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 팝업북 (회색 행성)
생 텍쥐페리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구판절판


책도 아름다울 수 있다. 이 책, <어린 왕자> 팝업북을 펼쳤을 때 든 생각이다.

이 책을 펴기 전까지는 책을 지혜로운 존재로만 생각했지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책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트로이 전쟁은 한 여인을 사랑한 두 남자의 질투와 분노가 싹이 되었다. 그 여인 헬레네를 직접 보지 못하였다면, 왜 여인으로 인해 전쟁이 시작되었는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였다면 그저 역사책의 책장을 떠도는 글자로만 트로이 전쟁을 인식할 것이다. 남자들 머릿속엔 돈, 차, 집, 여자 뿐인 건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똑같다고 생각할지도. 그 여인이 뭐기에, 얼마나 아름답기에 칼을 들게 되는지, 사랑과 광기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할지도.

마찬가지로 <어린 왕자> 팝업북의 아름다움을 직접 보지 못하였다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왜 책 한 권 따위에 울고 웃게 되는지, 책 따위에 왜 '소장욕'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지 그 마음을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남편이 있는 여자를 사랑하여 '남의 아내'를 취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그로 인해 전쟁까지 불사한다는 것 또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책에 빠져 사는 이들에게 있어 소장욕이란, 한두 마디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이다.

보면, 갖고 싶다. 책장의 종이 결을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쓰다듬어 보고 싶다. 그런 책이 있다. '벌레'가 되어 책장을 이불삼아 누비고 싶은 그런 책이 있다. 책벌레들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책이 있다. 바로 <어린 왕자> 팝업북처럼. 남자, 수컷, 사내들에게 있어서 품고 싶은 건 여자뿐만이 아니다. 책벌레에겐 책이, 여인과도 같은 자릴 차지하기도 한다. 때로는.

<어린 왕자>. 성경과 자본론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

성경에서는 돈을 '일만 악의 뿌리'라 얘기하고, 자본론은 돈을 숭배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나선 '사회주의의 성경'이다. 그리고 어린 왕자는 '왜 어른들은 숫자 - 어쩌면 물질 - 에만 관심이 있고 내 친구에게는 관심이 없느냐고 얘기한다. 그러고 보면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성경과 자본론, 어린 왕자 모두 돈과 물질을 쥔 기득권층이 보기에는 불편한 이야기들이다. 성경에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했던가. 일만악의 뿌리인 돈이 숭상받는 요즘 세상,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이 어린 왕자를 만나기란 어쩌면 낙타에 올라탄 부자가 바늘구멍을 지나 천국에 가기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자, 긴 덧붙임 따윈 사족에 불과하니 한쪽으로 치워 버리자. <어린 왕자>는 누구나 다 아는 작품이니, 어째서 이 책이 아름답다 말하는지 직접 보는 것이, 백 번의 설명보다 낫다 하겠다.


이렇게 등을 보이던 어린 왕자는

여우가 다가오자 등을 돌린다. 좁아진 거리가 보이는지.

관계의 시작, 친밀함의 거리.

작은 장치를 당기면 해가 떠오른다. 어린 왕자가 좋아하는 해 지는 광경, 함께 보면 더욱 좋겠다.

해 지는 광경을 함께 볼 이 떠오른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일 테고.

노동은 신성한 것.

더욱더 힘을 내 사랑하기 위해선, 내가 먼저 온전해지고 내 마음 속 쓴뿌리를 캐내야 하는 게 순서.

어린 왕자의 양은, 이 상자 속에 있다.
내 마음 속엔 누가 있나. 상자 속에 있어도, 다른 이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내 눈에 보이는 누구.

이 양이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양은 이렇지 않아요.

기억 속 내사랑은 항상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

이렇게,

날아온다.

어린 왕자, 또는 내 사랑은.

언제 어디에서부터 날아오는지도 모른 채 사막에 떨어지듯 뚝.

사막에 떨어지듯 뚝,

어느 순간 그렇게 다가오는 그, 또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라면, 항상 하늘을 살피고 관찰해야겠지.

사랑을 방치하고 함부로 대하면,

어느샌가 상처가 자랄지도 모를 일. 마치 저 바오밥나무처럼.

이쯤 되면, 치유하거나 회복할 수 없다.

어린 왕자와 장미의 만남처럼, 독설을 내뱉고 내게 상처주는 사람을 위해서 보호막을 씌워주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바오밥나무 따위 자랄 일 없을텐데.

그러니 오늘도 열심히, 그 또는 그녀를 위해서 영차영차!

하지만 그럼에도

내 사랑이 떠나면,

내 마음에 추억처럼 떠오르는 내사랑.


내사랑.

날아가버린 내사랑.

좋은 사람에게,
정말 좋은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나는 당신에게 까탈스럽고, 나는 제멋대로이고, 나는 불평불만이 많고, 그리고 나는, 나는, 나는, 나 밖에 몰라 나는, 나는, 이라고 말하며 내 말속엔 '당신'이 없지만.

그래도 내 마음엔 당신 뿐이에요.

라고 적어서. 정말 좋은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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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9-08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문학동네에서 나온 따끈한 책이네요.
이번 추석에 선물용으로 찜했어요. 물론 나를 위해서도요!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복받으세요!^^

구름배 2009-11-01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스러운 책이 탐스럽게 나왔네요
소장욕을 자극하는 팝업
책을 열면 어린왕자가 눈앞에 뿅 하고 나타나다니
백마탄 왕자처럼...
갖고 싶은 책 만나고 갑니다
 
빛의 바다
코다마 유키 지음,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그날따라 유독 짐이 많았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어깨엔 가방을 메고, 종로에 나가는 271번 버스를 탔다. 겨우 자리가 나 앉자마자 <빛의 바다>를 펼쳤다. 읽다가 눈물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새카만 30대 남자가, 양 손 가득 주렁주렁 짐을 매달고, 덩치에 비해 턱없이 작은 만화책, 그것도 표지는 반짝이는 종이를 쓴데다가 상반신을 벗은 인어아가씨가 물 위로 몸을 드러낸 만화책을 보며 훌쩍인다면 어찌 보이겠는가? 흉하다, 고 생각하겠지. 아니면 30대 취업난이 심각하다고, 보따리 장사 나가는 오타쿠라 볼지도 모를 일. 의외로 저 쇼핑백 안에는 세일러문 코스프레 복장이 숨어있을지도 몰라, 따위의. 

눈물을 참고 책 날개를 들춰보니 작가 약력에 생년은 없고 월일, 출생지, 혈액형이 적혀있다. 9월 26일생. 나가사키 현. A형. A형 작가일 거라 생각했다. 이런 작품을 그리다니, A형일거라 생각했다. 혈액형별 성격 분류 따위, 전세계에서 한국이나 일본에서만 통하는 거라지만,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지만, 누군가 내게 "혈액형이 뭐예요?"라 물었을 때 "A형요. 대문자 A형이에요."라 답하면 열이면 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들이 A형에게서 보길 기대하는 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 

코다마 유키. <낫 심플>의 오노 나츠메, <허니와 클로버>의 우미노 치카와 더불어 일본에서 요즘 가장 주목받는 여성 작가라는데, 일본어는 전혀 모르고 오직 한국어 쓰기와 회화만 가능하니 일본 사정은 잘 모르겠고. 코다마 유키의 작품이 국내에서 소개된 것도 <백조 액추얼리>에 이어 <빛의 바다>가 겨우 두 권째이니 주목받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만, 작품을 보니 충분히 <낫 심플>, <허니와 클로버>와 함께 놓을만 하다. 잘 살펴보니 국내에서만 책을 겨우 두 권 낸게 아니라 일본 현지에서도 단행본은 두 권 뿐인가 보다. <빛의 바다> 말미를 보니 '이렇게 인생 첫 단행본을 낼 수 있게 돼서 정말로, 정말로 기뻐요.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라 써있다. 아이고, 이런 내공을 지닌 작가가 이런 겸손함이라니. 이런 풋풋함과 겸손함을 지닌 작가가 후에는 바쏘가 아닌 오노 나츠메처럼 얼음공주가 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2000년에 데뷔했는데 2007년에 첫 책을 내다니 사람 자체가 겸손한건가 싶기도 하다. 

오노 나츠메의 작품엔 이국적인 판타지가 매력인데, 한편으론 너무 쿨하고 멋진 이들만 가득해 나같은 얼굴 크고 다리짧은 동양인은 위화감을 느낄 때가 있다. 배경이 현실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흐르지만 등장 인물들이 너무 판타지 같다고나 할까? 반대로 코다마 유키의 작품은 시작부터 판타지다. <백조 액추얼리>는 은혜를 갚기 위해 어여쁜 여인으로 변한 백조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이고, <빛의 바다>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사랑받는 인어들이 등장하니 시작부터 동화와 같은 설정을 갖춘 채 이야기가 흐른다. 은혜 갚는 백조나 포유류과에 속해 아기를 낳는 인어는 분명 픽션이다만, 코다마 유키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마치 내 이야기를 읽는 듯하다. 추억 속 앨범에서 예전 사랑했던 이의 사진이 톡, 하고 떨어진 듯. 코다마 유키가 그린 백조와 인어의 세상은 '옛날엔 그랬어. 백조가 있었고 인어와 사랑을 나눴지.'라 자연스레 고백하게 되는 느낌이다.  

<빛의 바다>에는 알차게 다섯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모두가 가슴이 아리고, 한편으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무도회장에서 즉석만남에 열을 올리며 사랑은 그저 여인을 배 아래 놓는 것, 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본다면 답답해할 이야기들이다. 까짓, 질러 버려. 한번 자빠뜨리면 그만이야! 왜 답답하게 우물쭈물해! 꼬셔 버려, 고백했다 아니면 아닌 거고, 쪽팔림은 순간이지만 밤은 길다, 라 생각하는 마초와 쾌남들이 본다면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바보이고, 속 터진다.  

하지만 비 온 후 길을 걸을 때 행여 산책 나온 달팽이를 밟을까 조마조마하는 사람들, 토끼풀꽃(클로버)로 팔찌나 반지를 엮어보거나 사랑하는 이를 위해 화관을 만들어 본 사람들, 말없이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고 길을 걷는 게 마냥 행복한 사람들, 뜨거운 성관계보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게 때로 더 행복하고 좋은 사람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여전히 두근거리는 사람들, 지금, 사랑으로 행복한 사람들. 그들이 보면 가슴 깊이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었을 때 선물하고픈 사람이 바로 떠오른다면 분명 당신은 행복한 사람일 테고.

겨우 두 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사랑 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코다마 유키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하는 작가를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말 그대로 이 작품은 '순정' 만화이다. 재벌집 아들놈이나 꽃미남 꽃미녀나 8등신, 더 나아가서는 9등신 따위가 나오지 않아도, 이 작품에는 '순정'이 담겨있다. 순정, 명사, 순수한 감정이나 애정. 어느 순간부터 '순정'은 '순정의 공식'이 생겨나며 남자들이 외면하는 만화 장르의 하나가 되었다지만, 코다마 유키의 '순정'은 자신을 내던져 사랑하는 애틋하고 섬세한 이들의 마음결이 어루만져져서 좋다. 남자들은 흔히 순정만화를 보다 '아, 조금 더 가면 이놈이랑 여자 주인공이랑 눈 맞겠구먼.' '얘가 걔지? 결국 셋이서 삼각관계 이루지? 아우, 징그러. 얘네들 인간관계가 왜 이렇게 좁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그 여자만 사랑하고' 라 말하며 완결편을 보지 않고서도 앞일을 예측하는 신묘함을 보인다지만, 코다마 유키의 작품은 충격 대예언이나 앞일 때려맞추기가 통하지 않는다. 코다마 유키의 매력은 관계를 좇거나 얼개와 흐름을 비중있게 두는 게 아니라 '지금 사랑에 빠진 이의 두근거림'을 눈부시게 잡아내기 때문이다.  

아, 이 작품을 보니, 다시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위험한 작품이다. 30대 유부남 아저씨가 사랑이라니. 극도로 위험한 작품이다. 위험한 만큼, 이 작품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적어도 A형 남자를 움직일만한 섬세함과 따뜻함이 있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겨울의 군고구마는 껍질을 까주고, 차가운 귤은 손에 넣어 덥혀주고, 그녀가 장갑을 끼기 전 미리 따뜻하게 품고 있는 그런 순정. 그리고 그녀 옆이 아니라 그녀의 흔적과 발자국을 좇아 어딘가 모서리 뒤에서 가슴을 두근거리던 순정. 

제대로 된 순정을 만났다.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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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해가 떴습니다
장경혜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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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구나 잘 아는 동요, '둥근 해가 떴습니다'가 마치 영화의 OST처럼 그림책 사이로 흐른다. 그림책 <둥근 해가 떴습니다>는 동명의 동요 노랫말에 그림을 덧입힌 책이다. 해서 처음에는 단순한 생활동화로 생각했다. 둥근 해가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 깨끗하게 씻고 유치원에 간다는, 아이의 기상부터 하루의 일과를 보여주는 착하디 착한 생활동화 말이다. 그런데 <둥근 해가 떴습니다>를 보다 보니 생활동화라 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구조인지라 눈에 걸린다. 

예컨대 그림책 전체가 영화의 롱테이크와 같은 시선을 유지한다. 카메라를 방 한구석에 딱 고정시켜 놓고, 그저 필름을 돌리고 촬영한 분량을 통으로 보여주는 듯한 롱테이크. 그림책 글은 노랫말답게 경쾌하게 흘러가는데, 그림책은 내내 어두운 방에 있는 아이와 엄마만을 보여준다. 너무 단조롭고 심심하다. 이건 뭐냐, 예술영화이더냐. 공간적 배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가 누운 방 그대로이고, 시점 또한 변함이 없다. 쉽게 말해 카메라를 방에 고정시켜 놓은 것도 모자라 높낮이 역시 고정불변인 것이다. 다만 줌인, 줌아웃으로 아이와 엄마 얼굴을 화면 가득 채우느냐 멀리에서 잡느냐 정도의 차이. 공간의 전환이 없다보니 색채의 변환 또한 없고, 구도 또한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등장인물 역시 엄마와 아이로 한정되어 있어서 심심하고 단조롭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애니메이션을 보면 3D 입체 영상이 정신 없을 정도로 휙휙 돌아가는데, 독립 예술영화마냥 저예산으로 카메라 한 대에 필름 한 롤로 다 해먹으려 하다니, 이 그림책은 아무리 생활동화라지만 너무 한 거 아닌가 싶다.

  

다시 읽었다. 이 작품이 서울동화일러스트레이션상 대상 수상작이라는데, 필력과 드로잉 선맛은 무척 훌륭하지만 글은 동요에서 가져온데다가 기승전결이나 재미있는 사건도 없는 단순한 생활동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상 수상'이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에야 비로소 이 책을, 수상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만 있었다. 아이가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기에 카메라는 롱테이크가 된 것이고, 작가의 시선은 아이 옆에 붙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일곱 살 진우는 근육병에 걸려 집에서 누워만 지낸단다. 

다시 읽으며, 쉽게쉽게 책장을 넘길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 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와 엄마만의 방. 다른 가족 없이 아이와 엄마만이 아침을 맞는 방. 그 방은, 아침이 되어도 햇볕이 스며들지 않는다. 창을 가로지른 스테인레스 방범창 너머로는 나무의 초록이나 밝은 햇살이 아니라 그저 벽돌로 쌓아올린 담, 내지는 건물 외벽만이 보일 뿐이다. 왠지 마지막 잎새 하나 달랑거릴 듯한 벽돌담. 아이와 엄마는 지하에 둥지를 틀었나 보다. 부족한 햇살을 보충하려는 듯 해바라기 무늬 벽지로 도배한 작고 어두운 반지하 방. 아이가 일어나자 엄마는 TV를 켠다. TV에서는 밝고 경쾌한 동요 '둥근 해가 떴습니다'에 맞춘 듯 여자 아이와 강아지가 나와 이를 닦고 몸을 흔든다. 브라운관 너머에서는 여자 아이와 심지어 강아지마저도 이를 닦는데, 아이는 둥근 해가 떠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 노랫말 처럼 '세수할 때는 깨끗이' '이쪽 저쪽을 닦아'야 하는데, 아이는 꿈쩍도 할 수 없으니 엄마는 세숫대야에 물을 받고 물수건으로 아이의 목을 훔친다.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기에 누구에게도 아이의 얼굴을 보여줄 수 없건만, 엄마는 꼼꼼하게 아이의 머리를 빗질하고, 아이는 머리를 빗겨주는 엄마의 턱을 작은 손으로 사랑스럽게 쓰다듬는다. 세수하고 머리 빗은 모습이 어떠냐는듯, 엄마는 거울을 들어 아이를 비춘다. 거울 속 아이는 세상에서 제가 가장 예쁘다는 듯 사랑스럽고 밝게 웃고 있다. TV속 아이들이 웃으며 춤을 추는 동안, 아이는 꼭꼭 씹어 밥을 먹는다. 누운 자세 그대로, 팬티와 런닝셔츠 차림으로.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가방을 메더니 나갈 채비를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아니, 어머니, 이 애를 혼자 두고 어딜 나간단 말이에요!'라 소리지르고 말았다. 다행히 다시 보니 동요 '둥근 해가 떴습니다'에서 '가방 메고 인사하고 / 유치원에 갑니다. / 씩씩하게 갑니다'라는 대목에 맞춘 엄마의 행동이다. 유치원에 갈 수 없는 아이를 대신하여 가방을 메고 유치원에 가는 시늉을 한 것이니,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가. 엄마는 노랫말처럼 '씩씩하게 유치원에 가는'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 

헛된 희망이나 꿈은, 바짝 마른 낙엽처럼 손아귀에서 부서지기 쉽다. 아이가 병을 이기고 둥근 해가 떴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세수하고 이를 닦는 것은 잡기도 어려운 꿈이거니와, 잡아도 부서져버릴 낙엽과도 같다. 하지만 아이와 어머니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저 막연하게 잘 될 거야, 어찌 되겠지, 하는 자조섞인 웃음, 체념한 웃음이 아니라 진짜 행복을 맛본 이들의 여유있는 웃음이다. 햇볕 한줌 들일 수 없는 반지하 방, 딸칵, 하고 알전구가 켜지면, 아이와 엄마는 마치 알전구를 떠오른 둥근 해라도 되는 양 행복하게 쳐다본다. 어떻게 웃을 수 있느냐고,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느냐고, 우리 모자의 삶에 둥근 해가 떠오를 날, 쨍하고 해뜰 날이 과연 올 거라 믿느냐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도 어색하지 않을 상황에서, 아이와 엄마는 웃는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듯이. 

병든 노모는 자식에게 짐이 될 수 있으나, 병든 자식은 엄마에게 짐이 아니라 죄책감인 한편 살아갈 이유이다. 엄마는 아이를 힘껏 사랑한 만큼 죄책감이 덜어지기라도 할 듯 사랑을 줄 것이며, 죄책감과는 별개로 그저 아무런 이유없이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림책 속 아이는 자신의 몸이 불편해도 사랑에 모자람을 느끼지 않는다. 누워있는 자신을 씻기고, 먹이고, 돌보는 어머니, 엄마의 손길에서 넘칠듯한 사랑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사지가 멀쩡해도 사랑이 없으면 영혼에 욕창이 생길 수 있으나,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 있어도 엄마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아이는 욕창 하나 없이 깨끗한 몸, 그리고 깨끗한 영혼을 지녔다. 엄마와 아이, 둘의 깨끗하고 사랑하는 영혼의 공명은 침침한 알전구마저도 떠오르는 태양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 처음부터 끝까지 롱테이크로 비춰지는 좁고 어두운 반지하 방의 어둠과 가라앉은 색채에 익숙해진 독자의 눈을 아름다움으로 멀게 하려는 듯, 갑자기 눈부신 해바라기 밭이 펼쳐진다. 잘 살펴봐야 보인다. 아이가 휠체어에 앉아 있음을. 그리고 눈치 빠른 분들은 알아채셨겠지만, 이들에게 펼쳐진 건 진짜 해바라기밭이 아니다. 그저 반지하 방에 조금이나마 생기를 불어넣고자 벽에 바른 해바라기 벽지일 뿐이다. 어쩌면 떠오른 해님은 천장에 매달린 알전구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 모자의 눈에는 둥근 해가 떠오른 드넓은 해바라기밭이다. 아무리 삶이 이들을 몰아부치고 벽처럼 가로막아도, 이들은 떠오른 해님을 보며 해바라기 꽃밭에서 웃을 수 있다.

진우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일곱 살 소년입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에 자꾸 힘이 없어지는 근육병에 걸려 

언제부턴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누워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몸이 약해 유치원에 다니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꼭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것이 진우의 꿈입니다.

아빠가 되어, 겨우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결혼을 앞둔 어느 여동생에게 이 그림책을 읽어주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해서 겨우 참았다. 아직 엄마가 안 된 여동생에게 '아저씨 되니 센티해졌수다.'라는 놀림을 받기 싫었는지도.

하지만 그애도 곧 알게 되겠지. 자식 앞에서 한없이 눈물 많은 게 부모이지만, 한편으로 가장 강한 게 부모라는 걸. 나의 상처는 그저 딱지가 앉기를 기다리면 되지만, 내 아이의 상처와 아픔은 부모의 뼈에 불로 지져 새긴 상처와 아픔이라는 걸.  

작가의 말을 빌어 마무리한다. 

이 세상 알 수 없는 것들과 싸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든 분들께 이 책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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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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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안 할 수가 없다. 인정하기 싫었으나.
뱀파이어 소녀의 헌신적 추종자인 남자가 소녀에게 줄 피를 마련하기 위해 죄없는 소년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목을 베고 피를 받는다는 살인 장면이 초입에 나오기에, 이 소설의 첫인상은 극도로 혐오스러웠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장르를 불문하고 힘없는 아이가 학대받고 상처받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 - 특히 아이 - 를 살해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설정이었다. 해서 얼마 읽지도 않고 이 책을 권해준 이에게 혹평을 퍼부었다. 이게 뭐냐고, 뱀파이어 소녀 엘리를 사랑하는 늙은 남자 호칸은 결국 비겁한 변태 살인마와 다를 게 뭐냐고 말이다. 차라리 혈액 은행을 습격하든 자기의 피를 뽑든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엘리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해 봐야 비겁한 변명이라고 말이다. 책을 넘어 책을 권한 이에게도 싫은 소리를 했는데, 너는 너무 로맨티스트라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 게 어디까지일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조폭 영화가 의리니 뭐니 아무리 당의정마냥 감싸고 포장해도 결국 깡패새끼들 얘기 아니냐고, 희생된 아이의 부모 마음이 찢어지는데 사랑 타령이 나오느냐고 윽박질렀다. 심히, 흥분했다.

흥분한 애아빠 독자 앞에서, 책을 권한 이는 조용히 답했다.  

"이 이야기는 어쩔 수 없다고, 정말 괴롭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전 이야기에 설득이 됐어요. 그리고 소녀와 소년의 사랑을 응원해요." 라고.  

두 권짜리 결코 만만치 않은 분량을 끝까지 참고 읽었다. 과연 네가 날 설득하는지 두고보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정말 인정하긴 싫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인정했다. 나 역시, 우정이든 사랑이든 소녀 엘리와 소년 오스카르를 응원한다. 


동화 <빨간 모자>를 보면 빨간 모자를 쓴 소녀는 어머니의 말씀을 안 듣고 늑대 출몰지역인 숲속으로 들어간다. 지극히 계몽적인 목적을 위해 쓰인 이 이야기는, 한 마디로 '남자를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가서는 안 될 길을 가서 늑대 - 남자 - 를 만나, 결국 순결을 잃는다고나 할까? 처녀의 흔적인 빨간 피는, 빨간 모자와 연결되어 섬짓한 구석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뱀파이어 역시 조심해야할 늑대나 남자일지 모르겠다. 불로불사의 몸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희생자를 습격하기 위해선 별 수 없이 창밖에 매달려 '나 좀 들여보내 줘!'라 말해야만 하는 뱀파이어. 상대가 '들어와, 널 초대할게'라 말해야 겨우 상대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가 줄리엣이고 상대가 로미오가 아닌 이상, 남자를 함부로 들였다가는 쪽쪽 빨린 후 내쳐지는 신세가 된다. 그러니 조심해라, 쯤 될까? 해서 전형적인 뱀파이어는 에로틱한 면모가 많다. 순진한 처녀가 냉큼 자기 방에 들일 정도로 미끈한 남자 내지는, 키스마크 남길 엉큼한 눈빛으로 목덜미를 탐닉하는 뱀파이어라. 피가 모자라 헐떡이지만 왠지 끈적이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것만 같다. 

그런데 <렛미인>은 전형적인 뱀파이어 이야기를 부정하고 나선다. <렛미인>에 어울리는 건 <빨간 모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전거 레이서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이다. 결국, 뱀파이어도 '먹고 살자고' 흡혈을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어찌보면 김훈의 <남한산성>일지도. 뱀파이어 소녀 엘리는 '너 같은 애들이 많니?'란 오스카르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아무리 배고파도, 사람이 사람을 물어 뜯을 수는 없다는 일말의 양심 때문에 대부분의 뱀파이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말이다.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뱀파이어에게 에로티시즘과 관음이 빠진 대신 실존이 들어찼다. 그리고 일견 어울리지 않을듯한 뱀파이어의 실존에 대한 고민은, 그저 거리에 나앉아도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사회보장제도가 훌륭한 이야기의 배경, 스웨덴의 그림자 드리워진 상황과 기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알콜 중독자, 약물 중독자, 왕따 소년, 흔한 이혼과 고양이에게 둘러싸인 악취 풍기는 사람. 사람들은 뱀파이어처럼 그렇게 절실하게 삶을 구걸할 필요가 없지만, 절실함을 버린 대신 비루한 삶과 소외를 선물받았다. <렛미인>은 기존 뱀파이어 소설에서 에로티시즘만 빼고 끝난 게 아니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관찰까지 덤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백미는, 뱀파이어 소녀 엘리와 왕따 소년 오스카르의 우정, 또는 사랑이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이 작품은, 뱀파이어의 삶에 대해서도 다큐멘터리처럼 밀착 취재하여 디테일을 살렸지만, 두 소년소녀의 우정과 감정을 바늘귀에 꿴 명주실로 거미줄을 자아내듯 연약한듯, 위태로운듯, 안타까운듯, 하지만 사랑스럽게 풀어냈다. 먹잇감인 인간의 종에 속한 '친구'를 지키고자 하는 엘리와, 자기보다 훨씬 강한 소녀 엘리를 지켜주고자 하는 달팽이집 속의 오스카르. 오스카르는 엘리를 구하고, 엘리는 오스카르를 구한다. 엘리의 정체를 알게 된 오스카르는 <렛미인>에 대해 선입견을 지녔던 나처럼 엘리를 혐오스런 눈길로 바라보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건 어찌할 수 없다.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상대의 공간에 들어간 뱀파이어는 어찌되느냐는 오스카르의 짓궂은 질문에 엘리는 바로, 그 즉시, 초대가 없었음에도 문턱을 넘는다. 온몸으로 피를 쏟으며 힘이 빠져가는 엘리. 다급한 오스카르는 어서 오라고, 환영한다고,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오라고 애타게 부르짖는다. 소년이 소녀의 절실함을 이해 못하고 살인귀, 괴물 취급을 했음에도, 소녀는 소년에게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바다의 깊이를 알기 위해 바다로 걸어들어간 소금인형처럼, 엘리는 오스카르에게 들어가고자 했고, 그를 알고자 했고, 그의 위로와 사랑이 간절했던 것이다.

 
초대받지 못한 엘리
 

렛미인. 들어가도 되겠니? 쯤이다만, 나는 이렇게 읽었다.
내가, 너에게, 다가가도 되겠니? 너의 삶으로, 내가, 들어가도 되겠니? 

뱀파이어보다도 더 끔찍한 인간이라는 괴물이 인간의 탈을 쓰고 판치는 세상에서, 존엄이나 존귀, 인권과는 거리가 먼 지점에서 비루한 삶을 좀먹듯 연명해가는 비겁한 삶 속에서, 살기 위한 본능과 흔들리는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진짜 괴물이 있다. 하지만 인간들 틈에 끼어있는 그 '괴물'은 오히려 더 '인간적이기에' 아련하다. 뻣뻣한 종이 책장에 여린 손가락을 베인듯 엘리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쓰리고 안타깝다. 오스카르와 엘리가 우정인지, 사랑인지 애매하게 만드는 엘리의 정체성, 상처 역시, 쓰리고 안타깝다. 위선과 거짓으로 상대의 삶에 발을 걸친 듯 하지만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온몸으로 피를 쏟아낼 지라도 너에게 다가가겠다는 소녀가, 너무 안타깝고 애틋하다.  

혐오와 선입견으로 시작했지만 괴물에게서 인간을 배웠다. 외로움 속에서, 거절당함의 두려움을 안고서 창밖에서 떨고 있는 소녀, 또는 뱀파이어에게서.

나는, 그녀만큼 절실한가? 삶이, 사랑이, 세상이, 그녀만큼 절실한가?

렛미인. 
내가, 당신에게로, 들어가도, 될까요?

피흘리는 엘리의 그림은, 영화 <렛미인>의 엘리가 아닌, 제 이미지 속의 엘리를 그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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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꼬마 뻐드렁니가 뭐 어때
패티 로벨 글, 데이비드 캐트로 그림, 정미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 책의 주인공 몰리는 모든 어린이책의 주인공 중 가장 못생겼다. 그리고 가장 작고(엄지공주 등 특별한 케이스 말고, 인간 주인공 중 말이다), 게다가 치열도 형편없는 희한한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 형편없는 외모의 아이는, 서글프게도 '여자 아이'이다! 뭐 대충 동화라는 거 들춰보면 피부는 하얀 눈처럼 보드랍고 눈부시며 입술은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처럼 붉다느니 뭐라느니 공주로 태어난 여자아이 외모 묘사에 한 페이지가 훌렁 날아가는데, 우리의 주인공 몰리는 동화작가의 '외모에 대한 묘사' 부분은 건너뛰라고, 어디 가서 천천히 차나 한잔 마시고 오라고 주인공이 작가의 등을 떠민 듯하다. 이런이런, 이런 외모로는 일곱 난장이의 시중은 커녕 몰리 혼자 일곱 노동자의 시중을 친히 거들어야할 비주얼이다. 왕자의 입맞춤은 커녕 '공주를 납치한 괴물' 쯤으로 오인받아 공격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떻게 애들 보는 그림책에 이토록 흉측하고 못생긴 애가 주인공일 수 있담!!!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 책의 주인공 몰리는 모든 어린이책의 주인공 중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에 속한다. 어느 정도냐면, 삐삐 롱스타킹에 버금갈 수준이라고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몰리, 아주 매력적인 아이다. 도대체 왜 '가장 작고', '뻐드렁니에', '목소리는 도살장에서 울려오는 짐승의 메아리' 같은 몰리가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 이유는, 몰리의 멘토인 할머니의 지혜로운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따르며 스스로 빛을 발하는 자존감 충만 몰리의 생명력에 있다. 예컨대 '일 학년 중 가장 작고 심지어 강아지만 한 몰리'에게 할머니는 '씩씩하게 걸어라'라고 말씀하신다. 왜냐, 씩씩하게 걸으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몰리를 우러러볼 테니까. 

그리고 몰리는 걸었다. 씩씩하게. 할머니의 말씀처럼.  

몰리는 확인한다. 할머니의 말씀이 옳았음을. 사람들,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몰리를 우러러본다. 이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 
할머니의 지혜로운 격려와 가르침 덕에 몰리는 자신의 단점마저도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승화시킨다. 목소리 좀 깨지는 듯하면 어때? 몰리는 노래 부르는 걸 '즐거워하며', 더욱 목청을 높이고 더욱 당당하게 노래를 부른다. 순도 높은 즐거움이 담긴 몰리의 노래는 밤하늘 아래 수많은 이들을 청중으로 불러 모은다. 몰리의 무대, 온전히 몰리가 장악하며 몰리가 주인공되는 무대. 자신감은 자신감을 낳고, 자존감은 인파 속에서 스스로를 빛이 나게 한다. 발광생물이나 반딧불이처럼, 몰리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힘으로 자신을 빛으로 휘감는다. 노래면 노래, 걸음걸이면 걸음걸이, 환한 웃음이면 웃음.

심지어 몰리는 전학간 학교마저도 자신의 무대, 자신의 세계로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호시탐탐 빈틈과 놀려줄 거리만 찾던 새로운 학교의 터줏대감 소년마저도, 몰리의 당당함과 매력에 흠뻑 빠져 수줍은 듯 친구하자며 손을 내밀게 된다. 환경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지만, 몰리가 바뀌었고 몰리가 움직였기에 결국 세상 모두가 움직인 셈이다. 몰리를 골탕먹일 궁리만 하던 소년과도 친구가 된 날 밤, 몰리는 종이와 연필을 꺼내 할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할머니

할머니 말씀이 다 옳았어요!

사랑스러운 소녀 몰리 올림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런가? 사랑스러운 손녀 몰리의 편지를 읽는 할머니 역시, 강아지보다 더 작은 키에 몰리와 판박이 외모를 지니고 있다. 이건 뭐 영락없는 '늙은 몰리' 되시겠다. 아하, 이쯤 되자 무릎을 치게 된다. 할머니 역시 작은 키와 못생긴 외모, 결코 달콤하지 않은 음성을 지녔지만 당당하게 걷고 활짝 웃으며 즐거이 노래를 불렀기에 세상의 중심이 되고 세상이 할머니의 무대가 되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인생, 뭐 별 거 있나. 생각대로 살면 되지. 처음 시도, 처음 노력은 주변의 비웃음감이 되기에 딱 좋다 해도, 무슨 상관이냐. 인생은 길고 무대는 넓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데, 누가 웃건 무슨 상관이람. 나는 나를 이토록 예뻐하고 있는데.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은, '도대체 저 친구의 매력이 뭘까? 잘 모르겠지만 끌린단 말이야!'라 생각하게 만드는 비밀스러운 힘이다. 일도 사랑도, 관계도, 일단 나 자신이 나를 사랑하는 '사랑의 힘'에서 비롯된다. 몰리처럼, 몰리의 할머니처럼, 당당해라. 내가 나를 믿고 나를 보증한다는데, 안 될 게 무어냐, 까짓. 나를 사랑하는 내가 그 힘으로 너를 사랑한다는데, 그보다 더한 사랑이 어디 있단 말이더냐, 당신.
나를 찾으면, 그때부터 비로소 우주의 톱니바퀴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니 사랑하자. 나를, 소중한 너를.

덧붙임>책의 표지를 보자. 몰리는 누가 흘리고 간 물건인 양 땅꼬마에 못생긴 소녀이지만, 그 그림자만큼은 책을 훌쩍 벗어날 만큼 크고 길다. 밝은 풀밭에 서있지만 유독 몰리의 그림자만 크고 길다. 그리고 그 그림자 뒤로 유독 눈에 띄는 민들레 홀씨와 나비 한 마리가 보인다.
당당한 자는 비록 작은 체구를 지녔을 지라도 그 여유와 인덕은 세상을 덮기 마련이다. 그의 날개 아래 꽃과 나비는 모여들고, 민들레 홀씨가 가녀린 몸을 날려 세상에 퍼지듯 여유와 사랑은 퍼져나가기 마련이다.
어린이책, 특히 그림책은, 그림과 글로 참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림책은 보면 볼수록 신비롭고 재미난 장르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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