국은 기사도와 열성적인 십자군 전쟁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항해왕자 엔히크가 사망한 1460년대에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수록 탐험대 지도자들은 후원자들을 더 쉽게 설득해 항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고, 더 야심차게 남쪽으로 항해할 수 있었다.

_ 15세기 중 - P188

지금 보면 이 모든 사건이 조금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학자들이 옳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오류를 범했고, 제노바인 선장은 야망에 완전히 사로잡혀 그 사실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결의는 굳건했다. 그는 포르투갈로 돌아왔고, 주앙 2세에게 또다시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한다. 이 무렵 콜럼버스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가는항로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심정으로 카스티야에 돌아왔다.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그의 부군 아라곤의 페르난도는 막 그라나다를 정복해 레콩키스타를 완수한 상태였다. 이 성공으로 의기양양했던 두 사람은 해지는 곳을 향해 출항한 콜럼버스가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_ 15세기 중 - P191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베리아 반도 왕국들의 해외 진출을 레콩키스타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던 셈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2세기의 십자군보다는 11세기초의 바이킹과 공통점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_ 15세기 중 - P193

1500년이 되자 유럽상인들은 후추와 계피, 실크를 포르투갈 해로를 통해 유럽까지 대량으로 운송하는 편이 베네치아가 통제하는 육로를 통해 소규모로 운송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결과로 이루어진 상선에 대한 투자는 경제력의 균형에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에 세계의 끝자락이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제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우리가 앞서 살펴봤다시피, "지배적인 자본주의 도시는 항상 무역 지대의 중심에 존재하는 법이다". 두 나라의 주요 가문과 상인들은 부유해졌다. 그리고 국제 상업에서 해상 이동이 중요해지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네덜란드의 항구가 베네치아나 제노바의 항구보다 훨씬 더 활동하기에 좋은 곳이 되었다.

_ 15세기 중 - P194

따라서 15세기의 마지막 10년에 나타난 것은 인지 혁명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기존의 지식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사고관이 갑자기 생겨나 기존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게끔 강요했으니 말이다.

_ 15세기 중 - P195

시계의 전파가 중대한 변화임을 나타내는 또 다른, 더 미묘한측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 세속화되었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시간이 교회의 지배를 받았다.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창조했기 때문이고, 시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천지창조 과정에서 사물의 움직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창조의 한 부분으로서 신성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시간에는 이렇듯 신학적 개념 말고도 더 실용적인 개념이 있었다. 시간의 주기가 1년인 것은 신성한 설계의 일환으로 여겨졌다. 하느님이 파종을 위한 시간과 수확을 위한 시간, 양 떼를 방목하는 시간 등등을 정해두었다는 것이다.

_ 15세기 중 - P199

거리와 무게, 부피 단위는 여전히 장소마다 달랐지만, 시간은 현지 관습이나 교회 당국에 우선하는, 최초의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측정 단위가 되었다.

_ 15세기 중 - P200

15세기에는 이러한 공동체적 정체성이 무너졌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과는 별개로 자기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오래된 집단적 정체성에 새로운 개인적 자존감이 겹쳐졌다.

_ 15세기 중 - P203

평범한 사람들도 출생시간과 날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점성술을 이용해 자신의 건강과 운수를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자기 인식은 사생활에 대한 더큰 욕구로 이어졌다. 이전 세기에 주택 소유자와 그 가족들은 집전체를 공유했으며, 흔히 하인들과 같은 홀에서 먹고 잤다. 이제사람들은 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손님을 위한 개인 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역사의 많은 변화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기자신을 단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 보는 시각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중대한 변화였다.

_ 15세기 중 - P205

개인주의가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 이해와 자기 존중을 얻는것이라면, 사실주의는 세상과 세상 만물의 복잡성을 설명하기 위해 학자와 예술가들이 세상 만물을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라 할수 있다.

_ 15세기 중 - P205

15세기는 서양 사람들이 추상적인 하느님의 불가사의함에 관한 집단 연구를 중단하고, 하느님을 이해하려면 천지창조를연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시기였다.

_ 15세기 중 - P210

15세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발견‘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있다. 세계와 자아의 발견 말이다. 자아 인식의 측면에서 일어난미묘한 변화는 대부분 주목받지 못했지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가시적이고 보편적인 화두였다. 1492년부터 1500년까지 불과8년 만에 유럽의 항해사들이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라는 두 개의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아시아로 가는 해로를 발견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이런 발견은 남아프리카의 절반을 탐험한 직후에 이루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니 라디오에서 탐험가들이엄청난 부가 가득한 세 개의 대륙을 발견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여러분은 이런 비교가 터무니없다고 느끼겠지만, 생각만큼 터무니없지는 않다.

_ 15세기 중 - P211

1600년경에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마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음직한 일과를 따랐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과 손을 씻고 이를 닦았다. 아침을 먹고 8시경에 학교나 직장에 갔다. 정오 무렵에는 점심을 먹고, 귀가하면 금속 칼과 숟가락으로 접시에 담긴저녁을 먹고, 불가에서 몸을 녹였다. 부드러운 베개에 머리를 괸채로 시트를 덮은 매트리스가 제대로 놓인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만약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일상생활이라면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크게 발전한 세기는 16세기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16세기에는 더 심오한 성격의 변화도 있었다.

_ 16세기 중 - P220

인쇄술은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극히 적은 비용으로 성경을 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변화를 일으킨 것은 인쇄술 그 자체가 아니라 지역어로 성경을 인쇄한 것이었다.

_ 16세기 중 - P221

지배적인 대중 매체였던 설교단과 시장에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유럽을 문맹 사회에서 벗어나게한 것은, 인쇄기와 지역어 사용, 성경의 영적 중요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결합이었다.

_ 16세기 중 - P222

그러므로 인쇄술은 여성과 지식이, 그리고 암묵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 촉매제였다.

_ 16세기 중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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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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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지가 될 수도 있는 땅이 소 떼나 양 떼를 위한 목초지로 유지되었다. 필연적인 결과로 농촌 지역에서 늘어날 수 있는 인구의 최대치는 줄어들었으며, 땅이 없는 소작농들은 생계를 꾸리고자 시장도시로 이주했다.

_ 13세기 중 - P106

13세기는 잉글랜드가 영구적으로 시장 기반 경제로 전환된 시기였다. 비슷한 도시화 과정이 유럽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_ 13세기 중 - P106

새로운 시장은 부유한 영주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회적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_ 13세기 중 - P107

북유럽에서 국제 무역을 주도한 주요 상품은 양모였다. 엄청난 양의 양모가 잉글랜드에서 브뤼허와 겐트 같은 플랑드르 도시로 들어갔다. 유럽 북부에 양모 무역망이 있었다면 남부에는 제노바와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이탈리아 북부의 무역 도시들이 있었다. 이탈리아 무역 도시들의 주요 상품은 실크와 향신료였다.

_ 13세기 중 - P109

기록물의 급증은 마땅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왔을까? 만약 1300년까지 모든수도사와 성직자가 글을 배웠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장원마다서기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잉글랜드에서만 4만 명가량의 남성이 읽고 쓰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수도원에서 글을 익혔을 테고 다른 사람들, 특히 귀족들은 개인 교사를 두었을 것이다. 귀족 계급에서는 귀족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문해력을 기르는 전통이 있었다. 피에르 아벨라르와 그 형제들이 이 전통을 보여주는 예다.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는 모든 대성당에 학교를 운영하라고 명령했으며, 1215년 인노첸시오 3세가 주재한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더 강화된 명령을 내렸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여전히 학교가 없는 대성당에 학교를 세우고 마을 아이들에게 라틴어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모든 성당에 여유 자금이 있으면 학교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사실상 모든 마을에 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 셈이었다.

_ 13세기 중 - P11

한마디로 기록을 남기는 주된 이유는 주의와 불신, 확실성에 대한 욕구였다. 사람들이 기록을 남긴 이유는 서로에게 법적 책임을 묻고자 함이었다.

_ 13세기 중 - P120

왕들은 대개 군사 행동을 벌이려 할 때특별세를 부과하려 했는데, 이때 이들 ‘평민common‘들의 대표가 왕과 직접 대면해 특별세의 조건을 협상했다. 의회는 흔히 특별세를승인하는 대가로 왕에게 새로운 법령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1297 년 에드워드 1세가 이후로는 ‘반드시‘ 의회의 동의가 있어야만 이러한 특별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한 것은 입헌 분야에서 이루어진 엄청나게 중요한 발전이었다. 이는 의회가 전쟁에 필요한 재정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국왕이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_ 13세기 중 - P125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로마를 방문해 인노첸시오 3세에게 자신이 환영으로 본 형제회frere에관해 설명했는데, 이 형제회라는 말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채로 살아가는 수도사를 뜻하는 탁발 수도사(혹은 형제 수도사, friar)라는 말이 나왔다. 큰 감명을 받은 교황은 프란치스코를 축복했다. 그렇게 프란치스코회가 탄생했다. 프란치스코회 혹은 작은 형제회Order of Friars Minor는 회색 수도사회라고도 불렸는데, 탁발 수도사들이 회색 수도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_ 13세기 중 - P127

인노첸시오 3세가 이를 승인하기 전에 선종했으므로, 후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도미니코회를 공식적으로 축복했다. 도미니코회는 설교자회나 검은 수도사회라고도 불렸다.

_ 13세기 중 - P128

이전 세기의수도회들이 지식을 만들고, 보관하고, 전파하는 연결망을 구축했다면, 탁발 수도회는 이 연결망을 예전보다 더 깊고 빠르게 사회에스며들게 했다. 탁발 수도사들은 세속적인 통치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교관이 되었다. 잘 교육받은 하느님의사자로서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탁발 수도사들은 훌륭한 행정관이자 협상가였다. 또한 이들은 훌륭한 이단심문관이기도 했다. 교황과 주교들은 점차 도미니코회에 의존하여 이단자들을 심문했으며, 심지어 1252년 이후에는 이단자들을 고문하기까지 했다.

_ 13세기 중 - P130

13세기는 여행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보편화한 세기일 뿐만아니라, 기독교 여행자들이 여태껏 고대의 전설로만 전해지던 장소에 실제로 도달한 시대였다. 1300년경 기독교 세계의 최외곽 전초 기지들은, 서쪽으로는 그린란드의 가르다르에서 동쪽으로는 중국의 베이킹까지 8,70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았다.

_ 13세기 중 - P136

인노첸시오 3세는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지위 고하를 막론한 모든 통치자와 결정권자에게 영향을 미친 마지막 교황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인노첸시오 3세는 위로는 잉글랜드의 존 왕에게 강경한 태도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왕실 결혼을 강제로무효화하고, 교령 ‘존경스러움 Venerabilem‘을 내려 마침내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아래로는 자신이 영적으로 다스리는 대중의 성향을 이해했다.

_ 13세기 중 - P140

변화에 저항하려는 굳은 결의가 결과적으로는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인노첸시오 3세가 카타리파 사태에서 수행한 역할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인노첸시오 3세는 카타리파로 대표되는 이단자들에게 강경하게 대응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패권을 유지했으나, 이는 결국 종교재판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모든이유를 근거로, 인노첸시오 3세는 대적할 자가 없는 13세기의 변화의 주체다.

_ 13세기 중 - P141

유럽 인구는 1315년에서 1319년까지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기 전에도 이미 감소하고있었다. 인구의 10퍼센트가 자연이 준 시련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추정되는데, 이는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1,000만 명 이상의 사람이굶어 죽었거나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으로 죽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3세기 동안 거의 중단되지 않고 이어진 인구 성장과 상업성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_ 14세기 중 - P146

1347년 말에는 가장 위험한 폐 페스트의 형태로, 기독교 세계의 상업 중심지인 무역 도시 베네치아와 피사, 제노바에 당도했다. 페스트가 퍼진 도시에서는 순식간에 시체 더미가 쌓여갔다. 사망률은 보통 40퍼센트를 넘었다.

_ 14세기 중 - P149

14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페스트가 맹위를 떨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_ 14세기 중 - P152

또한 흑사병은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었다. 어쩌면 여러분은 죽음이 인간의 삶에서 몇 안 되는 변치 않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죽음은 실제로는 매우 급격한변화의 대상이다. 죽음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죽음은 오직 살아 있는 자들의마음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죽음이 생명의 부재라 믿었으며, 죽음 뒤에도 다른 형태의 삶이 있다고 믿었다. 사후 세계에 관한 믿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14세기 유럽 전역은 죽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_ 14세기 중 - P155

그러나 1332년에 농노제가 여전히 사람들의 삶과 행복을 좌우했던 반면, 1400년경에는 서유럽 거의 모든 곳에서 농노제가 무너졌다.

_ 14세기 중 - P156

헨리 보몬트가 그날 사용한 전략은 현대전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적군과 백병전이 벌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지 말라. 적이 당신 머리를 부수거나 배를 찌르기 전에 먼저 쏘아라." 이 전략의 핵심은 투사 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함으로써 기관총과 같은 효과를내는 것이다. 실트론 진형을 깨뜨리는 데는 궁수 수십 명만 있으면 충분할지 모르지만, 중무장한 기병대의 돌격을 막아내려면 반드시 수천 명의 제대로 편성한 궁병대가 필요했다.

_ 14세기 중 - P161

그러나 군대를 운영할 때 근접해서 백병전을 벌이기보다는 멀리서 조직적으로 공격한다는 기본 원칙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백병전보다 원거리전을 중시하는 것은 고대 세계와 현대 세계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다.

_ 14세기 중 - P165

비록 민족주의의 음영과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14세기에는 민족적 이익이 기독교 세계의 단결이나 교황의 권한보다 명백히 더 중요해졌다. 1300년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세속적으로는자신들의 영주에게 충성을 바쳤고, 종교적으로는 주교에게, 나아가 교황에게 충성을 바쳤다. 1400년에는 상황이 더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충성심이 지역과 민족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 과세 제도, 의회 제도, 언어, 법, 관습이 모두 민족이라는 개념에 녹아들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왕에게 맞서는 동시에 자기민족에 충성을 다할 수 있었다. 실제로 14세기 잉글랜드에서는 민족적 우선순위에 따라 의회에 의해 두 왕이 폐위되었다.

_ 14세기 중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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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 우리 몸 안내서
빌 브라이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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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l)가 수거하여 지라로 보낸다. 지라는 매일 약 1,000억 개의 적혈구를 폐기한다. 분해된 적혈구는 대변을 갈색으로 만드는 주된 요소이다. (같은 과정의 부산물인 빌리루빈[bilirubin]은 소변을 노랗게 만들며, 명이 사라질 때 노랗게 변하는 것도 빌리루빈 때문이다.)

_ 심장과 피 중 - P178

데이비드 우튼은 의학의 진실(Bad Medicine: Doctors Doing Harm Since Hippocrates)에서 이렇게 썼다. "1865년까지 의학은 거의 완전히 무용지물이었고, 해를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_ 심장과 피 중 - P182

그런 한편으로 피에서 특정한 항원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특정한 질병에 대한 내성을 증진시킬 수 있다. 물론 때로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말이다. 예를 들면, O형인 사람은 말라리아에 더 내성을 띠지만, 콜레라에는 더 취약하다.

_ 심장과 피 중 - P187

당뇨병은 두 가지 유형이다. 사실은 합병증과 관리 차원에서는 비슷하지만, 병리학적으로는 전혀 다른 두 질병이다. 제1형 당뇨병은 몸이 인슐린을 아예 만들지 않아서 생긴다. 제2형 당뇨병은 인슐린이 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해서 생긴다. 대개 생산량도 줄어들고 세포가 인슐린에 정상적인 수준보다 반응을 덜하면서 나타난다. 이를 인슐린 내성이라고 한다. 제1형은 유전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제2형은 대개 생활습관의 산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제2형이 건강하지 못한 생활과 명백히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집안에서 대물림되는 경향도 보인다.

_ 몸의 화학 중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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