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이 지나자마자 그녀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한참 정신없이 바쁜 월요일 오전 시간이었다.
"때르릉"
"예. 약국입니다."
"접니다. 저 대신 보쌈 값 좀 내주세요."
"네? 어디에 전화 거셨어요? 여기는 약국입니다."
"네. 저라니까요. 제가 보쌈을 시켜 먹었는데 자꾸 외상값 갚으라고 독촉을 해서요. 약국으로 보내줄테니 저 대신 외상값 내주세요."
"...아....저기...지금은 제가 바빠서요.."
바쁜 와중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일주일 내도록 생각했던 그녀와 나와의 미래 대화상에서 한참을 벗어난 일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밀린 손님들에 미처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직원이 받았다.
"네? 병원으로 게보린을 갖다 달라구요? 병원에 입원했다구요?"
여자는 심신미약으로 입원을 했다고 한다. 원룸 생활비도 없는 형편이니 먹을 것 나오고 재워주는 병원을 선택한 건 잘한 일인 듯도 싶다. 그렇지만 병원 약과 중복되기에 게보린은 줄 수 없다고 전했더니 아들을 보내겠다고 말을 한다. 저번에 아들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잠시 갸웃거렸다. 아..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인 모양이다. 그래도 줄 수 없다고 말을 전했고 여자가 전화를 끊었다. 10분 후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다짜고짜 택시비를 달란다. 병원에서 택시를 불러서 약국을 들르겠으니 택시비를 내놓으란다. 게보린을 줄 수 없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눈치다.
정말로 여자가 택시를 타고 왔다. 누군가에게 택시비를 꾸어서 왔다. 게보린 5 곽 값까지 들고서. 하지만 나는 여전히 줄 수 없다고 말을 했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에게는 일반약은 드리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에 퇴원하면 주겠다고 말을 했다. 여자는 혼잣말로 중얼중얼 욕을 하며 문을 열고 나갔고 근처의 다른 약국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머리 속으로 명확하게 그리진 않았지만 그녀를 도울 나름의 상이 있었다. 여자가 홀로서기를 하는데 있어 무엇이 도움이 될 지 이런저런 생각도 했다. 여자는 그러나 내 생각을 벗어났다. 나는 여자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진부하기 그지없는 메러디스의 말처럼. 그렇지만 나는 메러디스의 말이 여전히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준비됐니?"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 이 생활도 끝이야. 네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인 거다. 지금부터는 모든 게 네 책임이고, 너 자신 말고는 누구 탓도 할 수 없다는 걸 명심해라."
메러디스 콤스.
나를 보육원으로 돌려보낸 수많은 입양 가족의 선정 책임자였던 사회복지사. 그녀가 감히 내게 책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p.15
....
펠가에 접어들면서부터 메러디스는 쉴새없이 떠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기적인 이유를 열거하면 샌프란시스코를 반은 가로지를 것 같았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고 아무 의욕도 연고도 없고 사회성도 없는 나. 그녀가 내게 장래 계획을 묻고,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꾸려갈 거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p.21
바보같게도 나는 매러디스의 말과 닮은 내 생각들이 그녀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매러디스의 그녀,빅토리아가 메러디스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듯 그녀에게는 내 생각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생각하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새로 시작하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너무나 커서 섯불리 무언가를 시도하지 못한다거나, 주위의 도와주는 이들에게 보답할 정도로 꿋꿋하게 일어서는 일 자체가 부담스럽다거나, 아니면 주위의 사건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거나. 암튼 여자는, 자신의 든든한 배후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 원하는 방식과 자신이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그 생각에 대해서는 그녀를 존중하기로 했다. 그녀가 내린 결론이니까.
"일자리는?"
"무슨 일자리요?"
"일자리 구했냐고"
"구했겠어요?"
"구했어야지! 넌 일자리를 찾아서 지원하고 채용이 되어야만 해. 안그러면 6주 안에 거리에 나앉게 될 테고, 추운 밤에도 널 재워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넌 원해야만 해. 난 네가 원하는 만큼만 해줄 수 있어.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원해야 한다는 거야."
"널 거리로 내쫓는 건 나한테도 힘든 일이야. 하지만 명심해. 난 그렇게 하고 말 거니까."
그게 힘든 일이라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p.27
빅토리아는 메러디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보육원에서 겨우 나와 석달 동안만 무료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을 구해주었고, 종종 들러 근황을 살폈으며, 어쩔 땐 돈봉투까지 방문 밑으로 살짝 밀어넣고 갔어도 빅토리아는 메러디스를 믿을 수 없었다. 매번 파양당한 아픈 기억이 빅토리아를 괴롭혔으며 파양 후 늘 돌아가던 보육원 생활이 빅토리아를 불안하게 했으며, 자신만을 향하지 않는 메러디스의 눈 앞에서 빅토리아는 신뢰를 버렸다. 숱한 파양으로 인해 입양 대기자 목록에서 빅토리아를 빼자고 하는 판사의 제안을 메러디스가 묵살할 때도 빅토리아는 메러디스의 눈에서 그저 사회복지사로서의 수치심만을 읽었다. 어렸을 적부터 빅토리아를 봐오던 메러디스에게 어느 정도의 정이 있는지는 메러디스만이 알 일이다. 상대방은 그저 자신이 느끼는 대로 느낄 뿐이다. 빅토리아가 메러디스에게서 그런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 자체로 사실인 것이다.
나는 빅토리아의 '그게 힘든 일이라는 말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라는 생각이 이해가 간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입 밖으로 나오는 말 이외의 것들 또한 많은 역할을 한다. 오랜간 메러디스와 빅토리아의 관계에서 빅토리아는 메러디스에 대한 평가를 했을 것이다. 물론 잠시의 만남에서도 말 이외의 것들은 상당한 역할을 한다. 흔들리는 눈빛, 말들 사이의 쉬어가기, 무의식적인 손동작, 그리고.. 온 몸으로 느껴지는 마음의 흐름.
빅토리아의 믿지 못하는 마음을 읽을 때 나는 약국에서의 그녀의 눈물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어터진 손이 떠올랐다. 빈 원룸에서 그녀가 그동안 혼자 무얼 했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도와줄 때가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도움주기와 받기는 서로 맞지 않을 경우 메러디스와 빅토리아처럼 어긋나버린다. 소설의 주인공은 메러디스가 당연히 아니며 메러디스는 어쩌면 주인공의 미래의 방해인물일 수도 있다. 물론 의도치는 않았지만 말이다. 직업으로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이든 나처럼 닥친 상황에서 순간적인 판단으로 누구를 도우게 되든지간에 결론은 그 사람이 잘 되는 일일 것이다. 타인이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일은 그러나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그녀는 조만간 또 내방할 것이다. 그때 또 어떨 일이 생길까. 나는 또 어떻게 행동을 할까.
소설에서 빅토리아가 두려운 마음을 떨치고 생계를 위해, 혹은 미래의 꿈을 위해 첫 발을 내디디듯 그녀 역시 무언가를 위해 첫 발을 내디디는 순간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그녀에게는 어떤 꽃이 어울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