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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울적해지고 있다. 조금씩 젖는 줄 모르고 내리는 가랑비에 어느새 온 몸이 적셔졌는가. 물에 탄 노란 잉크처럼 일순 타오르는 개나리의 개화를 미리부터 느끼는건가. 그래, 봄이 다가오는구나. 올해도 어쩔 수 없이 봄을 타겠구나. 미리부터 이렇듯 이유없이 울적하니 말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여행 dvd를 잔뜩 샀는데 유용할지 되려 더 힘들어질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그중 하나를 뜯었다. 가보고 싶은 나라 중에 모차르트의 나라, 몽골 말고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하나 더 늘었다. 이덕형 샘이 말하는 판타스마고리아, 변이형이 자꾸만 궁금해져서 견딜 수 없다.
웅장한 음악과 같이 네바강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헬리콥터를 탄 듯한 느낌으로 네바강 일대를 둘러보았다. 음악이 바뀌어 잔잔해지며 섬머가든과 마르스 광장을 보여주는데 어느 순간 음악이 귀에 꽂힌다. 잠깐만, 이게 누구의 작품이지? 차이..코프스키? 어..이 사람은 좀 웅장한 스타일이 아니었던가? 궁금병이 도져 뒤져보기를 시작했다.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음악임이 분명하다. 다양한 악기들로 연주되고 편곡되어서 유투브에 잔뜩 올려져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은 잠시 접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오래도록 들었다. 언젠가 그 도시에 두 발을 딛게 되면 이 음악이 같이 떠오르겠구나.
다시 dvd를 본다. 이번에는 섬머가든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 속으로 빨려든다. 잔잔한 선율은 나를 헬리콥터에서 내리게 했고 나는 나비처럼 조각상 위에 살짝 앉는다. 다시 팔랑거리며 날아가다 벌처럼 향기에 홀려 조각상에 돌진한다.
곁에 없어도 상상을 하면 느낄 수 있어.
그의 말이 맞는걸까. 먼 나라의 공기가 들이켜지는 느낌이다. 꿈인듯 생시인듯 몽롱한 러시아의 백야 창백한 달빛 아래, 이른 아침이지만 지는 저녁 노을인듯 헷갈리는 러시아의 아침 햇살 아래. 온통 부재로 가득한 느낌. 텅 빈 무의 충만. 판타스마고리아의 도시. 그곳.




두꺼운 창문 커튼을 젖히자 영하에서나 보았던 핀란드만의 하얀 설원이 끝없이 서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위로 오렌지색의 아침 햇빛이 빛나면서 저 먼 곳의 푸른색 하늘을 아주 더 멀리 보이게 만들고 있는데, 공기 중에 떠돌고 있는 이들은 색이라기보다 오히려 관념적인 추상에 더 가까웠다. 예를 들어, 현실과 무한 혹은 내재와 초월의 대비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 색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리라. 자줏빛 오렌지의 내재와 푸른색의 무한. 형태 없는 모든 부재의 기원. 그러나 이 낯선 곳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인상은 텅 빈 무의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 대면하고 싶은 욕구에 이 땅에 온 것이 아닌가. 이곳은 러시아의 베니스라는 별명이 붙은 바실레프스키 섬. 핀란드만을 향해 있는 프리발치스카야 호텔에서 바라보는 겨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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