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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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던 여자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남자는 불운 한복판에 있었다. 어머니를 여의고 의지했던 아버지마저 사고로 숨졌다. 사람에게 속고 한장 한장 쌓아올린 집은 불에 타 없어졌다. 일자리를 잃고 사회와 단절되었기에 지역 공동체의  마을회장 따위 직함에 연연할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딱히 친구라 부를만한 사람이 없고 -아주 없지는 않았었지만- 반려동물도 없다.

 

 

 

 

그는 혼자다. 그는 59세이고 사브를 몬다. 그것도 수동미션이다. 수동미션은 브레이크와 가속페달 사이에 클러치라 불리는 페달이 하나 더 놓인, 멈출 때 1단 기어를 넣어줘야만 하는 차다. 언덕에서 멈췄다 재출발할 때 클러치를 부드럽게 다뤄주지 않으면 바로 시동이 픽, 하고 꺼져버리는 그런 차다.

수동미션 차량을 우리는 흔히 '스틱 차량'이라 부른다. 인풋 만큼 아웃풋이 나오는 정직한 미션이다. 급발진 따위는 오토미션에나 존재한다. 오베라는 남자는 오토미션이나 주차 센서, 전자장비 따위의 옵션을 보유한 차를 쓰레기로 여긴다. BMW나 일제 차량, 현대 차도 오베에게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1단 기어를 넣으면 1단 만큼, 2단 기어를 넣으면 2단 만큼, 후진 기어를 넣으면 뒤로 굴러가는, 행한만큼 갚아주는 정직한 기계를 오베는 신뢰한다. 하지만 오베가 만난 사람들은 수동미션처럼 정직하지 못했다. 믿음과 신뢰를 주었으나 배신과 멀어짐으로 갚았다. 1단 기어를 넣었는데 후진하는 꼴이다. 뒤쪽은 벼랑이다. 오베는 차라리 기계를 사랑하기로 한다.

 

 

 

 

오베는 하루라도 빨리 먼저 간 아내 곁으로 가고 싶다. 일없는 실직자지만 매일 죽느라 바쁘다. 쓰레기 같은 차를 모는 이웃들, 컨펌도 안 했는데 일상에 끼어든 멍청한 것들 때문에 죽는 일정이 자꾸 지연되는 게 짜증날 뿐이다. 오베는 단색의 사람이었고, 오직 그녀 -평생을 다해 사랑한 아내- 만이 무지개였다. 색맹 같던 오베에게 사랑하는 아내만이 컬러의 세계였다. 오베는 먼저 자신을 떠난 그녀 곁으로 가고자 꾸준하고 성실하게 노력한다. 다만 죽는 건 빌어먹게 어렵다. 고양이 따위가 집 근처에서 얼쩡대다가 눈에 파묻히는 바람에 녹여주고 씻겨주고 먹여주느라 오늘도 실패하고, 내일은 임신한 이웃집 여자 -클러치가 뭔지도 모르는- 따위를 병원에 데려다 주느라 못 죽는 식이다. 사는 것도 빌어먹게 힘든데 죽는 건 더 빌어먹게 어렵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위트와 유머로 채워진다. 깔깔깔, 또는 아랫배를 움켜쥐게 되는 폭소보다는 킥킥, 풋, 따위의 위트가 가득하다. 이야기는 1++ 등급인데, 붉은 빛 살을 채운 마블링은 '웃긴 소설'로 치부하기에는 폭발적인 웃음기가 1g쯤 모자라고, 오히려 오베라는 남자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촘촘하게 짜인 게 맞다. 킥킥대다 불현듯 먹먹해지고, 이 아저씨 좀 웃기네, 하다가 눈물 또르르 구르거나 먹빛의 단색이 갑자기 무지갯빛으로 아롱져 보이는 신기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는 쪽이 이 책을 맛본 시식평이겠다. 무엇보다 붉은 살, 인생과 우정과 사랑의 '살 맛'이 나서 '살 맛 나게 만드는' 이야기다. 죽을 맛이 아닌 살 맛. 그토록 죽고자 했던 오베임에도 '살 맛 난다' 싶게 만드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동이 이 책이 지닌 핵심이다.

 

 

 

수많은 소설가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어려워하는 소설의 첫 문장. 오베라는 남자의 첫 문장은 이렇다.

'오베는 59세다. 그는 사브를 몬다.'

첫 문장부터 '사브'라는 차가 튀어나온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사브'는 줄기차게 등장한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사브는 독보적인 주행성능을 인정받던 차였다. 현대의 포니엑셀 신차 발표가 1985년이었는데, 80년대 후반 터보차저를 탑재한 사브는 미래사회에서 튀어나온듯 시속 200km 정도는 우습게 넘겼다. 독보적인 강함으로 사브는 매니아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차였다. 비록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해 회사는 사라졌고 사브의 성능은 전설처럼 남았지만 여전히 사브를 무기로 한 노병은 죽지 않았다.

 

 

 

소설의 시작이자 끝인 첫 문장부터 등장한 사브는 '오베'라는 남자의 분신과도 같다. 어쩌면 급격히 변한 현실사회를 '가상현실'보다 더 낯설어하는 오베에게 사브는 아바타일지도 모른다. '소싯적' 폭발적인 주행 성능으로 시대를 풍미했으나 회사는 도산하고 차량은 단종된, 이제는 '전설'로 구전되는 사브의 현실은 '잘 나가던' 젊은 시절을 어딘가쯤 두고 내린 59세 독거노인 오베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오베는 인풋과 아웃풋이 정확한 수동미션을 탑재한 사브를, 쓰레기같은 BMW나 끌고 다니는 어린 것들은 절대 모를 '사브'라는 그 이름을 부르고 아끼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증명하는지도 모른다.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차를 자신과 동일시하지만, 스토리의 중심에 선 차는 더욱더 주인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영화 '매드맥스'의 거칠고 쓸쓸한 맥스​와 그의 차는 닮았고, '존 윅'의 클래식한 머슬카와 존 윅이 닮았다. 오베의 사브는 온전한 '남자 상'을 각인시킨 아버지의 유산인 동시에 세상이라는 적과 맞서 싸우며 함께 전장을 누비던 애마이자 천리마이다. 왜 남자들이 생명도 없는 기계인 차 따위에 애정을 쏟아 붓는지 여자들은 절대 이해 못하겠지만, 남자들은 아마도 알 것이다. 차에게도 생명이 있다고. 차의 가슴인 보닛 위에 손을 얹으면 심장인 엔진의 온기와 박동이 느껴지지 않느냐고, 차의 울음 소리가 아픈지 떨린지 벅찬지 말하고 있지 않냐고 물을 것이다.

 
 

 

 

남자들은 자동차는 알지만 여자는 모른다. 여자들은 남자를 모르지만 사랑은 안다.

오베는 기계와 자동차는 알고 '여자'인 아내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무지갯빛 아내를 통해 사랑을 알고 색깔에 눈을 떴다.

오베의 아버지와 오베의 장인어른, 오베까지, 남자들은 모두 일찍 상처하고 죽기까지 혼자였다. 마치 사브같던 그들은 쓸쓸히 자기의 길을 달렸다. 지구의 반을 채운 남자들은 그렇게 단순한 흑백으로 죽을 때까지 달리기만 한다. 지구의 반을 채운 반푼이같은 남자들을 완성시키는 건 지구의 나머지 반인 여자이자 남자 없이도 반쪽이 아닌 하나인 여자들이다.

책은 남자인 오베 위주로 말하지만 오베 너머에는 총천연색 아우라로 빛나는 여자들이 있다. 세상에 없는 여자들이 세상에서 의지할 데 없이 떠다니듯 살아가는 남자들의 발을 끌어내려 땅에 붙이고, 비로소 남자를 남자로 완성시킨다. 오베는 아내 때문에 자살을 꿈꾸지만 허공에 뜰 뻔한 오베의 발을 지상에 단단히 묶어두는 건 하늘에 먼저 간 아내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주변 몇몇이 나의 소개로 '오베라는 남자'를 읽곤 터울지는 언니나 오라버니를 떠올렸다고 한다. 오베 같은 사람이 주변에 많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어렵다. 특히나 무척 오랫동안 틀린 채로 살아왔을 때는._<오베라는 남자>중

 

 

꿀벌은 삶에서 단 한 번의 결정적 순간에만 침을 쏠 수가 있다. 침을 적의 몸에 박는 순간, 독침과 함께 내장이 온통 딸려나오기 때문에 공격은 곧 마지막이다. 나이가 들고 혼자되면서,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 정치관 등을 꿀벌의 독침처럼 여긴다. 그것을 쏘는 순간 삶을 채운 모든 것이 온통 딸려나와 빈 껍데기로 추락할 것처럼 느낀다.

 

오베 역시 처음엔 툴툴거리고 신경질적인 오지랖 넓은 아저씨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웃과 쓸데없는 여자들 때문에 자신이 꿀벌이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 자신은 침을 쏘고 또 쏘아도 죽지 않는 말벌이며, 아직 잃지 않은 이 독침을 사랑하는 친구와 이웃을 지키기 위해 매운 맛으로 날려줘야 함을 알게 된다. 아니, 본인은 몰랐지만 어느새 그렇게 변해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살기 위해 날린 독침이 결국 죽음인 꿀벌처럼 오베는 매일 죽을 궁리에 바빴지만, 이웃과 남을 위해 아무리 독침을 날려대도 결코 죽지 않고 생명력이 배가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내가 생전에 봤다면 기뻐했을만한 경험을.

 

 

 

역시 운전은 스틱 차량으로 시작했다. 정확한 기계덩어리였다. 주행거리 표시기가 액정의 전자화면이 아니라 악력기의 딸칵딸칵 넘어가는 숫자표시마냥 한 줄 한 줄 올라가는 순수한 기계덩어리였다. 이십이만이천이백이십이 킬로미터를 주행했을 때 기념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한눈 판 사이 6km를 넘겨버렸다.

 

마냥 달리는 게 전부인 줄 아는 시절이었다. 마음이 아프고 답답할 때는 가로등도 없고 직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편1차선의 시골길을 '이러다 잘못하면 죽겠구나' 싶은 속도로 내달렸다. 밤의 시골길에서 바람을 가르며 가끔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더 가끔은 울기도 했다. 세상은 온통 먹빛이고 나도 먹빛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내 곁에 무지갯빛이 있었다. 남자인 나를 완성시킨 것은, 온 우주가 뒤집어져도 나를 사랑해줄 여자는 단 두 명, 어머니와 아내였다. 내가 박아놓았던 못을 내 손으로 뽑기 시작했다. 아직 못다 뽑은 못이나 말뚝 따위가 두 여자의 마음 어딘가에 지뢰처럼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닮은 아이는 크면서 아빠를 더 따랐고, 퇴근하고 돌아온 내 뒤를 오리새끼가 지 어미 뒤 따르듯 졸졸졸 따라온다. 가방을 내려놓을 땐 서재로 따라들어오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 문 앞에 서있는다. 아빠 똥방귀 뀔 거라고, 문 앞에 앉아있지 말라고 하면 새끼오리 모이 받아먹듯 넙죽 "네"라 대답해놓고 벽 뒤에 숨어있다가 아빠 나오면 따라붙곤 한다.

 

 

 

오베도 처음엔 자신이 흑백인 줄 알았다. 아내만 무지갯빛인 줄 알았다.

시끄럽고 도움 안되는 이상한 것, 클러치도 모르는 여자의 딸이 오베를 그린 그림에서, 어느새 오베는 색깔을 지닌 사람이 되어있었다.

 

 

“걔가 보기엔 당신이 제일 재미있는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맨날 당신을 컬러로 그리는 거고요.”

"이제 충분해요, 사랑하는 오베." 그러자 충분해졌다. _<오베라는 남자> 중

 

 

책을 읽으며 아이와 아내를 떠올렸다. 여전히 술 취하면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되고, 똑같이 약주를 드셔야만 내 고백을 받아주시는 시골의 아버지가 떠오르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어디쯤에선가 울었는데 어디였는지 모르겠다. 한번쯤 울고 고장난 엔진마냥 자주 울컥했다.

 

당신이 지구의 반을 채운 성별 중 하나라면, 아니면 아직 절반밖에 차오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의 아들이거나 사랑받는 딸이거나 어떤 남자를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여자라면, 오베를 만나길 권한다. 헤매지 않게 인적사항 일러두겠다.

 

59세, 스웨덴 거주, 수동 미션 사브 소유.

집 있음. 아내 있음(지금 곁에 없다 뿐이지)

행복 있음. 감동 있음.

 

 

그녀의 여자 친구 중 하나가 왜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소냐는 대부분의 남자는 지옥 같은 불길에서 달아난다고, 하지만 오베 같은 남자는 그 안으로 뛰어든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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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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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 312 = 724. 간단한 산수. 두 권이다. 1권이 412쪽, 2권이 312쪽이다. 판권이며 뭐며 다 날려버리고 순수한 소설의 텍스트만 헤아려도 700쪽에 육박하는 작품이다. 게다가 1권과 2권의 쪽수 차이는 정확하게 100쪽이다. 이왕이면 보기 좋고 사이 좋게 반반 갈랐을 법도 한데, 얇은 책 한 권이 1권에 더 붙어있는 분량이다. 책을 보니 한숨 나온다.


'요즘 누가 소설을 읽는다고. 두 권씩이나.'

 

 

그러나 읽는다. 영문학의 대가로 우뚝 선 줄리언 반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양반 책은 독해력이 필요하다. '요즘 누가 소설을 읽는다고!'에 1+1으로 '독해력'까지 요하니, 과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읽는 맛이 있다. 작년에 출간된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도 그랬다. 뛰어난 문학 에이전트이자 뮤즈였던 아내를 잃고난 후 5년이 흘러 소개된 작품이 바로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이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의 경우, 읽으면서 '그래서 언제 슬퍼할건데?'라 묻고 싶을 정도로 문장의 호흡은 흐트러짐이 없다. 이거 원, 난중일기도 아니고, 아들의 죽음을 공문 기재하듯, 서부전선 이상 없다 보고하듯 한줄로 갈음하는 이순신 장군님마냥 반스의 글은 시종일관 고른 호흡이다. 세련되고 우아한 그의 문장은 슬픔에 집어삼킴을 당하지 않고 텍스트에 슬픔을 갈음했다. 은유와 우아함의 절정 속에, 후에는 그리움과 슬픔이 느껴진다. 아니, '스며든다'라 말하는 편이 맞겠다. 읽다보면 반스의 작품에 항상 따라붙는 헌사 한 줄에서도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P.K.에게'.

 

반스의 모든 작품은 아내에게 바쳐졌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죽음 후 부부가 재회한다면 그는 이리 말할지도 모른다. "여보, 봤어?" 나는 여전히 당신을 위해 글을 썼고 내 글은 당신에게 바쳐졌다고, 조용히 생색낼지도 모르겠다. 여러 면에서 반스의 작품은 항상 '(일독을 마친 책을)다시 읽고 싶고, 한 번 더 읽어야만 하는 작가'로 상위에 꼽힌다.


 

 

새로운 책 <용감한 친구들> 역시 그러했다. 왜 이 시대에 부담되게 소설이 두 권이어야만 했는지 장광설 풀었는데, 반스였기 때문에 가능한 두 권이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1권을 중간쯤까지 읽다가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탐정 - 셜록 홈즈 - 를 창조한 아서 코난 도일의 일대기이자, 책 속 명탐정 홈즈가 아닌 저자가 스스로 해결한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이 이야기는 초반을 견디기가 만만치 않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인도계 영국인 '조지 에들지'의 '조지'와 '아서'의 유년기부터 교차 편집되며 이야기가 죽 이어지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등장한 총은 반드시 발사되어야만 하듯, 반스가 평전 작가가 아닐진대 둘의 소싯적 이야기를 괜히 덧붙였을리가 없다. 서서히, 밀물 들어와 어느새 바짓단 적시고 어느새 허벅지, 이제는 목까지 차오르듯 삶과 인생과 그로인해 누적된 사건과 결과가 어느새 가슴에 들어차 있다.

어느 매체는 <용감한 친구들>(원제: 아서와 조지)를 일컬어 '사랑과 죄의식, 정체성, 명예와 용기를 그려낸 뛰어난 이야기의 승리.'라 평했다. 많은 이들이 1권의 중반부에서 마의 오르막을 만난 마라토너마냥 허덕이겠지만, 고개만 넘는다면 1권 후반부에서 '사랑과 죄의식'에 대한 뛰어난 묘사와 설득으로 숨이 멎은 듯 읽어내려갈 것이다. 지쳐 포기할 때쯤 드러나는 '런너스 하이'랄까. 읽는 맛, 희열이다.

 

 

 

아파 쓰러진 아내. 아마 정상적인 성생활이 불가능했을 아내. 그리고 신선하고 젊은 매력을 페로몬처럼 뿌리는 새 연인. 아서는 스스로 '플라토닉'한 사랑이라 말하지만, 몸은 집에 머물되 마음은 새 연인에게 온통 쏠려있다. 주머니의 송곳은 튀어나오게 마련인데, 이 말은 비단 재능에 국한된 게 아니다. 사랑은 감출 수 없다. 시작된 사랑의 설레임과 열기는 얼굴에서 지울 수 없는 법이다. 퍼블리셔스 위클리가 평한 '사랑과 죄의식, 정체성'의 면모가 1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명예와 용기'는 2권의 몫이다. 결국 '불륜'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랑 앞에, 행여 아내가 어서 죽기만을 바랐을지도 모를, 단 한번이라도 그러한 생각을 품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 반스의 우아한 문체로 사실감있게 묘사된다. 읽는이마저도 가슴 한켠이 저릿하다. 그와 함께 '아서' 편, '조지' 편으로 나뉘어 교차 전개되던 이야기는 '아서와 조지'로 만나 폭발한다.

 

책에 등장한 새 연인과 아서의 쪽지 이외의 것들 - 편지, 신문기사, 정부 보고서, 의회 기록, '아서 코난 도일 경'의 글 - 은 모두 실제 존재하는 것들이다. 아서와 조지의 만남과 사건 해결은 아서의 자서전에서 짤막하게 등장하지만, 반스를 만나 두 권의 이야기가 되었다. 명탐정 창조자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 아서의 활약 덕에 조지의 누명은 벗겨지고, 후에는 영국의 사법체계마저 바뀌게 된다. 조지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이달지'라 발음하는 영국인들에게 '에들지'라며 발음을 정정해줄 것이고, 자신의 누명이 몸 속을 흐르는 피의 순도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아서'와 '조지'가 만나 같은 것을 보지 못했으나, 조지는 아서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아서가 '본 것'을 보게된다. 보는 것은 느끼고 믿는 것이다.

 

 

견딘 이들은 아서와 조지가 본 것을 함께 볼 수 있을 것이다. 2권을 덮었을 때, 나는 다시 1권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수많은 찬사가 입에 바른 말이 아니었음을, 왜 줄리언 반스가 맨 부커상 시상식장에서 <용감한 친구들>을 두고 가장 긴장했었는지 맛보게 될 것이다. 비록 <용감한 친구들>이 맨부커상 수상에 실패했고 6년이 지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너무 늦게' 수상하게 되었으나, 작가 스스로 수상에 대한 기대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는지 설득당하게 될 것이다. 2권 후에는 분명 1권을 다시 집어든 자신을 마주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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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Special 김연아 Who? Special
오영석 글, 라임 스튜디오 그림, 송인섭 추천 / 다산어린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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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딸래미 선물로 샀는데 내가 먼저 읽고 빠져들었다.(갑자기 주기 아까움...) 읽다가 막판에 울컥. 태극기 어디갔어, 이거? 어릴 땐 아사다마오가 김연아 선수보다 더 잘했었다니(그런시절이 있었구나...) 김연아 선수의 노력이 정말 대단하다. 그림 예뻐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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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
알바로 무티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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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에 이어 나를 매혹시킨 책. 땅이 멀고 언어가 멀지만 무지하게 하루를 깎아먹는 사이에도 명작은 탄생한다. 이런 작품을 이렇게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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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와 함께 『노인과 바다』영어판을 선물로 받았다. 책소개 일부를 옮겨 본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노인과 바다』는 국민대 영어영문학과 이인규 교수의 번역으로 선보인다. 헤밍웨이는 평소 사전이 필요한 글을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만큼 간결하면서 꼭 필요한 단어만을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영어가 일견 쉬운 듯 보이지만, 자칫 그 의미를 잘못 파악한 경우를 기존 번역본들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세계명작', '고전'의 범주에 속하는 『노인과 바다』의 영어판은, 위에서 밝혔듯 고급어휘나 전문용어를 배제하고 최대한 간결하고 명확한 단어를 사용했다. 간결하고 명확한 말로 썼다곤 하나 우리의 한글로 쓰여진 작품이 아니기에 언어의 참뜻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간결하고 명확한' 단어는 오히려 함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논의가 필요한 부분을 발췌, 소개한다.

 

 

 

 

예약판매 선물인『노인과 바다』영어판 29페이지를 보면 'Dolphin'이 등장한다. 문학동네 『노인과 바다』35쪽에서는 위 문장을

 

"만새기야." 노인은 크게 소리쳤다. "커다란 만새기 떼야."

 

로 옮겼다. 우리는 흔히 dolphin이라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돌고래'라 생각한다. 편집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다. 편집에서는 보지 않고 믿는 반석의 믿음보다는,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와 못박힌 손과 발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보는 도마의 의심과 확인이 필요하다.

 

 

 

 

창비에서 출간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를 보자. 2005년에 초판을 발행한 이 책을 보면 『노인과 바다』는 총 129개 출판사에서 나왔다. 이름이 밝혀진 역자가 70명, 편집부 등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이 8종, 역자 자체가 드러나지 않은 것도 8종이다.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에서는 역자가 밝혀진 책 가운데 66본을 입수해서 원서와 꼼꼼히 대조했다. 번역본 중에서는 앞선 번역본을 표절하거나 과도하게 활용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새로운 번역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번역은 22명 역자의 번역 22종 뿐'.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에도 'dolphin'의 오역에 대해서 언급한다.

 

 

 

 

많은 판본이, 심지어 최근에 발행된 판본에서도 'dolphin'을 '돌고래'로 옮겨놓았다. 그런데  'dolphin'이 '돌고래'가 아님은 『노인과 바다』본문에도 밝혀 놓았다.

 

 

 

 

위 책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에도 언급했다시피, 문학동네판『노인과 바다』77페이지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내일은 만새기를 먹을 거야. 노인은 만새기를 도라도*라고 불렀다.' 

 

페이지 하단에는 '도라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도라도는 만새기를 뜻하는 스페인어이다.

 

 

 

 

위 내용은 『노인과 바다』 본문 75쪽, 만새기의 외형을 묘사한 부분이다. 75쪽과 76쪽에 만새기의 외형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뒤이은 77쪽에 '도라도'에 대한 언급이 있다.

 

 

 

 

참고로 문학동네판『노인과 바다』50쪽을 보면 '밤사이에 돌고래 두 마리가 배 가까이로 다가왔다'는 대목이 나온다. 같은 내용을 영어판에선 어떻게 썼는지 보자.

 

 

 

 

『노인과 바다』영어판 41쪽에는 'two porpoises'로 나와있다. 돌고래를 묘사할 때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porpoise라는 단어를 '택했다'. 그리고 만새기를 묘사할 때는 dolphin을 썼다.

 

앞서 말했듯 (한글판)『노인과 바다』에는 dolphin, 즉 만새기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했다. 75쪽에서 76쪽에 걸친 소개를 보면 dolphin의 묘사에 '등은 자줏빛, 자주색 줄무늬나 반점, 황금빛으로 빛나는 몸, 길고 넓적한 몸뚱이, 황금빛 대가리' 등의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황금빛, 자주색 줄무늬나 반점, 무엇보다 '길고 넓적한 몸뚱이'가 돌고래의 외양과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dolphin이 왜 돌고래가 아닌지는, 이렇듯 책 스스로가 답을 주고 있다. dolphin, 만새기에 대한 외형 묘사도 구체적으로 되어 있어서 돌고래와 확연히 구분되며, 노인의 말 '도라도'를 통해서도 dolphin이 만새기임을 알 수 있다. 바다의 절대 고독에 던져진 노인 곁에 자주 등장하는 물고기가 바로 '만새기'이다. 잠깐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아닌 것이다. 문학동네판 『노인과 바다』를 번역한 국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이인규 교수는, 번역 소감을 이리 밝혔다.

 

“좋은 번역을 읽는다면 원작을 읽는 것과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정확한 번역에 좋은 편집이면 외국 작품을 읽으면서도 같은 감동을 느낄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사후 50년이 지났다. 이미 강을 건너 저 너머로 간 그를 현세에 소환할 방법은 없다. 있다면 단 하나,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그를 만나는 것이다. 이인규 교수의 말대로 좋은 번역에 좋은 편집이면, 다른 말을 하고 다른 환경에서 자라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간 작가를 같은 언어권, 작가와 동시대에 살았던 이들과 동일한 감동으로 만날 수 있다. 번역과 편집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며, 도마의 의심과 확인이 곧 구원이다. 불멸의 고전은 신성을 지닌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의 틈에 손과 펜을 찔러넣어 만지고 확인하고 다시 또 확인하는 게 곧 구원이다. 그런 확인을 거친 작품이 우리에게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선사한다.

 

예약판매 기간 중 선물한 『노인과 바다』영어판은, 수년간 『노인과 바다』텍스트를 두고 강의하며 강의노트를 채우고 연구하고 거듭 들여다본 역자의 자신감이다. 익숙한 단어가 주는 '안도의 함정'을 비껴간, 감동을 고스란히 옮겨온 판본임을 자신하기에 영어판을 선물한 것이다. 책에 있어서 다름은 틀림이다. 다름과 틀림은 같은 말이 아니나 책의 세계, 활자의 세계에서 다름은 곧 틀림이다. 지금까지 나왔던 백수십여 종의 비슷한 것들은 잊어라. 영어판의 자신감과 함께 진짜를, 진짜 감동을 만나보길 바란다. 수십 년 전에 쓰여진 원작의 감동이, 막 잡아올린 청새치마냥 당신의 품안에서 펄떡일 것이다.  

 

 

 

 

 

 

 

 

노인이 만새기를 낚아 올리는 장면이다(75쪽). 잠시, 쉬자.

번역에 대한 이야기, 한 단어가 어떻게 작가의 손에 간택되고 어떻게 옮겨졌으며 어떻게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죽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잠시 눈을 쉬게하자. 어두워지기 직전, 바다가 노란 담요 밑에서 무언가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해초 더미, 그리고 마지막 햇살 속에서 완전한 황금빛으로 빛나며 생의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만새기를 보자.

 

 

 

 

영어판 62쪽, 'Just before it was dark,'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원문도 함께 만나도록 하자. 한글과 함께, 아름다운 원문도 입 안에 넣고 굴려보자.

 

 

 

 

 

좋은 글쓰기란, 대체할 수 없는 언어를 자신의 자리에 꽂는 일이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만새기와 함께 여러 물고기들을 낚았으나 노인이 잡고자 한 것은 생애 최고의 청새치였다. 노인이 작살을 꽂고자 했던 것은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한 청새치다. 낚는다는 행위만 중요시하여 청새치 대신 만새기를 잡고 돌아오는 일은, 그저 쓴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여 이런저런 단어를 적당히 쓰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좋은 글은, 도무지 그 단어 이외에는 갖다 쓸 수 없는, 바로 그 문장의 그 자리를 위해 탄생한 듯한 단어를 바로 그 자리에 꽂는 일이다. 청새치를 낚아올리는 손맛을 맛본 자라면 만새기를 낚아 올리는 일로 만족할 수 없다. 텍스트 또한 그러하다. 훌륭한 번역과 편집을 맛본다면, 도무지 그 짜릿한 손맛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번역자는 오늘도 언어의 바다에서 자신이 노린 '단 하나의 단어'를 찾아 배를 띄운다. 나는 앉아서 생애 최고의 월척을 책으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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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1-26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잘 읽었어요. 글이 너무 좋아서 추천도 꾹, 눌렀습니다. 그리고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어요.
사실 영문판을 증정으로 준다는 사실에도 혹했지만 말입니다. 하핫 :)

진새삼촌 2012-01-30 09:19   좋아요 0 | URL
^^ 추천 감사합니다. 영문판이 본 상품(?)과 똑같은 형태라 깜놀했다지요. ㅎㅎ 책에는 수많은 의미와 가치가 담겨있지만, 한편으로 책은 가장 저렴한 인테리어 소품이라 생각하는지라... 본판과 똑같은 영문판이라 깜놀이었답니다. ^^;

blanca 2012-01-2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정말 근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진새삼촌 2012-01-30 09:20   좋아요 0 | URL
어익후! 부끄럽사옵니다! ^^;;
(하지만 칭찬 받고 춤출 준비하는 중이어요 ㅎㅎㅎ)

oren 2012-01-2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만새기'에 대한 얘기도 너무 재미있네요.

제가 2001년 여름휴가때 제주도의 차귀도 앞바다에서 '바다낚시'를 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우리 식구들이 '다랑어 대여섯 마리'와 함께 '만새기'를 한 놈 잡아 올렸답니다. 정말 난생 처음보는 '제법 커다란 대어'를 낚아올렸던 터라, 그 놈을 잡아올린 제 아들(당시 초등학교1학년, 올해 고3에 진학합니다)이 너무 흥분해서 좋아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그 당시 잡아올렸던 만새기의 몸 길이를 재보니 바닥에서 제 아들의 겨드랑이에 닿을 정도였답니다. 혹시라도 그 때 찍은 사진을 찾게되면 이 댓글에 덧붙여 보겠습니다)

oren 2012-01-27 22:40   좋아요 0 | URL
퇴근후 집에 돌아와서 11년전에 찍었던 사진들을 살펴보니 '만새기'는 도대체 찾을 수가 없네요. 아마도 '만새기'는 제가 들고 다니던 캠코더에 담긴 뒤에 비디오테이프로 옮겨진 것 같은데, 디지털 시대로 바뀌다 보니 TV에 연결해 놓은 블루레이 플레어이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네요. 그냥 지나치기도 그렇고 해서 '만새기를 잡은 아이들'의 그당시(2001.7.31) 사진이나마 올려봅니다.







진새삼촌 2012-01-30 09:22   좋아요 0 | URL
헉! 정말 사진 올려주셨네요! ^^ 만새기가 없다면 또 어떻습니까. 만새기야 뭐 온갖 검색으로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는데요. 제 눈에는 아빠와 함께 낚시를 나온 아이들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인생의 월척' 아닌가 싶습니다. 만새기를 못 본 분들에겐 '검색 이미지'보다 막 낚아올린 만새기 사진이 훨씬 생동감 있겠지만,제 눈에는 가족의 한때가 더 보기 좋네요. ㅎㅎ 저도 올 여름엔 제주도 한번 뜰 예정입니다! ㅎ

이진 2012-02-02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너무 늦었지만 이글은 추천을 누르지 않고서는 제가 찝찝할 거 같군요.
헤밍웨이의 훌륭한 글과 이인규교수의 멋드러진 한 마디보다도 전율이 이는 글이었습니다.
너무 좋은걸요

진새삼촌 2012-02-06 09:54   좋아요 0 | URL
^^ 답글이 늦었네요. ^^;;;; 솔까말, 쑥쓰러워서 답글 달기가 망설여졌습니다. 과찬이세요. 그래도 칭찬과 함께 꾸욱~~ 눌러주신 추천, 감사드립니다. ^^

재는재로 2012-02-02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감사합니다 이제까지 돌고래로 알고 있었는데 꾸벅~

진새삼촌 2012-02-06 09:55   좋아요 0 | URL
^^ 네. 저도 문동판 <노인과 바다> 역자의 말 보고서 돌고래가 아니라 만새기인 걸 알았답니다. ^^;;;; 그거 알고나서 뒷조사(?)를 한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