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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 이 책을 펼친 당신을 부릅니다. 독자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신이라고 나는 당신을 불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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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이게 소설 맞아? 책 읽는 나를 당신이라고 부른다고? 어머, 웬일이야. 이런 듣기 좋은 말을 해주다니. 하하. 소설을 끌고가는 주인공이 소설 밖으로 살짜쿵 걸어나와선 나에게 윙크를 하는 느낌이다. 이런 자유로운 소설이라니. 시작부터 느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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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한 글자 한 글자로 바뀌어 나오고 있는 나의 지금 이 순간을 당신의 지금 이 순간에 되살려놓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을 통과하자마자 죽을 수밖에 없는, 죽고 죽고 또 죽는 말들. 우리는 이 말들의 죽음, 그리고 부활 속에서 지금 만나 시시각각 지금 합해지고 있어요. 사람이 쓰는 말, 아니 글자가 된 말이란 실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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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대박! 어쩜 내 생각과 그리 꼭같아요? 아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당신의 소설을 통해서 마악 알게 된 거겠지요. 난 종종 말이란 것에, 글이란 것에 대해 감탄한답니다. 내 속에 있을 때는 아무 것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무형물일 뿐인데 내 밖으로 나온 말(이나 글)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더라구요. 나도 물론 타인의 말과 글에 영향을 받구요. 특히나 작가의 소설이나 시를 읽을 때는 더욱 그러해요. 분명 허구로 지어내어 작가가 생명력을 부여한 소산물임을 앎에도 나는 소설 속 등장인물에 몰입해 같이 울고 같이 웃어요. 아..청춘사업은 잘 나가면 질투나구요..ㅎㅎ 그래서 소설 속 경태씨의 연애가 삐걱거릴때 좋아했다지요. 하하하 ^^; 소설 속 경태씨와 연경씨는 내가 소설책을 펴서 한 글자 한 글자 읽는 속도에 따라서 연애를 시작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싸우고, 속으로 욕도 하고, 화해도 하기도 하지요. 그들은 나의 눈빛을 받고서야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지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애초에 작가 김곰치의 마음 속에서 탄생했기에 내가 그들에게 눈을 맞추는 그 순간, 작가 김곰치가 그들을 만들었던 그 순간은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오고 나의 그 순간과 시시각각 합해지지요.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의 뒤안길에 작가의 그림자를 느끼는건 아마 이런 이유겠지요. 이것이 바로 작가와 독자의 시공을 뛰어넘는 교감일까요?
종이 위의 점과 선, 즉 무심한 물질적 존재로 있던 것들이, 내가 눈길을 주어 읽는 순간, 손에 잡히는 실체라곤 없지만 저 홀로 빛을 내는 것처럼 '의미'라는 것이 스멀스멀, 와글와글 발생해버리는 것입니다. '문자'는, 읽으면, 그래요. 물질 상태로 있던 것이 의미라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 변전이 됩니다. 한마디로 살아버려요. 구약전서 창세기의 상당히 멋스런 구절처럼, 흙을 이겨 형체를 만들고 숨을 불어 생명이 있도록 하였다는 하느님의 행위와 우리의 '읽기'가 비슷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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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길을 받을 때만 살아 있고, 생명의 눈이 쏘는 빛을 벗는 순간, 죽어요. 문자는 참으로 예민한 것들이 아닌가요.
김곰치의 소설 <빛>을 읽는 내내 허수경의 <모래도시를 찾아서>가 겹쳤다. 독일에 터전을 잡고 바빌론으로, 시리아로, 이제는 퇴적층으로만 존재하는 옛 도시로 발굴을 떠나는 허수경에게는 모어인 한국어와 거주지의 언어인 독일어, 그리고 발굴하는 옛 도시의 언어가 제각각의 빛으로 다가온다. 2000년 전의 언어가 적힌 점토판을 발굴해서 들여다봤을 때, 언어의 시체와 같던 점토판에 눈길을 주었을 때, 허수경은 점토판의 단어들이 살아서 옛 영광의 기억과 함께 자기에게 오는 듯한 공시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느낌은 허수경의 에세이를 읽는 나에게도 조금은 전달되는 듯했다.
시리아의 사무마라는 작은 마을의 발굴현장에서 허수경이 무척 아팠다. 열이 올랐고 50도가 웃도는 더위에도 그녀는 추웠다. 일주일이나 항생제를 먹고나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왠일인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국말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이 저 혼자 뿐인 곳에서 누군가 외국어로 말을 건넨다. 그녀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을 뿐이다. 모어가 아닌 말로 대꾸하기 위해, 말과 몸이 한부분인 양 자연스레 나오지 않고, 말이 머리에서 나와 몸 바깥으로 나가 타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타인의 몸 바깥으로 나와야 하는 그 복잡한 과정을 아픈 몸이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길을 받을 때만 살아 있는 문자처럼, 사람의 가슴으로 들어갈 때만 살 수 있는 말을 아픈 몸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순간 허수경에게 외국인 동료의 건네는 말은 귀로는 들리나 가슴으로는 들어오지 않는, 살아 있지 않은 존재이지 않았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에세이를 보면서, 그들의 글투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그들과 일면도 없는 나이지만 그들이 점점 가깝게 느껴지는 건 바로 문자의, 언어의 이런 '생명력' 때문일까. 그들과 같은 언어를 쓴다는게 왠지 다행이다, 싶다. 나는 자주, 김곰치, 허수경, 그들의 책을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언어에 빛을 쬐여 부활시켜, 그 '생명력'을 같이 공유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