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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 바퀴 탈 것 - 자전거의 역사 문화 오늘
데이비드 V. 헐리히 지음, 김인혜 옮김 / 알마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페달을 밟으면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또는 적어도 그럴 것만 같았다. 또한 그것은 당신이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몇 번이고 계속해서 떠올라 당신을 유혹하는 진정한 연애의 경험이다. _본문 중에서

어릴 적, 어딘가로 바삐 걸어가는 중 친척 누나를 만났다. 자전거를 타고 있던 누나는 날 불러 세우더니 뒤에 타라 말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누나는 빨리 달릴테니까 조심하라며, 위험하니까 자기 허리를 붙잡으라했다. 왜 그랬을까. 그닥 조숙한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누나의 허리를 잡는 게 몹시 쑥스럽고 조심스러워 떨어진 낙엽이라도 줍듯 옷깃만 살짝 잡았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생 땐 미술학원에 다니는 여학생을 짝사랑했었다. 그림 그리는 손이 빠른 편이라 허여멀건한 석고상 면상 휘리릭 그려 주곤 여학생 나오길 기다렸다가 굳이 바래다 주겠다며 졸졸 꽁무니를 따라가곤 했었다. 자전거를 옆구리에 끼고 친구도, 연인도 아닌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 채 걷는 밤거리는 참 시리면서도 예뻤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날 뒤에 태웠던 친척 누나는 현재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는 아줌마가 되었고, 짝사랑이자 첫사랑 그녀는 시집 간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자전거는 잊혀진 지 오래고, 아빠가 된 난 세 살 아들을 세발 자전거에 태워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아저씨가 되었다.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많은 것이 사라져갔지만, 기억 속의 자전거는 여전히 은빛 바퀴살을 반짝이며 낭만의 거리를 달리고 있다. 또는 두근거리며, 조심스레 고향이나 유년의 거리 어딘가를 달리고 있다.

그러던 중, 추억을 더 풍요롭게 해줄 아름다운 책 한 권을 만났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 바퀴 탈 것>이 바로 그 책이다. 낭만이 넘칠듯 담겨 있다 하나 '자전거 레이서를 본업'으로, 소설가를 겸업으로 한 김훈 선생님의 <자전거 여행>처럼 사람 냄새 나고 사람의 길이 느껴지는 자전거 여행기는 아니다. 오히려 자전거가 인류에게 처음 찾아온 순간부터 현재까지. 자전거의 발전과 역사 등 자전거 문화사가 담겨 있는 무게 있는 책이다. 저자가 역사학자인지라 문체는 다소 딱딱한 편이지만, 건조함을 상쇄시켜줄 자전거 발명 당시의 기사나 사진, 도판 등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2003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역주하고 있는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의 모습을 만날 수 있고, 하이브리드카가 소개되는 속도의 시대에 왜 인간을 동력으로 하는 두 바퀴 탈것인 자전거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교통수단인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삼겹살에 고기만 있으면 팍팍해서 그 맛을 못느끼듯, 겹겹의 고기 사이에 낀 적당한 기름기마냥 아름다운 도판, 엔틱함마저 느껴지는 당대의 기사글 등이 단순한 인쇄 뭉치를 '책'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책'으로, 그리고 심미적 기능까지 더해진 고급스러운 장정이 서가를 빛내주는 엔틱한 소품으로까지 책의 물성을 진일보시켜준다. 아직 절반도 채 못 읽었으나 보듬고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흡족해 진다고나 할까. 넘칠듯한 풍부함과 유려한 서술, 꼼꼼하고 빠트림 없는 조사가 책의 완성도를 한껏 높이니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라면, 자전거를 더 알고 싶고 더 사랑하고픈 이라면 손길이 자연 끌릴 수밖에 없다 하겠다. 

이미 많은 것이 변해버렸고 흘러간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순 없다고 하나, 낡은 앨범의 갈피를 넘기듯 책을 넘기며 옛 사진과 기사를 보며 추억에 빠지기 좋으니, 곁엔 따뜻한 차 한잔 있으면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궁합이겠다. 문화사 관련 책을 읽으며 이처럼 여유있는 호흡으로 책장을 넘긴 적이 몇 번이나 되었던가. 
 

슬로우 슬로우 퀵퀵. 춤 추는 스탭만 슬로우가 필요한 게 아니다. 때론 삶에도 '슬로우'가 필요하고, 느린 걸음걸이처럼, 칸타빌레처럼 삶을 즐길 때 비로소 삶에서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달나라엔 옥토끼가 없다는 것을 닐 암스트롱은 '겁나게 빠른' 우주선을 타고 가 증명했다지만, 고환암 판정을 받은 랜스 암스트롱은 투병 후 투르 드 프랑스 사이클대회 7연승이라는 전설의 기록을 '겁나 빠른' 우주선에 비해 '겁나 느린' 사이클을 통해 남기기도 했다. 꼭 비싼 연료 때가며 우주선을 타고 내디딘 첫발만 인류에게 기억되는 게 아니다. 자전거 선수로서는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인 고환암을 이겨내고 땅을 밟고 자전거 바퀴를 굴려서도 얼마든지 인류에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느리고 힘들다고? 아니다. 우주선의 속도보다는, 바람을 맞고 달리는 자전거의 속도가 우리에게는 절실한 '인간의 속도'인 것이다. 늦기 전에, 한번쯤 되돌아가 보자. 그리고 떠나 보자.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 바퀴 탈것을 이용해 춤 추는 속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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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자격증이 필요해요 - 엄마학교 Q&A
서형숙 지음 / 큰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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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치원 교사인 아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엄마도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엄마, 아빠, 그리고 부모가 될 준비가 안 된 이들이 생의 축복인 아이를 얻었을 때, 축복은 온전히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으로 다가온다. 현실적으로 산모가 산후 우울증을 얻거나 부모 간 양육의 역할 분담을 명확히 설정하지 못해 다툼이 일고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아이가 부모에게 찾아옴이 축복이듯, 아이에게 세상 역시 축복임을 알려주는 것은 부모의 몫일진대, 부모로서의 권리만 찾되 자녀를 향한 사랑의 의무는 소홀히 하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이 책은 저자 서형숙 님이 전작 <엄마 학교>를 통해 전했던 다소 큰 그림의 이야기를 실생활에 접목할 수 있도록 디테일을 살려 풀어 쓴 책이다. 책은 수많은 엄마들의 하소연과 고민을 듣고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엄마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했을 법한 이야기들로 꽉 들어차 있다. 질문 하나하나가 버릴 것이 전혀 없다고나 할까, <엄마 학교>의 실전편이랄까. 자녀 양육의 야전 교범, 한마디로 FM이랄까. 그런데 이 책을 관통하는 명제는 단 하나다.

"댁의 자녀들은 잘 크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클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더 사랑해 주시면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미혼의 독자가 읽는다면 이 무슨 무책임한 소리인가 싶을 듯. 이렇게 교과서적이고 원론적인 답변을 답변이랍시고 책으로 엮었냐고 따질 분 계실듯. 하지만 이게 바로 정답이며, 이러한 마음으로 자녀를 대해야만이 자녀가 건강하고 높은 자존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게 정설일진대 어찌 돌을 던진단 말이더냐. 엄마들의 하소연을 하나 하나 애정어린 시선으로 읽다 보면 아이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크고 있으며, '문제가 있다'고 걱정하며 조바심 내는 부모에게 오히려 잘못이 있음을 스스로 깨우치고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아이를 '잘 키우는 법'을 알려주기 보단 걱정하고 걱정하며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를 '가꾸려' 하는 마음을 버리는 게 우선임을 역설하고 있다.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의 미래상을 투영하며 자녀의 상상력과 가능성을 가지치기하는 조급한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은 꽃과 같은 아이들에게 스스로 커갈 힘을 북돋아 주도록 엄마가 즐겁게 인내하기를, 즐겁게 인내할 때 양육의 길이 보임을 친절히 알려주고 있다.

한낱 탁상공론이 아니라 저자 스스로 자녀 교육에 있어 자신의 말과 신념에 책임을 지며 아이를 길러온 엄마이기에 책의 말들은 설득력을 얻는다. 떠도는 말잔치나 달콤한 포장, 듣기만 하고 책을 사서 읽기만 하면 다 잘 된다는 식의 가벼운 기획이 아니라 삶의 경험과 아이에 대한 사랑이 깃들어 있기에 책은 무게를 더하며 진중함을 얻는다. 책에 실린 수많은 엄마의 고민들 중 하나라도 피해갈 수 있는 자유로운 엄마가 과연 몇이나 될까. 피임에 실패하여 된 부모가 아니라 아이를 원하고 또 원하여 부모의 자리에 선 이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하며 즐겨 찾게 될 책이다. 부모 노릇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만큼, 이런 책이 나와서 참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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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 파이브 세트 (한정판) - 전4권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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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키라>, <스팀보이> 등으로 세계적인 만화가라 평가받는 오토모 카즈히로 이후로 가장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만화가로 평가받는 마츠모토 타이요. 만화가가 인정하는 만화가. 카미조 아츠시 등 수많은 만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노라 공공연하게 얘기하며, <철콘 근크리트>와 함께 영화화되기도 한 대표작 <핑퐁>의 국내 출간작 말미에는 <위대한 캣츠비>의 강도하 작가가 '도하와 성수의 핑퐁 talk'라는 애정어린 평을 덧붙인 것으로도 유명한 천재 작가, 마츠모토 타이요. 그가 돌아왔다. 신작 <넘버 파이브>를 들고서!

<철콘 근크리트> 애니메이션 포스터

압도적이라는 건 이런 작품을 수식하는 말이 아닐지. 마츠모토 타이요가 <아키라>로 유명한 오토모 카즈히로를 잇는 천재작가로 평가받는 이유를, 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2007년, 스폰지하우스에서 열린 일본 인디필름 페스티벌 홍보 포스터

마츠모토 타이요의 <철콘 근크리트>의 이미지로 디자인됐다.
스폰지 하우스에서 열린 작년 일본 인디필름 페스티벌은 만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상영되어 눈길을 끌었고 그 중심에 <철콘 근크리트>가 있었다.


<넘버 파이브>는 2001년 일본에서 연재를 시작한 작품이니 국내에 소개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차가 발생한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쳐다보는 별빛을 생각해보자. 수십 광년 떨어진 곳에서 반짝인 별빛이 끝없는 거리를 달려 마침내 우리 밤하늘에 도착했을 때 그 반짝임은 이미 수십 년 전의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영롱함에 티끌 하나 묻어 있던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손에 <넘버 파이브>가 도착하기까지 수년이 걸렸지만, 기다림이 오히려 반짝임을 배가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에 만화 분야에 조예가 깊은 분께 들은 얘기인데, 뼛속까지 만화의 잉크가 새겨진 진짜배기 만화 매니아들은 같은 도서를 세 권 구입한다고 한다. 한 권은 평소 독서용. 또 한 권은 서가 보관용. 나머지 한 권은 스페어용. 아니 무슨 만화가 겨울철 스노우 타이어도 아니고, 트렁크에서 잠자는 스페어 타이어도 아니고, 책에 스페어가 가당키나 한 소린가. 집사 딸린 대저택에서 취미로 범죄 해결하는 돈지랄 배트맨도 아니고 같은 책을 세 권 씩이나, 게다가 스페어는 뭔 놈의 스페어냐 싶었다. 스페어는 커녕 이사갈 때 분리수거함에 슬쩍 떨구고 오기 십상인 게 책의 신세 아니던가. 그런데 <넘버 파이브>를 손에 쥐었을 때 '아, 적어도 서가 보관용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정판이라는 것은 한 작가의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팬들에게는 소장 필수 아이템이자 말년 병장이 손꼽아 기다리는 전역증과도 같다. 하지만 '한정판'이라는 이름 아래 같지도 않은 상품을 포장하는 마케팅 상술도 도처에 널려 있으니 한정판이라고 하여 덮어놓고 결제하기 버튼을 클릭했다가는 삼대가 후회하는 경우가 생길수도 있다. 책을 적당한 상자에 넣은 다음 수첩이나 메모장 쪼가리 따위로 박스를 채우고선 한정판이라고, 그래서 조금 더 비싸다고, 하지만 당신이 문학과 예술을 안다면 이 한정판을 구매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엊그제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가 사실은 백인이며, 선탠을 과다하게 해서 피부가 검어 보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것처럼, <넘버 파이브> 한정판 세트는 실로 '한정판'이라는 칭호를 수여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pvc 재질의 세트 포장 박스는 흔히 보는 종이 박스에 비해 조금 새로울 뿐 아주 특별하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책을 감싸고 있는 양면 포스터가 한정판의 아우라를 무지막지하게 쏘아대고 있다. 처음에 책을 받았을 땐 책 표지에 제목이며 뭐며 글자 한 자 없어서 '이게 뭐야?' 싶었는데, 책 커버를 벗겨 보니 착착 펴지면서 올컬러 양면 포스터로 변신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반짝이는 종이의 이 뽀샤시한 질감! 포토샵으로 얼굴 윤곽 흐리게 하고 눈 키운 다음 색조 화장 입히듯 이 신비롭고 뽀샤시한 재질의 종이는 분명 외국에서 물 건너온 수입 펄지가 분명하다.

그나저나 양면 포스터인데, 아까워서 벽에 붙일 수도 없으니 이를 어쩐다. 벽에 붙이면 한쪽 면은 영영 못 보는 게 아닌가. 이래서 서가 보관용이 필요한 것은 아닐지. 뭐, 당장은 돈 없으니 그냥 아껴가며 볼 생각이다만. 이쯤 되니 왜 세트 박스를 투명 재질로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피카소는 여인네 얼굴을 정면에서도 보고 측면에서도 보고 싶어 입체파를 만들었듯, <넘버 파이브>는 뽀샤시 책커버를 앞에서도 보고 옆에서도 보아 달라고 이리 속 비치는 재질로 만든 것이다. 본문에 가끔 등장하는 컬러 페이지는 뽀너스!

책의 비주얼에 대해서만 언급했는데, 본문의 내용은 굳이 얘기하지 않겠다. 만화를 좋아한다면, 사서 읽어라. 그리고 느껴라. 정 돈이 없다면 만화 좋아하는 친구를 꼬드겨서 지르게 해라. 그리고 빌려서라도 읽어라.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전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일본에서, 왜 이 작가에게 '천재'라는 칭호를 스스럼 없이 붙이는지,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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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1권
굽시니스트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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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곰이, 마늘과 쑥만으로 어둠에서 100일을 견디어 사람이 되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나라 신화니 변신하는 곰에 관한 이야기를 그러려니 하고 들었었지만, 머리 굵어지고 나서 생각해보면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린가. 어찌 곰이 태양을 피하고 채식만 하여 털가죽 벗고 사람이 된단 말인가. 서점에서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를 접했을 때의 느낌이 딱 그러했다. DCinside와 Egloos라는 다소 동굴 같은, 내면으로 파고드는데 선수인 유저들의, 개성 강하나 다소 음지인의 기운이 승한, 메이저리그가 아닌 마이너리그, 그 중에서도 살짝 벤치멤버 느낌이 나는 무대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만화가 책으로 엮여 만화 출판계에 떡, 하고 등장하다니. 소림, 무당, 화산 등의 무림 정파에 사파의 살수들이 독수를 크게 날렸다고나 할까. 윽, 당했다! 이 독한 살수는 처녀와 합궁해야만 치료할 수 있는 '미혼향'이.... 인 것은 아니고, 어쨌든.

웹상에서 이 만화의 연재분을 접했을 땐 "뭐야, 메가쑈킹만화가는 '발로 그리는 <탐구생활>이라고 자기 작품 유머 코드를 스스로 희화화 시켰는데, 굽시니스트는 진짜 손이 아닌 발로 그림을 그렸잖아!"라고 놀란 게 1차요, 발로 그린 엉성한 그림임에도 수많은 폐인 유저들의 칭송을 받으며 '본좌'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에 놀람이 2차였다.

그런데 진정한 놀람 3차는 바로 이것이니, 발로 그린 그림이라며 비웃던 내가 하루 종일 식음을 전폐하고 연재 1화부터 최종화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내렸다는 것이 그것이다. 단순히 '재미있다'라고 말하기엔 심히 부족하다 하겠다. 그럼 뭘까. 이 작품의 힘은.

일단, 그림이 그 힘이 아님은 분명하다. 굽본좌를 섬기는 폐인들께 몰매를 맞을지 모르겠으나, 짚고 넘어갈 건 확실히 하자. 굽시니스트는 웹에서 연재하던 그림을 거의 새로 그리다시피 해서 책으로 냈다고 하는데, 솔직히 새로 그렸어도 아주 잘 그린 그림은 아니다. 그럼 뭔가, 도대체 그 힘이. 그렇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조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니올시다이다. 새롭고 전복적인 시각이야 얼마든지 많고, 상상력이 무한질주하는 만화에서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소재'는 널리고 널린 게 아니던가.

그렇담 지칠 줄 모르는 패러디? 음... 미드, 일드, 일애니, 정치 등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아닌 척 슬쩍 끌어다 쓰는 솜씨가 일품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도 그 힘의 전부라 하기엔 약하다. 역사를 이야기할 때 패러디라는 방식을 차용해 나랏님이며 뭐며 비비 꼬고 비웃는 것은 일상다반사가 아니던가.

그럼 뭘까? 조금 허무한 답이 될 수 있겠으나, 곰곰 생각해보니 이 작품이 책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힘을 부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첫 책을 낸 굽시니스트에겐 과한 비유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이 작품은 훗날 양영순의 <아색기가>와 같은 작품으로 한국 만화사에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양영순과 굽시니스트의 상당한 필력 차이는 차치하고, 양영순이 순식간에 만화계의 총아로 떠오른 것은 젊잖은 양지의 만화계에 음담패설 수준의 내용을 맛깔스럽게, 야하게, 그러나 천박하지 않게 표현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노골적으로 야하지만 훌륭한 데생과 은근한 표현으로 속되다 여겨지던 성의 뒷담화를 양지로 끌어낸 공. 곰팡이 핀 성기를 광화문 사거리에 드러내되 변태로 나서지 않고 행위예술로 승화시킨 것이 양영순과 저 <아색기가>의 공이 아니던가.

서브컬처. 마이너 인생들의 문화. 그러나 생을 마이너, 메이저로 가르는 게 무엇인가?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촛불을 들고 모입시다!'라는 외침. 애당초 마이너 중의 마이너가 아니던가. 훅 불면 꺼져 버리는 촛불로 컨테이너 성벽을 어찌 타 넘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누리꾼의 외침, 모든 매스컴이 외면하던 마이너 촛불은 음지(?)의 매체를 통해 전파되었고, 곧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중심의 자리에 섰다. 하지만 그게 메이저일까? 아니다. 여전히 마이너이다. 단지 수많은 마이너들이 힘을 합한 것뿐이다. 

성은 개방되고 초딩도 아빠 주민번호로 성인 사이트에 접속하는 시대다. 더이상 순진한 '아색기가'를 들고 나와서는 만화계에 파란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우리나라 만화가들, 세계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상당한 그림 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발로 그린 그림이, 성이 아닌 역사와 사회를 들고 나왔다. 패러디의 완숙미나 작법, 표현의 세련됨은 차치하고서라도, 서브컬처를 향유하며 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 말하며 성냥불로 언발 녹이던 굽시니스트가 어느새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우리 앞에 섰다. 역사는 되풀이되며, 독재자는 지금도 살아있다는 무거운 이야기를, 세라복 입은 일본틱 여고생을 등장시켜 낄낄거리며 말하고 있다. 양영순이 곰팡이 핀 성기를 들고 광화문에 나섰다면, 굽시니스트는 피와, 독재와, 웃기지도 않는 고집을 유니폼으로 코스프레한 모습으로 광화문 거리에 나섰다. 그 코스프레를 지켜보고 있자니 웃기다가, 비통해지다가, 씁쓸해진다. 세상을 상대로 장난질하는 게 어디 저 독재자 히틀러뿐인가.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다.

책 좀 읽었다 하는 독자분들, 눈썰미 좋은 독자분들, 성에 안 찰지 모르겠다. 부족함이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작가의 첫 책이다. 세련됨은 없어도 엄청난 에너지가 담긴 작품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양지에 나왔다 하여 행여 백로들이 소위 말하는 '따'를 시킬지 모르겠으나, 이 까마귀 같은 작품은 3단 변신 및 합체 가능한 엄청난 '놈'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볼 수 있다면 공감하실듯. 액션과 사랑, 우정, 드라마 등이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만화판에, 역사의 코스프레를 하고 등장한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아무도 이런 것을 한 적이 없으니 분명 블루오션에 빤쓰입고 뛰어든 것이며, 분명히 마이너한 수많은 독자들은 그를 굽본좌로 기억할 것이다. 아주 수많은 마이너 독자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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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다 괜찮다 - 공지영이 당신에게 보내는 위로와 응원
공지영.지승호 지음 / 알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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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소설은 몇 권 읽은 게 없다. 단순히 호불호의 문제인데, 작가의 숨결이 나와는 잘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어 복숭아를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는데, 공지영의 작품이 그와 비슷하달까? 복숭아는 분명 맛이 있고 탐스러운 과실이며, 손오공이 하늘까지 올라가 어렵게 딴 금단의 과실이기도 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에겐 맞지 않는 과일이니 그 과즙의 풍성함이라던가 고운 빛깔은 다가서기엔 조금 꺼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도 아닌 인터뷰집인 이 책을 읽으며, 내 취향의 편협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소설보다 더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작가의 속내를 읽으며 이랬었구나, 이래서 그랬던 것이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감동을 받기까지 했다. 그녀의 억센 삶과 굽히지 않는 태도는 보수적인 나에게는 여전히 걸림이 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괜찮다, 다 괜찮다'라는 구절을 접하며 영혼의 묵은때가 마주보기 힘들 정도로 눈부신 흰 빛으로 표백되는 기분이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달까. 작가 본인이 수많은 상처를 지닌 사람이었기에, 치유를 경험한 속내 깊은 이의 위로는 그 어떤 말과 행동보다도 충분히 더 감동적이고, 짠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여전히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그녀를 사랑하는 이에게 웃음을, 나같이 미련하고 편협하여 그녀를 오해했던 이들에게도 변함없이 웃음과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그녀, 공지영. 단순히 베스트셀러 작가 공지영을 넘어 인간 공지영을 만날 수 있었고, 치유된 공지영, 그리고 더 나아가 치유하는 공지영을 만날 수 있음이 큰 기쁨이었다. '괜찮을까요? 저도 정말 괜찮을까요?'라고 아닌 척하며, 강한 척하며 살아오던 보수적인 30대 남성인 나도, '괜찮아, 다 괜찮아'라는 그녀의 말에 나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며 무너져내린 것이다.

따뜻한 위로 그 하나로 충분히 접해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삶을 살아본 자의 살아있는 위로, 눈물이 담긴 위로, 왜 억세고 강하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 담담히 풀어내는 강한 자의 여유있는 위로, 참 멋진 사람이다, 공지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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