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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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지가 될 수도 있는 땅이 소 떼나 양 떼를 위한 목초지로 유지되었다. 필연적인 결과로 농촌 지역에서 늘어날 수 있는 인구의 최대치는 줄어들었으며, 땅이 없는 소작농들은 생계를 꾸리고자 시장도시로 이주했다.

_ 13세기 중 - P106

13세기는 잉글랜드가 영구적으로 시장 기반 경제로 전환된 시기였다. 비슷한 도시화 과정이 유럽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_ 13세기 중 - P106

새로운 시장은 부유한 영주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회적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_ 13세기 중 - P107

북유럽에서 국제 무역을 주도한 주요 상품은 양모였다. 엄청난 양의 양모가 잉글랜드에서 브뤼허와 겐트 같은 플랑드르 도시로 들어갔다. 유럽 북부에 양모 무역망이 있었다면 남부에는 제노바와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이탈리아 북부의 무역 도시들이 있었다. 이탈리아 무역 도시들의 주요 상품은 실크와 향신료였다.

_ 13세기 중 - P109

기록물의 급증은 마땅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왔을까? 만약 1300년까지 모든수도사와 성직자가 글을 배웠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장원마다서기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잉글랜드에서만 4만 명가량의 남성이 읽고 쓰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수도원에서 글을 익혔을 테고 다른 사람들, 특히 귀족들은 개인 교사를 두었을 것이다. 귀족 계급에서는 귀족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문해력을 기르는 전통이 있었다. 피에르 아벨라르와 그 형제들이 이 전통을 보여주는 예다.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는 모든 대성당에 학교를 운영하라고 명령했으며, 1215년 인노첸시오 3세가 주재한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더 강화된 명령을 내렸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여전히 학교가 없는 대성당에 학교를 세우고 마을 아이들에게 라틴어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모든 성당에 여유 자금이 있으면 학교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사실상 모든 마을에 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 셈이었다.

_ 13세기 중 - P11

한마디로 기록을 남기는 주된 이유는 주의와 불신, 확실성에 대한 욕구였다. 사람들이 기록을 남긴 이유는 서로에게 법적 책임을 묻고자 함이었다.

_ 13세기 중 - P120

왕들은 대개 군사 행동을 벌이려 할 때특별세를 부과하려 했는데, 이때 이들 ‘평민common‘들의 대표가 왕과 직접 대면해 특별세의 조건을 협상했다. 의회는 흔히 특별세를승인하는 대가로 왕에게 새로운 법령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1297 년 에드워드 1세가 이후로는 ‘반드시‘ 의회의 동의가 있어야만 이러한 특별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한 것은 입헌 분야에서 이루어진 엄청나게 중요한 발전이었다. 이는 의회가 전쟁에 필요한 재정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국왕이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_ 13세기 중 - P125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로마를 방문해 인노첸시오 3세에게 자신이 환영으로 본 형제회frere에관해 설명했는데, 이 형제회라는 말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채로 살아가는 수도사를 뜻하는 탁발 수도사(혹은 형제 수도사, friar)라는 말이 나왔다. 큰 감명을 받은 교황은 프란치스코를 축복했다. 그렇게 프란치스코회가 탄생했다. 프란치스코회 혹은 작은 형제회Order of Friars Minor는 회색 수도사회라고도 불렸는데, 탁발 수도사들이 회색 수도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_ 13세기 중 - P127

인노첸시오 3세가 이를 승인하기 전에 선종했으므로, 후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도미니코회를 공식적으로 축복했다. 도미니코회는 설교자회나 검은 수도사회라고도 불렸다.

_ 13세기 중 - P128

이전 세기의수도회들이 지식을 만들고, 보관하고, 전파하는 연결망을 구축했다면, 탁발 수도회는 이 연결망을 예전보다 더 깊고 빠르게 사회에스며들게 했다. 탁발 수도사들은 세속적인 통치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교관이 되었다. 잘 교육받은 하느님의사자로서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탁발 수도사들은 훌륭한 행정관이자 협상가였다. 또한 이들은 훌륭한 이단심문관이기도 했다. 교황과 주교들은 점차 도미니코회에 의존하여 이단자들을 심문했으며, 심지어 1252년 이후에는 이단자들을 고문하기까지 했다.

_ 13세기 중 - P130

13세기는 여행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보편화한 세기일 뿐만아니라, 기독교 여행자들이 여태껏 고대의 전설로만 전해지던 장소에 실제로 도달한 시대였다. 1300년경 기독교 세계의 최외곽 전초 기지들은, 서쪽으로는 그린란드의 가르다르에서 동쪽으로는 중국의 베이킹까지 8,70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았다.

_ 13세기 중 - P136

인노첸시오 3세는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지위 고하를 막론한 모든 통치자와 결정권자에게 영향을 미친 마지막 교황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인노첸시오 3세는 위로는 잉글랜드의 존 왕에게 강경한 태도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왕실 결혼을 강제로무효화하고, 교령 ‘존경스러움 Venerabilem‘을 내려 마침내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아래로는 자신이 영적으로 다스리는 대중의 성향을 이해했다.

_ 13세기 중 - P140

변화에 저항하려는 굳은 결의가 결과적으로는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인노첸시오 3세가 카타리파 사태에서 수행한 역할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인노첸시오 3세는 카타리파로 대표되는 이단자들에게 강경하게 대응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패권을 유지했으나, 이는 결국 종교재판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모든이유를 근거로, 인노첸시오 3세는 대적할 자가 없는 13세기의 변화의 주체다.

_ 13세기 중 - P141

유럽 인구는 1315년에서 1319년까지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기 전에도 이미 감소하고있었다. 인구의 10퍼센트가 자연이 준 시련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추정되는데, 이는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1,000만 명 이상의 사람이굶어 죽었거나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으로 죽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3세기 동안 거의 중단되지 않고 이어진 인구 성장과 상업성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_ 14세기 중 - P146

1347년 말에는 가장 위험한 폐 페스트의 형태로, 기독교 세계의 상업 중심지인 무역 도시 베네치아와 피사, 제노바에 당도했다. 페스트가 퍼진 도시에서는 순식간에 시체 더미가 쌓여갔다. 사망률은 보통 40퍼센트를 넘었다.

_ 14세기 중 - P149

14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페스트가 맹위를 떨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_ 14세기 중 - P152

또한 흑사병은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었다. 어쩌면 여러분은 죽음이 인간의 삶에서 몇 안 되는 변치 않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죽음은 실제로는 매우 급격한변화의 대상이다. 죽음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죽음은 오직 살아 있는 자들의마음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죽음이 생명의 부재라 믿었으며, 죽음 뒤에도 다른 형태의 삶이 있다고 믿었다. 사후 세계에 관한 믿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14세기 유럽 전역은 죽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_ 14세기 중 - P155

그러나 1332년에 농노제가 여전히 사람들의 삶과 행복을 좌우했던 반면, 1400년경에는 서유럽 거의 모든 곳에서 농노제가 무너졌다.

_ 14세기 중 - P156

헨리 보몬트가 그날 사용한 전략은 현대전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적군과 백병전이 벌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지 말라. 적이 당신 머리를 부수거나 배를 찌르기 전에 먼저 쏘아라." 이 전략의 핵심은 투사 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함으로써 기관총과 같은 효과를내는 것이다. 실트론 진형을 깨뜨리는 데는 궁수 수십 명만 있으면 충분할지 모르지만, 중무장한 기병대의 돌격을 막아내려면 반드시 수천 명의 제대로 편성한 궁병대가 필요했다.

_ 14세기 중 - P161

그러나 군대를 운영할 때 근접해서 백병전을 벌이기보다는 멀리서 조직적으로 공격한다는 기본 원칙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백병전보다 원거리전을 중시하는 것은 고대 세계와 현대 세계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다.

_ 14세기 중 - P165

비록 민족주의의 음영과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14세기에는 민족적 이익이 기독교 세계의 단결이나 교황의 권한보다 명백히 더 중요해졌다. 1300년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세속적으로는자신들의 영주에게 충성을 바쳤고, 종교적으로는 주교에게, 나아가 교황에게 충성을 바쳤다. 1400년에는 상황이 더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충성심이 지역과 민족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 과세 제도, 의회 제도, 언어, 법, 관습이 모두 민족이라는 개념에 녹아들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왕에게 맞서는 동시에 자기민족에 충성을 다할 수 있었다. 실제로 14세기 잉글랜드에서는 민족적 우선순위에 따라 의회에 의해 두 왕이 폐위되었다.

_ 14세기 중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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