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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와 함께 『노인과 바다』영어판을 선물로 받았다. 책소개 일부를 옮겨 본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노인과 바다』는 국민대 영어영문학과 이인규 교수의 번역으로 선보인다. 헤밍웨이는 평소 사전이 필요한 글을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만큼 간결하면서 꼭 필요한 단어만을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영어가 일견 쉬운 듯 보이지만, 자칫 그 의미를 잘못 파악한 경우를 기존 번역본들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세계명작', '고전'의 범주에 속하는 『노인과 바다』의 영어판은, 위에서 밝혔듯 고급어휘나 전문용어를 배제하고 최대한 간결하고 명확한 단어를 사용했다. 간결하고 명확한 말로 썼다곤 하나 우리의 한글로 쓰여진 작품이 아니기에 언어의 참뜻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간결하고 명확한' 단어는 오히려 함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논의가 필요한 부분을 발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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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판매 선물인『노인과 바다』영어판 29페이지를 보면 'Dolphin'이 등장한다. 문학동네 『노인과 바다』35쪽에서는 위 문장을
"만새기야." 노인은 크게 소리쳤다. "커다란 만새기 떼야."
로 옮겼다. 우리는 흔히 dolphin이라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돌고래'라 생각한다. 편집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다. 편집에서는 보지 않고 믿는 반석의 믿음보다는,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와 못박힌 손과 발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보는 도마의 의심과 확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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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 출간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를 보자. 2005년에 초판을 발행한 이 책을 보면 『노인과 바다』는 총 129개 출판사에서 나왔다. 이름이 밝혀진 역자가 70명, 편집부 등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이 8종, 역자 자체가 드러나지 않은 것도 8종이다.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에서는 역자가 밝혀진 책 가운데 66본을 입수해서 원서와 꼼꼼히 대조했다. 번역본 중에서는 앞선 번역본을 표절하거나 과도하게 활용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새로운 번역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번역은 22명 역자의 번역 22종 뿐'.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에도 'dolphin'의 오역에 대해서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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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판본이, 심지어 최근에 발행된 판본에서도 'dolphin'을 '돌고래'로 옮겨놓았다. 그런데 'dolphin'이 '돌고래'가 아님은 『노인과 바다』본문에도 밝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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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책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에도 언급했다시피, 문학동네판『노인과 바다』77페이지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내일은 만새기를 먹을 거야. 노인은 만새기를 도라도*라고 불렀다.'
페이지 하단에는 '도라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도라도는 만새기를 뜻하는 스페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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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노인과 바다』 본문 75쪽, 만새기의 외형을 묘사한 부분이다. 75쪽과 76쪽에 만새기의 외형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뒤이은 77쪽에 '도라도'에 대한 언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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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문학동네판『노인과 바다』50쪽을 보면 '밤사이에 돌고래 두 마리가 배 가까이로 다가왔다'는 대목이 나온다. 같은 내용을 영어판에선 어떻게 썼는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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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영어판 41쪽에는 'two porpoises'로 나와있다. 돌고래를 묘사할 때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porpoise라는 단어를 '택했다'. 그리고 만새기를 묘사할 때는 dolphin을 썼다.
앞서 말했듯 (한글판)『노인과 바다』에는 dolphin, 즉 만새기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했다. 75쪽에서 76쪽에 걸친 소개를 보면 dolphin의 묘사에 '등은 자줏빛, 자주색 줄무늬나 반점, 황금빛으로 빛나는 몸, 길고 넓적한 몸뚱이, 황금빛 대가리' 등의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황금빛, 자주색 줄무늬나 반점, 무엇보다 '길고 넓적한 몸뚱이'가 돌고래의 외양과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dolphin이 왜 돌고래가 아닌지는, 이렇듯 책 스스로가 답을 주고 있다. dolphin, 만새기에 대한 외형 묘사도 구체적으로 되어 있어서 돌고래와 확연히 구분되며, 노인의 말 '도라도'를 통해서도 dolphin이 만새기임을 알 수 있다. 바다의 절대 고독에 던져진 노인 곁에 자주 등장하는 물고기가 바로 '만새기'이다. 잠깐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아닌 것이다. 문학동네판 『노인과 바다』를 번역한 국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이인규 교수는, 번역 소감을 이리 밝혔다.
“좋은 번역을 읽는다면 원작을 읽는 것과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정확한 번역에 좋은 편집이면 외국 작품을 읽으면서도 같은 감동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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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 사후 50년이 지났다. 이미 강을 건너 저 너머로 간 그를 현세에 소환할 방법은 없다. 있다면 단 하나,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그를 만나는 것이다. 이인규 교수의 말대로 좋은 번역에 좋은 편집이면, 다른 말을 하고 다른 환경에서 자라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간 작가를 같은 언어권, 작가와 동시대에 살았던 이들과 동일한 감동으로 만날 수 있다. 번역과 편집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며, 도마의 의심과 확인이 곧 구원이다. 불멸의 고전은 신성을 지닌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의 틈에 손과 펜을 찔러넣어 만지고 확인하고 다시 또 확인하는 게 곧 구원이다. 그런 확인을 거친 작품이 우리에게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선사한다.
예약판매 기간 중 선물한 『노인과 바다』영어판은, 수년간 『노인과 바다』텍스트를 두고 강의하며 강의노트를 채우고 연구하고 거듭 들여다본 역자의 자신감이다. 익숙한 단어가 주는 '안도의 함정'을 비껴간, 감동을 고스란히 옮겨온 판본임을 자신하기에 영어판을 선물한 것이다. 책에 있어서 다름은 틀림이다. 다름과 틀림은 같은 말이 아니나 책의 세계, 활자의 세계에서 다름은 곧 틀림이다. 지금까지 나왔던 백수십여 종의 비슷한 것들은 잊어라. 영어판의 자신감과 함께 진짜를, 진짜 감동을 만나보길 바란다. 수십 년 전에 쓰여진 원작의 감동이, 막 잡아올린 청새치마냥 당신의 품안에서 펄떡일 것이다.
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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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만새기를 낚아 올리는 장면이다(75쪽). 잠시, 쉬자.
번역에 대한 이야기, 한 단어가 어떻게 작가의 손에 간택되고 어떻게 옮겨졌으며 어떻게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죽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잠시 눈을 쉬게하자. 어두워지기 직전, 바다가 노란 담요 밑에서 무언가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해초 더미, 그리고 마지막 햇살 속에서 완전한 황금빛으로 빛나며 생의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만새기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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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 62쪽, 'Just before it was dark,'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원문도 함께 만나도록 하자. 한글과 함께, 아름다운 원문도 입 안에 넣고 굴려보자.
좋은 글쓰기란, 대체할 수 없는 언어를 자신의 자리에 꽂는 일이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만새기와 함께 여러 물고기들을 낚았으나 노인이 잡고자 한 것은 생애 최고의 청새치였다. 노인이 작살을 꽂고자 했던 것은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한 청새치다. 낚는다는 행위만 중요시하여 청새치 대신 만새기를 잡고 돌아오는 일은, 그저 쓴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여 이런저런 단어를 적당히 쓰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좋은 글은, 도무지 그 단어 이외에는 갖다 쓸 수 없는, 바로 그 문장의 그 자리를 위해 탄생한 듯한 단어를 바로 그 자리에 꽂는 일이다. 청새치를 낚아올리는 손맛을 맛본 자라면 만새기를 낚아 올리는 일로 만족할 수 없다. 텍스트 또한 그러하다. 훌륭한 번역과 편집을 맛본다면, 도무지 그 짜릿한 손맛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번역자는 오늘도 언어의 바다에서 자신이 노린 '단 하나의 단어'를 찾아 배를 띄운다. 나는 앉아서 생애 최고의 월척을 책으로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