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8시 40분.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마감준비를 하고 있는데 때르릉 전화가 울린다. 며칠 전에 들르신 김씨아줌마다. 전화 목소리에 병력과 약력이 기억났으며 몇 일 전 대화내용이 생각났다.
김씨아줌마는 1년 쯤 전에 갑상선약인 안티로이드를 6알로 시작하셨다. 시간이 흐르면서 4알로, 다시 3알로 줄이는데 성공하셔서 조금 있으면 더 줄어들겠거니 지켜보고 있던 아줌마였다. 가끔 하는 큰 검사는 도시에서 하고, 매달 타서 드시는 약은 동네 단골내과에서 처방 받아 드셨는데 얼마전 검사를 하러 서울을 가셨더랬다. 한 달 쯤 전에 서울에서 받은 갑상선 검사 결과가 나왔고 약을 끊으라는 처방을 받았다. 갑상선약은 서서히 줄이는게 원칙인데 갑자기 끊는다시길래 둘이서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고 며칠 전에 약을 타러 오셨을 때야 그간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이 갑상선약을 끊고 조금씩 몸이 이상해졌는데 원인을 알 수 없이 비실거려서 큰 병이 생겼나 싶어 무척 걱정을 했더란다. 결국 단골내과에서 검사를 새로 했고 수치가 높게 나와 다시 약을 드셨단다. 약을 드시자마자 그 증상이 씻은듯이 나았다면서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신다. 서울 큰병원에서 도대체 어떤 수치가 나왔기에 약을 끊으라고 했는지 연유를 알 길은 없으나 다시 약을 복용하면서 증상이 호전된 것만으로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3알까지 줄인 그간의 시간과 노고는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다시 6알로 새로 시작해야했다. 어쩔 수 없다며 아줌마를 다독거렸고 약을 드렸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그런데,
대뜸 약이 없다고 하신다. 약 타가신지 좀 되셨는데 그럼 그동안은 뭐 드셨어요? 남은 약이 조금 있었지. 어제까지 남은 약 다 먹고 빈 통은 버렸고, 오늘 이제 약 먹으려고 하니 없더라구. 약을 빠뜨렸나봐?
"어머. 제가 약 드린 기억이 분명히 나는데요. 심바스트CR은 약뚜껑이 파란색이잖아요. 헷갈리신다고 하셔서 보시는 앞에서 뚜껑에 제가 저녁 1알이라고 써드리기까지 했는데요. 한번 더 잘 찾아보세요."
"몰라. 기억이 안 나. 나는 갑상선약 두 통 받은 거 말고는 기억이 안 나."
"네. 그러니까요. 갑상선약 두 통 보여드리고 봉지에 넣으면서 심바스트,고지혈증약에 글 써드렸고 다른 혈압약이랑도 같이 확인시켜드렸잖아요."
"몰라. 기억이 안 나. 나는 약을 먹어야는데. 나는 약을 받은 기억이 전혀 없어."
"그럼 어떡하죠? 음..일단 약을 드셔야되니 내일 병원에 다시 가시구요. 분실약을 재처방 받게 되면 비급여로 타야 되서 돈이 비싸지긴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새로 처방전을 받아오셔요."
"아니. 나는 약을 안 받았다니까."
"어머니. 저희는 약을 드렸구요. 드린 후 새로 약주문이 들어갔는데 지금 약통 갯수를 세어봐도 주문량 갯수밖에 없어요. 약 드린게 맞아요. 제가 저녁 1알 이라고 글을 쓰는걸 어머니가 보셨잖아요."
"글쎄. 나는 기억이 안 난다니까."
김씨아줌마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찜찜하게 통화를 끊었다. 머리에 스팀이 들어오는데 조카가 운동 가자고 대기하고 있다. 시계를 보니 퇴근시간이 다 되었다. '그래, 운동이나 가자' 가게 문을 닫고 쌔콤을 켜고 강변으로 걸어간다. 양 손에 짐을 하나도 들지 않았는데도 발이 천근만근이다. 강가에 도착해 계단을 내려가 강둑 한 켠에 깔린 운동길에 발을 디딘다. 무거운 머리와 축처진 몸상태와는 달리 발은 산책의 즐거움을 알아차린다. 갑자기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스치듯 사람들과 지나치면서 '운동 잘 하세요' 속으로 인사를 한다. 저 멀리 있던 징검다리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다. 징검다리 사이로 졸졸 물소리가 새어나온다. 징검다리를 지나치니 낙차가 생기는 미니 둑이 보인다. 미니 둑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귀를 쾌적하게 적시고 흘러내려 내 마음의 답답함을 씻어버린다. 하아! 조금 개운해진다.
' 내일 김씨아줌마에게 전화를 드려서 처방전을 새로 끊어오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약값을 반반 부담하자고 이야기해야지. 나는 약을 드린 모든 상황이 다 기억나지만, 아줌마는 기억이 안 나신다니 어쩔 수 없지. 아줌마가 약을 길바닥에 흘렸건 집에서 못 찾고있건 중요한건 약을 먹어야 되는 것이니 둘다 조금씩 양보를 해서 반씩 부담하면 되겠지.'
이제 산길로 접어든다. 한쪽은 여전히 강물이 흐르나, 반대쪽 너머엔 야트막한 산이 보이고 그 사이에 논과 밭이 바닥에 깔려있다. 물이 가득 차있는 논에선 개구리가 소풍나온 아이들마냥 시끄럽다. 개구리 합창에 신이 난 조카는 개구리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재잘재잘 시끄럽던 개구리가 잠시 숨돌리려 한 박자 쉬는 타임에 조카는 박자를 놓치고 헛바람을 삼킨다. 한참을 조카와 개구리의 합창을 듣고있노라니 어지럽던 머리속 실타래들이 돌돌 뭉쳐져서 멀리 던져지는 느낌이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출발한 지 40분이 지났다. 산에서 졸졸 내려오는 물에 대롱을 달아놓은 약수터로 먼저 간다. 물맛이 좋다. 이제 스트레칭을 해본다. 헛둘 헛둘. 목도 돌리고 허리도 돌리고 앉았다 일어섰다 해본다. 휴우! 아까보다 조금 더 개운해진다.
'내일 어머니에게 전화를 넣어서 처방전만 일단 다시 끊어오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뭐, 약값은 내가 부담해야지. 엄마같으신 분인데 저리 약 받은 기억이 없다시는데 어린 내가 바득바득 우길수도 없고, 그냥 내가 약값 부담하고, 3만원어치 덜 먹고 다이어트나 하자.'
결론을 내리고나니 이제 답답한 마음이 풀어진다. 원칙대로 하고픈 내 마음의 단단함을 겨우 조금 깨뜨린 것 같다. 삶이란게 살다보면 원칙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다. 그럴 때 내 주장만 내세우다보면, 결국 일은 일대로 엉클어지고 내 마음도 같이 상하고 다친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내가 틀렸을 수도 있고, 또 내가 맞다한들 어른을 이겨먹어서 뭐하겠나. 중요한건 환자가 약을 먹어야한다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이 상쾌하다. 땡기던 뒷목도 풀렸다. 개구리 소리가 산허리에 안개처럼 내려앉는다.
다음날 아침부터 전화를 넣었지만 부재중인지 오후 늦게서야 통화가 되었다.
"아, 약~ 그거 있더라. 내가 빈 통인줄 알고 쓰레기통에 버렸던 거 있잖아? 그게 알고보니 온통이더라구. 흔들어도 알약 소리가 안 나길래 빈 통인 줄 알았더니, 약이 꽉 차서 소리가 안 났나봐. 그래서 내가 약을 어제 먹었어. 이제 걱정하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