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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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작가가 되신 거죠?"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미싱을 했어요. 밤낮없이 일해 19만 원을 벌었죠. 그런데 어느 누군가가 제 글을 출판사에 보냈는데, 실어주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집에 전화가 없어서 우편으로 말이에요. 그리고 원고료를 입금할 테니까 계좌번호를 알려달라했죠. 60만 원이 들어왔어요."
"......"
"40만 원으로 작은 방을 얻고, 남은 돈 얼마로 상을 샀어요. 그전까진 밥상이 없어서 바닥에 찬을 펼쳐놓고 식사했거든요. 그래서 밥상 위에 뜨거운 밥과 찬을 차려놓고, 아이들 앉혀 놓고 얘기했어요. 살 길이 생겼다고."
"......"
"글쓰기를 그만두면, 전 다시 미싱을 할거예요. 글을 쓰는 '작가'라 부름받고 있지만, 전 독자 앞에 서기가 여직 부끄러워요."

공선옥. 독자 앞에 서기가 아직도 부끄럽다는 소설가 - 아니 전직 미싱사 - 의 이름.
하지만 독자인 나는,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또한 부끄럼타는 전직 미싱사의 작품인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또한, 부끄럽지 않다. 아니, 자랑스럽다. 
어느 누군가는 왜 하필 다시 광주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담 나도 반문을 해보자. 불경기니까 말랑하고 가벼운 이야기를 써도 팔릴까 말까한 판국에 왜 무겁고 우중충하고 심지어 '트렌드'에도 뒤쳐지는 광주가 왜 다시 얘기되는지, 반문해 보자.
"그들이 겪었던 슬픔이 잊혀졌을까? 그들이 뿌린 피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우리는 깨끗하고 공평하며 수평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라고 말이다.  

하지만 또 어느 누군가는 받아 치겠지. 무슨 전당포에 물건 맡기듯, 한국 문학은 툭하면 과거에서 이야기를 끌어올린다고, 무슨 동네 어귀 공동 우물도 아니고, 이놈 푸고 저놈 푸고 두레박이 닳겠다고. 그토록 시대에 빚을 져서 언제 빚더미에 이자 청산한 후 번듯한 살림을 차릴 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저 억압의 세월을 영감의 화수분쯤으로 알고 전축에 흘러간 노래를 걸어놓듯 그 타령이 그 타령이라고 할지도. 일본 소설 봐라, 얼마나 트렌디하고 소재 다양하면 원 소스 멀티유즈의 표본이 되어 애니메이션으로,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냐고 말이다.  

깨끗하다면, 그 피에 떳떳하다면, 우리 작가들이 왜 다시 이야기를 꺼내겠는가. 그 어렵다는 한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글쟁이들이 대한민국에 수두룩한데, 왜 새로운 레퍼토리를 꺼내들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덮어지고 가려진 게 너무 많다. 때가 많고, 우리는 떳떳하지 못하다. 

"전 집을 사지 않을거예요. 그리고 출판사에겐 미안하지만, 이 책이 많이 안 팔렸으면 좋겠어요. 권력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권력에 대항해야 하겠지만,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건 자본이니까, 자본에 저항할 거예요."
"(처자식 딸린 가장인 저는)어떻게든 아파트 한 채 장만하는 게 나름 목표인데요. 제가 너무 속된 건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사람마다 길이 있고, 길은 다른 거예요."
"......"
"이 책에 나온 죽어간 아이들, 모두 제 곁에 있던 아이들이에요. 이름도 생전의 이름 그대로구요. 죽은 이들의 이름은 실명이에요. 오로지 살아남은 자들만 가명을 썼지요. 행여 이 책이 100만 부 쯤 팔린다 해도, 저는 인세를 통장에 넣어만 두고 꺼내 쓰진 못 할 거예요. 가장 예뻤던 시절에 죽어간 내 친구들을 생각한다면, 그 돈을 쓸 수 없어요."
"......"
 

죽은 자들은 이름으로 살아 제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산 자들은 가명 뒤에 숨어 소설 속에서도 자릴 피한다. 죽은 자의 무덤은 양지 아래 새순이 돋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그늘 아래에서 햇볕 아래 누운 자들을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탓도 하다가, 다시 자신의 가슴을 친다. 전직 미싱사의 친구는 다친 시민들을 위해 헌혈을 하러 가다 총탄에 맞아 숨졌고, 바로 곁에서 그 피를 뒤집어 쓴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사랑하고, 결혼을 하는 '이상한 세상'을 탓하며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고 동네에 플랭카드까지 걸렸던 똘똘했던 친구 또 누구는, 고문 후 아비 어미 손목 한번 못 잡아보고 생이별하듯 군대에 끌려간다. 군대에 끌려간 이의 후배 누구는, 고문을 받다 사망한다. 그리고 이쯤에서 유행어 하나 나와주신다.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습니다."라는. 그리고 군바리된 그친구, 휴가를 불과 얼마 앞두고, 밭일하는 노모와 똘똘한 아들을 둔 것을 평생 자랑으로 삼는 애비를 놔두고, 그 똘똘하던 아들은 제 손으로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다. 그게 80년대, 20C의 일이다.  

그리고 21C,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는, 정권이 바뀌면서 간판을 내렸다. 메뚜기도 한철, 닭갈비도 한철, 인권도 한철. 정권이 바뀌면 작년에 샀던 수영복 따위는 의류 수거함에 던져 버리자. 아무리 노릇노릇 선탠을 잘했든, 아랫배에 칼로 그은듯 복근, 식스팩을 새겼든 간에, 정권이 바뀌면 유행이 바뀌고 작년에 입던 옷 따윈 버려 버려야 한다. 그런 것이다. 인권 역시 유행인 것이다. 죽은 자는 말만 없는 게 아니라 돈도 없다. 왜 자본에 저항하겠다고 하는지, 녹색 개발로 온 국토에 땅투기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이가 집권한 이 시기에, 왜 집을 안 사겠다고 전직 미싱사가 말하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죽은 자가 단순히 말만 없고 돈은 있었더라면, 아니면 땅이 있었더라면. 아마도 달라졌겠지.  
 

"왜, 왜, 니가 미안한 건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건데? 진짜 미안해해야 할 사람들은 가만있는데에, 왜, 왜 그러는 건데에." _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본문 76쪽

"나 말고 다른 사람 때문에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답지. 자신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더 아름다워질 거야. 그러니까 너도 아름답구나." _본문 211-212쪽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슬픔과, 아픔과, 기다림과, 추억과, 회한이 담긴, 그러니까 인생이 담긴 이야기다. 80년 광주가 소재가 되었다지만, 광주의 그날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을 모아봤자 몇 쪽, 몇 줄이나 될까. 그러니까 이것은, 살아남아 가명을 쓰는 자들이 죽은 자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 시절, 그 후의 인생을 담은 이야기이다. 
 

"우리는...... 아직 좀더 흔들려도 좋을 때잖아."만영은 승희로 인한 가슴앓이를 조금 더 해야 될 모양이었다. 그렇게 가슴앓이도 하면서, 이곳저곳으로 떠돌기도 하면서, 바람 앞에 선 들꽃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기도 하면서, 그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청춘은 조금씩 단련되어가리라. 기필코 살아서 경애, 수경이, 승규 몫까지 굳세게 살아서 마침내 아름다워지고 말리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눈물을 거두고 조용히, 그리고 힘차게 건배했다. _본문 300쪽 

그렇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 남아서, 굳세게 살아서, 마침내 아름다워져야 한다. 좀더 흔들려도 좋을 청춘들에게 던지는, 책의 막바지에 담긴 전직 미싱사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미싱 페달 언저리에 떨어진 자투리 천조각처럼, 비루하나마 그게 희망이다. 그리고 솔기 터진듯한 그 희망에, 청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견디고, 오늘을 완성한다.

공선옥 작가님과의 대화는, 2009년 5월 30일(토)에 열린 출간 기념 사인회 직후, 뒤풀이에서 오고 간 내용을 간추렸음을 밝힌다. 겸손하고 조용히 말하는 작가님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 자리에 술이 있었으나, 나는 취하지 않았다. 다만 기억이 짧아 순간의 기억들을 모두 다 옮겨오지는 못했다는 것 역시 밝힌다. 그 자리에선, 그토록 심장이 뛰고 피가 들끓어 올랐는데.
...... 

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출간 기념 사인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다음날이었다.   

기억이 짧더라도, 잊지는 말자. 감정적이 되지도 말자. 우리는 다만 가명 뒤에 숨어 실명으로 스러져간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흘린 피에 당당해지자. 그리고 그날이 오면, 트렌드를 선도하고,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이든 영화든 뭐든 얼마든지 만들어도 좋은 재미난 이야기를 쓰자. 그 피에 당당해진 후에, 권력에 의해 타살된 수많은 영혼의 헤아릴 수 없는 피에 당당해진 그날 이후에, 맘껏 웃어도 좋을 재미난 이야기, 100만 부 쯤 팔아치운 후 통장에서 맘껏 돈 꺼내다 쓸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쓰자.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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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 사무라이 1
마츠모토 타이요 글.그림, 에이후쿠 잇세이 원작,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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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사내들이 손과 발을 맞부딪혀 승부를 겨루는 격투기를 좋아한다. 이 녀석 마초인가, 라고 섣불리 넘겨짚지 마시고 얘길 들어주시라. 링 위에 오르면 목표는 오직 하나 뿐. 승리. 승리를 위해 평소 흘린 땀과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고, 토악질이 나올 때까지, 물 밖으로 내쳐진 금붕어처럼 숨이 깔딱깔딱 차오를 때까지 치고, 차고, 두들겼던 노력은, 링 위에서 진실되게 돌아온다. 내가 나의 훈련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설사 패자의 위치에 서도 부끄러울 게 없다. 방금 전까지 죽기 살기로 치고받던 사내들은 경기가 끝나고 친구가 된다. 솔직담백하고 얼마나 깨끗한가.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한 무도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가장 빠른 길, 가장 강한 길을 찾아 손을 내지르고 발을 뻗는다. 직선으로 내리꽂히는 주먹, 허공에 곡선을 그리며 꽂히는 발. 손발이 그리는 선과 곡선은 간결하고 빠르기에 단단하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선의 아름다움으로는 검의 길을 빼놓을 수 없다. 무협영화 등을 보면 폴짝, 하고 집도 뛰어넘고, 허공에서 칼을 주고받고, 칼질하다 말고 몇바퀴씩 돌고 그런다지만, 그건 영화일 뿐이고. 실제 검을 뽑아든 상태라면, 진검을 든 상태라면, 눈짓 하나 손짓 하나 차이로 내 팔이 잘려나가고, 내 목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 칼을 마주했을 때는 글러브나 헤드 기어를 쓴 게 아니고, 호구를 착용하고 죽도를 든 게 아니므로, 오직 살고 죽는 길, 간결하고 간결하여 베거나 베이거나, 찌르거나 찔리거나, 두 길밖엔 없다. 멋이 깃들 틈이 없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에, 검이 그리는 선과 길은 탄복이 나올만큼 강하고, 아름답다. '발도'만 해도 어떤가. 쉽게 말해 그저 허리춤에 찬 칼집에서 칼을 꺼내는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상대의 발도를 내 눈으로 보았다면, 아마 바닥에 뒹구는 머리에서 쳐다본 것일 터다.

여기, 마츠모토 타이요가 그려낸 작품이 하나 있다. <죽도 사무라이>.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이 작품은 극강의 발도술과 같다 하겠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펜을 뽑았고, 펜을 뽑은 것을 본 순간 나는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숨이 제대로 끊어졌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자신의 실력과 작품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도 확신에 찬 인물이니까. 베인 자리는 깨끗하고, 내 몸은 베였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여 잘린 혈관은 두리번 두리번,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였다가 비로소 상황을 파악하고 곧 피분수를 뿜는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혈진(피털기)를 하고 있다고나 할까.  

현대물, 그중에서도 <핑퐁> <제로> <하나오> 등을 통해 탁구, 복싱, 야구 등의 스포츠와 그 중심의 천재들을 다뤘던 마츠모토 타이요가 시대극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적잖이 우려를 했던 게 사실이다. 검을? 검 이야기를? 마츠모토 타이요가 에도시대 사무라이를 그린다고? 그가 나르시시즘의 극한에 선 듯한 천재 만화가라는 것은 인정하겠다만,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한국어판으로 소개된 <죽도 사무라이>를 접하고 나서, 이 작품은 마츠모토 타이요의 검류, 예컨대 '마츠모토 타이요류'라고나 할까, 하나의 검류를 완성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의 선맛과는 완전히 다른 붓과 먹을 활용한 흐르는 듯한 그림은 농익을 데로 농익었고, 화면 연출과 구성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효과음 등을 컴퓨터 서체가 아닌 손글씨로 새로 써 넣은 출판사의 노력에도 박수를 보낸다. 

<죽도 사무라이>, 이런 책은, 받아드는 입장에서는 행복에 겨웁지만, 어떤 말과 어떤 찬사를 갖다붙여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칼을 뽑지 않아도 이미 칼에 베였다는 느낌이랄까. 마츠모토 타이요가 개척한 또 하나의 신천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분께 권한다. 후회는, 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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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릭 Kubrick 1
강도하 지음 / 애니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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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에 <보물섬>에서 신인만화가상을 받으며 데뷔.
본명인 강성수로 작품을 발표하며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제1세대'로 불림.
웹사이트에 2004년부터 '위대한 캣츠비' 연재,
웹만화 연출과 형식의 혁신적인 발전을 불러옴
<위대한 캣츠비>가 뮤지컬, 드라마로 제작되며 영화 판권 또한 계약된 상태
미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 청춘 3부작의 판권 계약 체결
대한민국 만화대상과 오늘의 우리만화상, 독자 만화대상 수상.
<풀하우스>로 유명한 대한민국 대표 순정만화가 원수연 작가의 남편.
젊은 만화가들이 존경하는 만화가이자 듬직한 형님.

 

만화가 '강도하'를 얘기하자면 수식어가 자연 화려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화려함의 핵심에는 강도하의 '청춘 3부작'이 있다.

'3부작'은 시리즈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자 단단한 숫자이기에 문화예술계에서 심심찮게 3부작을 접할 수 있다. 일례로 영화판에는 박찬욱의 복수 3부작 -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가 있고, 문학판에는 공지영의 위로 3부작 - <즐거운 나의 집>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괜찮다, 다 괜찮다>가 있으며, 만화판에는 강도하의 '청춘 3부작 - <위대한 캣츠비> <로맨스 킬러> <큐브릭>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다. 

 

청춘 3부작의 출발 _ <위대한 캣츠비>     

<위대한 캣츠비>는 연재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에피소드 위주의 가벼운 웃음이 만개하던 '웹툰'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완벽하게 짜인 서사와 영화를 능가하는 감각적인 화면 연출, 명대사 열전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제된 대사, 직립보행하는 동물들이 인간 캐릭터로 등장하여 나누는 사랑과 배신과 고통은 청춘을 겪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환호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본명인 '강성수'로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시절과 달리 '강도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선보인 그의 작품 <위대한 캣츠비>는 적당한 진중함과 트렌디한 감성, 젊고 세련된 감각으로 대중들의 시선을 끌고 입맛을 사로잡았다. 한마디로, 무겁고 진지하되 충분히 대중적인 요소를 지닌 작품이 바로 <위대한 캣츠비>였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 <위대한 개츠비>가 사랑에 미친 개츠비의 순정을 다뤘다면, <위대한 캣츠비>는 고양이 캐릭터 캣츠비의 사랑과 흔들리는 청춘을 담았다 하겠다. 

완벽한 짜임새와 웹상에서의 폭발적인 지지를 통해 <위대한 캣츠비>라는 콘텐츠는 당연하게도 여러 장르에 접목되었으며, 대중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수작에 대한 관심 또한 급증, 문화 예술의 다방면에 판권이 계약되며 뮤지컬, 드라마로 제작되어 호응을 얻었다. 구체적인 일정은 알 수 없으나 영화화 또한 진행 중이라고 한다. 케이블 TV에서 상영된 <위대한 캣츠비>에선 매주마다 외박하는 야생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창 인기몰이를 하는 가수 'MC몽'이 '캣츠비'로 열연하기도 했다.

강도하의 진화, 또는 언더그라운드로의 회귀 조짐
청춘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_로맨스 킬러

<로맨스 킬러>는 청춘 3부작 중 서사의 짜임이나 개연성에 있어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대한 캣츠비>때 보여주었던 강도하의 명성과 대중의 호응도가 조금씩 하향 곡선을 그린 시발점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예전에 사석에서 강도하 님과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 강도하 작가님은 당시 모 방송의 교양 프로그램 심사위원으로 방송에 격주 출연 중이셨는데, 어찌어찌 나 역시 그 방송에 출연자로 예닐곱 차례 출연한 게 인연이 되어 녹화 후 술자리에 함께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말 그대로 '기회'가 아닌가. 애독자로서 작품에 대한 얘길 나누다가 무례하게도 이렇게 여쭈었다.


"작가님 작품을 보면 요즘은 예전의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강성수'로 회귀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주의와 완벽주의를 추구하시는 건 독자로서 환영인데, 구름 위로 올라가신 듯해 일반 대중에게 어필하는 면에선 아쉬움이 있어요."라고 말이다. 이런 당돌함이라니, 순전히 쐬주의 힘이다. 
그런데 작가님께서는 의외로 담담히 - 화도 안 내시고 - "저도 요새 고민이에요."라고 겸손히 말씀하셨다. 한마디로 '락발라드'로 대중의 인기를 얻은 대중가수가 실은 '락'을 하고 싶었기에 정규 앨범 2집을 락으로 꽉꽉 채워 넣었는데, 대중은 여전히 '락' 스러운 '발라드'를 원한다고나 할까? mp3가 지원하는 음역과 깊이는 한정되어 있고 사람들은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약속에 늦는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지루함을 달랠 달콤하면서도 적당히 있어보이는 노랠 원하는데, 강도하의 노래는 mp3가 감당할 수 없는 음역과 깊이를 지녔다는 게 맞겠다. 

하지만 그의 만화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초반에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화롭기까지 한, 이웃집과도 같은 평온함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바로 치명적인 함정이다. '강도하표 반전'이라 불릴법한 '막판 뒤집기'가 슬슬 드러나는 후반부엔 따라가기에 숨이 차오를만큼 이야기가 스피디하게 진행되며, 그 '반전'은 10년 동안 사용하여 거뭇한 손때가 묻고 심지어 칼자루가 손에 맞게 변형된 날카롭고 빛나는 회칼로 옆구리를 저며내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옆구리의 살점이 너덜해지고 자신의 창자를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하게 된 그 순간에야 비로소 독자는 '아, 초반의 평온함과 반복되는 일상이 사실은 치밀한 계산과 미칠듯한 폭풍우의 전조였구나'라고 알아차리게 된다. 

내공이 부족한 창작자들의 '반전을 위한 반전', 개연성이 떨어지는 반전을 '그저 시적 허용'정도로 얼버무린 채 밑도 끝도 없는 극단적인 상황을 제시하고 독자를 코너에 몰아붙이는 얄팍한 수쓰기를 반전이라 생각하는 무리와 강도하의 반전이 차원을 달리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강도하의 반전은 모래늪과 같아 단단한 일상이라 여겨 발을 딛다 보면 어느새 절망과 고통의 수렁에 온몸이 빨려들어간 것을 뒤늦게야 발견하게 된다. 강도하의 세계는 치밀하고 단단하여 엉킨 올을 풀어낼 수가 없으니, 가장 빨리 빠져나오는 길은 모든 매듭을 단칼에 쳐내버리는 길 뿐이다. 하지만 반전이라 불릴만한 아픔과 상처를 낳게 한 현실을 어찌 단칼로 잘라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단칼로 자를 수 없고 한올 한올 풀어가며 사는 게 인생인데, 그렇게 단단히 엮여 수면 위로 떠오른 현실이 강도하의 결말이 주는 아픔인데 어찌 단칼로 자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반전'이라는 어휘는 적당치 않다. 강도하는 그저 삶과 상처와 고통의 원인과 결과만을 보여줄 뿐이지만, 그 무게감과 충격이 너무 강해 '반전'이라 말하며 벗어나려는 것이 아닐까? 현실로 받아들이기엔 가슴이 너무 아프니, 그저 '반전'이라 여겨버리면 부담감과 현실의 무게가 줄어들지도 모른다. 아주 잠깐동안은.  


  

<로맨스 킬러> 본문 중

<위대한 캣츠비>에 열광했던 수많은 네티즌들이 충성독자로 남아 <로맨스 킬러>를 지켜주지 못한 것은, 더 완벽한 반전을 위한 사전 포석의 과정, 이야기의 초입이 느린 걸음을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 '킬러'가 주인공인데 하는 일이라곤 꽃집을 운영하는 부인 옆에서 셔터맨 노릇이나 하는 듯하고, 딸 친구의 허연 허벅지를 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숨기지 못하니 영 못미덥지 않은가? 멋지게 총질 좀 해주고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면 좋으련만. 이게 무슨 킬러 중의 킬러 '로얄'이더냐. 살인면허증이 아니라 장롱에 처박힌 1종 보통 운전면허보다 못할 지경이다. 현역 시절에 사용하던 권총을 땅에 고이 묻어둔 '한 때 최고였던' 킬러라니. 땅에 총을 묻으면 기관총이라도 주렁주렁 열린단 말이냐. 아, 마우스 클릭질 못하겠다. 길고 긴 스크롤을 내렸는데 오늘도 원조교제스러운 이야기냐, 사랑에 빠진 킬러는 그저 두부처럼 물렁하기만 하다. 그러니 난 떠나련다. 이런 식으로 독자들이 떠나간 게 아닐까? 하지만 떠난 그들은 모를 것이다. 손이 끊어진 애송이 킬러와 '로얄'의 복귀, 사랑이 되어버린 우정과 그 우정의 배신, 아내의 과거와 상처, 피투성이의 슬픈 결말을. 




청춘 3부작의 완결, <큐브릭>의 표지 이미지. 좌측부터 <큐브릭>1권, 2권, 3권이다. 

청춘 3부작의 완결, 완벽한 장인으로의 거듭남 - <큐브릭> 

렇다, 어디에서 본 적 있다. <큐브릭>의 표지는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 '애비 로드'의 재킷 이미지를 차용했다. 애비 로드는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이자 가장 잘 구성된 앨범이라 평가받고 있으며, 또한 비틀즈 멤버들의 불화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의 작품이기도 하다. 애비 로드의 재킷은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패러디 되기도 했다.
 

억지 춘향이긴 하겠다만, 애비 로드의 앨범 재킷을 차용한 <큐브릭>은 강도하 '청춘 3부작'의 완결작이며, 가장 깊은 슬픔을 담고 있으며, 대중과 아티스트 강도하와의 간극이 가장 멀어진 작품이라 말할 수 있겠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 3부작'의 첫 작품인 <복수는 나의 것>의 실패를 뒤로 하고 <올드 보이>를 통해 멋진 성공을 거두었다는데, 강도하는 '청춘 3부작'의 첫 작품 <위대한 캣츠비>를 통해 화려하게 등장하여 마지막 작품인 <큐브릭>으로 쓸쓸한 뒷모습을 보였다 할 수 있다. 물론 <큐브릭>의 완성도는 최고다. 하지만 일상에 쓰이는 그릇은 놋그릇이나 막걸리 사발, 국그릇인데, 강도하는 <큐브릭>을 통해 국보급 청자를 만들어 버렸다. 청자는 박물관에 있을 물건이고, 우리의 일상에서 쓸 막그릇과는 거리가 멀다. 청자를 만든 장인은 뿌듯할 터이며 도공들은 그를 우러러 보겠지만, 백성들은 오늘도 막걸리를 받아올 양은 주전자나 남은 반찬과 찬밥 말아 쓱싹 비벼먹을 막그릇을 원한다. <큐브릭>이 우러러볼 완성도에 비해 널리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이다.

<큐브릭>은 청춘 3부작 중 앞선 두 작품에 비해서도 초반 몰입력이 다소 떨어진다. 금니 빼고 점 하나 찍은 다음 "저 그 여자 아닌데요?"라 말하며 복수의 칼날을 가는 막장 드라마의 속도에 익숙해진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더디다. 말도 안 되는 스토리의 막장 드라마 속도는 인정할 만한데, 완벽한 구성의 수작은 오히려 느리다 폄하된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토끼가 빠르고 거북이가 느리다 탓하면 될일인가? 토끼는 뜀박질도 빠르지만 교미도 빠르게 끝나지 않는가? 거북이는 좀 느린 듯해도 등껍질로 점치는 데도 쓰고 갑골문자 운운하며 교과서에도 등장하고, 느린만큼 장수의 상징이라 여겨져 여러모로 쓸만한 녀석인데, 왜 토끼의 빠른 뜀박질에만 주목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자, 웹에서 연재할 때 댓글 수 좀 적고 페이지뷰 좀 적으면 어떤가. <큐브릭>을 접하면 왜 이 작품이 '청춘 3부작'의 완결편임을 알 수 있다. 완결편인 만큼, 청춘 1,2부작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한다. 3부작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청춘'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를 온전히 접하려면 순서대로 차분히 읽는게 좋겠다. 그렇게 순서를 따르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도 좋겠다. <큐브릭>에 등장하는 열아홉, 스물의 청춘들을 이해하고 보듬기 위해선, 그러는 게 좋겠다. 

네 명의 청춘 캐릭터는 각자의 쓰라린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데, 극화체의 세심한 그림과 달리 그들의 과거와 상처를 설명하는 장면은 조악한 명랑만화처럼 일부러 헐렁하게 표현되어 있다. 믿고 싶지 않고 부정하고만 싶은 과거의 상처들은 오히려 밝고 가벼운 명랑만화 스타일의 그림체와 극단의 대비를 이루며 더 깊은 슬픔을 끌어낸다. 외면과 상처는 계속되고, 그들의 사연을 알게 된 이상 책 너머 독자는 더이상 한가한 독자가 아니다. 독자 역시 상처투성이의 청춘인 미우이자, 소영이이자, 수경이자 독우이다. 살 거죽이 벗겨져 쓰린 상처에 솔솔 소금을 뿌린듯 <큐브릭>을 만난 후엔 가슴이 아파온다. 결론을 향해 치닫게 되면 될수록, 그들이 외면하고자 한 현실과 상처는 성큼성큼 그들 눈 바로 앞으로 다가온다. 벗어날 수 없다. 지워버릴 수도 없다. 그들의 사연을 말하는 것은 <큐브릭>을 접한 독자들에게 실례이자 스포일러 짓이 될 듯하니, 책장을 다 덮은 후에도 아픔과 눈물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고만 해두자.

......

큐브릭은 팔다리와 머리, 몸통이 분해되는 작은 인형, 장난감의 한 종류이다. 다른 큐브릭을 데려와 팔다리를 끼워 맞춰도, 그들은 서로 이종배합되듯 교차되고, 서로를 공유한다. 청춘의 삶에 그 어떤 상처나 이물질이 끼어들어도 청춘은 여전히 큐브릭이며, 또다른 큐브릭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공유한다.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삶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며,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청춘은 불완전하지만 아름답고, 그렇기에 불완전하며 아름다운 또다른 청춘을 위로할 수 있다. 청춘에는 그런 힘이 있다.

땅바닥에 버려진 큐브릭 조각들이 마지막에 하나의 조합을 이루어 완전체가 되고, <큐브릭>은 희미하나마 생명력이 충만한 희망을 보이며 끝을 맺는다. 마치 <위대한 캣츠비>에서 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을 가슴과 사랑으로 품은 캣츠비의 눈에 맑은 하늘이 보였듯이 말이다. 달동네 창문 너머, 고층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간신히 걸린 삼각형 모양의 기하학적 하늘, 한 뼘 크기의 하늘일지라도, 청춘에겐 눈부신 파랑이자 희망인 것이다. 밑변과 높이가 만나 면적을 이루는 삼각형, 조그만 하늘의 희망빛처럼, 큐브릭은 상처와 아픔도 청춘을 완성시키는 조각이자 서로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사랑하는 힘의 완성과 결합이라 말하고 있다. 

초승달은 처연하지만 아름답다. 점점 살이 차올라 세상을 받아들이는 원, 보름달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청춘은 불완전하고 비루하지만 아름답다. 보듬어줄 청춘과 오늘보다 조금은 더 나아질 내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끝과 세상의 바닥을 보여주는 강도하의 청춘 3부작이 그저 슬프게만 남지 않는 것은 초승달 같은 청춘의 시린 아픔과 아름다움, 초승달에서 보름달을 보는 희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청춘들에게 그대들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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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노니는 집 - 제9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0
이영서 지음, 김동성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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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다. 텍스트와 일러스트의 조화가 완벽하다. 근래에 이토록 완성도가 높은 책을 만난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 없지 싶다. 먼저 이 말을 해야겠다. 이 책, 어린이 책이다. 동화다. "뭐? 애들 책이라고?"라고 한 수 접고 들어가지 마시라. 동화가 소설보다 쓰기 어렵다. 정확히 200페이지 분량의 이 책은, 어린이 책이지만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든, 접해보면 좋겠다. 특히 책을 좋아하는 이, 쌓이고 꽂힌 책만 보면 배가 불러오는 이, 서점이 고향같은 이, 밥 먹고 똥 눌 때 책이 없으면 안 되고 책을 읽다 밤을 지새우고 불빛 밝힌 채 펼쳐진 책을 동무 삼아 잠에 든 이, '활자 중독증'인 이들, 종이와 텍스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특별히, 특별히 권하고 싶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말한다. 이 책, 성인 소설과 인문서들로 가득찬 책꽂이에 꽂아도 부끄러워할 일 없다. 책의 표지와 디자인 자체가 굉장히 세련되고 고풍스러워서 어른들 사이에 끼어 있어도 절대 기 죽지 않을 아이다. 아니, 오히려 고서와 같은 고고함과 묵향마저 느껴져 은근 뿌듯할 것이다. 그래, 다 필요없다 치고, 도서관에서라도 빌려 읽어라. 책은 일만 원 내면 오백 원 거슬러주는 값인데, 어찌하다 출근길에 보니 지갑에 단돈 삼천 원 뿐이다. 당신이 나와 현금 사정이 같다면, 동네 도서관에 가서 빌려달라 말하자. "저 삼천 원 밖에 없는데요..."란 말은 굳이 안 해도 좋다.

동화는 일단 단문으로 씌여져야 한다. 수사, 은유의 넘침, 좋지 않다. 아이들이, 특히 염소 새끼 같이 뭐든 뜯고 헤치고 맘대로 싸돌아다니기 바쁜 '사내아이놈'들에게 긴긴 문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읽히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린이에게 읽히는 문장은 짧고, 간결하다. 한마디로 100m 경주라고나 할까. 휘릭 읽혀야 하고, 짧은 거리 안에서 모든 승부를 내야한다. 올림픽의 꽃은 마라톤이라지만 많은 환호와 관심을 받는 것은 단거리, 그중에서도 100m 경주가 아니던가. 눈 깜짝할 새 모든 것을 폭발시키듯 터뜨리고, 산화하듯 몸을 태워야한다. 어린이책의 문장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다. 화려함이나 맵시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하지만 짧은 기도가 하늘에 닿듯, 간결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불필요한 지방은 다 태워버린 단단한 몸짱 몸매, 몸짱의 문장이기에, 짧은 글은 우리의 마음에 깊게 새겨진다. 대상 독자가 더 어려질수록 문장의 간결함과 완벽함은 더욱더 필요하다. 아가들이 읽는 그림책이 시를 읽는 듯한 맛이 나는 것이 그 때문이고,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책을 쓰는 것은 대상 연령이 낮아질수록 힘들고 어려워진다. 

<책과 노니는 집>은 쓰기 어려운 동화인데다가, 화자가 어린 아이이다. 배경은 조선조 말이다.
실로 망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다. 아이가 관찰자가 되든, 화자가 되든, 아이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사이에서 뚜쟁이 역할 비스무레하게 하는 여자아이처럼, 애초에 배경이 소설이라면 쉽겠으나, 동화에서 아이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되 역사물의 성격을 보이며 어른들의 세계를 묘사하기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애초에 작가라는 이들은 '자기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담아두고 사는 이들이다. 일반인들에겐 그저 '꽃' 이나 '물안개'의 한 단어 사물이 그들에겐 '서사'가 되고 '기승전결'이 되는 식이랄까. 독자의 가슴에 쌓인 이야기보다 훨씬 고밀도의 이야기를 가슴에 뭉쳐놓은 이들이니, 작가들은 텍스트 안에서 자기 이야기가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특히 어린이가 화자가 되어 어른들의 세계를 묘사하게 되면, 초반엔 그저 순진무구한 아이같던 녀석이 후반부엔 작가의 영이 빙의되어 입만 아이일 뿐 하는 말은 작가와 다름없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라, 조금 이따 작두도 타겄네. 쪼만한 아이 녀석이 어찌 세계관, 우주관에 대해 논하고 인생의 철학에 대해 말한다더냐. 갈팡질팡하는 어른 출연자에게 이젠 아주 갈 길까지 알려주는데, 무슨 고승이 화두를 던지듯 툭, 평상에 엽전 꾸러미 던지듯 툭, 던지는 말 한마디가 아주 시에 철학에 '책의 메시지'이다. 아아, 이런 경우 많다. 

<책과 노니는 집>의 완성도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일관성있는 화자와 캐릭터의 연출, 캐릭터의 구축이라 하겠다. 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이고, 어른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른이다. '천주교 박해'라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야기의 전반에 드리워지지만, 결코 천주교가 한국사에 어땠네, 탄압의 정치사는 이랬네, 저랬네, 사실은 꿍꿍이가 있었네 따위의 음모론, 양놈 코쟁이들이 종교를 앞세워 미개인들을 침략하네 뭐네. 그런 것 따위 전혀 없다. 작가로서 말하고 싶은 근질근질함, 꾹 참아 주시고, 그저 아이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하지만 아이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고 해서 순진무구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게 아님을 기억하자. 이야기는 긴박하고 속도감 있게 진행되며, 천주교 박해가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후반부에는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거침이 없다. 평소에 얼마나 많은 습작을 했을지 짐작케 한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게다가 사건이 일단락된 마지막에는, 주인공 아이와 아버지 사이의 비밀이 드러난다. 전혀 생각 못한 반전인데, 신파조로 흘러갈 법한 반전을 아주 쿨하게, 깔끔하게 그려내며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깔끔한 한정식을 먹은 뒤 '국내산 잣알'을 동동 띄운 시원한 수정과를 마시듯 입안이 개운하고, 눈이 개운하다. 참으로 깔끔한 마무리이다. 작가 개입과 이야기의 완성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공연을 멋지게 해내고 이런 멋진 서사와 긴장감을 선물한 작가에게 박수를 쳐주자.

- 덧붙임 -
주인공 아이의 이름은 '문장'이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는 먹물을 먹은 선비들이 자주 오가는 해장국집 골목 옆 허름한 집을 사서 자신들만의 '책방'을 내는 게 평생 소원이었다. 주인공 '장'이는 필사쟁이로, 한문 책과 언문 책을 필사하는 일을 하는 '필사쟁이'이다. 지금의 인쇄업자, 출판업자 되시겠다. 한문으로 씌여진 책을 필사해야만 '프로 필사쟁이'로 여겨주는 풍토에서, 언문을 사용하여 모든 백성이 지식 앞에 평등해지고 능력으로 평가받는 세상이 오길 바라는 부분에선 날카로운 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밤낮없이 공자 맹자를 파고 한자를 공부하면 뭐하느냐? 정작 청나라에 가면 입도 뻥긋 못하고 겨우 필담으로 더듬거리는 것을."
_<책과 노니는 집> 본문 155페이지 부분 인용 

요 문장 고대로 옮겨서 영어 몰입교육 백날 떠드면 뭐 하냐? 정작 쌀나라에 가면 입도 뻥긋 못하고 바디 랭귀지에 메모판에 글 써서 더듬거리는 것을!이라고 바꿔 주셔도 되겠다. 

또한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을 다루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자'로서의 기본 자세, 책을 대하는 자세, 독자에게 맞는 책을 권하는 마음가짐 등에 대한 묘사이다. 일일이 묘사할 수는 없으나 부분 부분 보이는 책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참으로 멋스럽고 세련된 맛이 느껴져 좋았다. 당시에는 천한 일이었겠으나 책을 대하는 자로서의 자부심, 고풍스러운 멋을 아낄 줄 아는 진정한 지식인의 자세 등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러스트를 눈 여겨 보자. 그림책 <엄마 마중>으로 유명한 그림 작가 김동성 님이 먹빛 잔잔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주셨다. 참으로 빼어난 완성도이고, 텍스트의 무게를 받쳐주며 더욱 눈부시게 함에 부족함이 없다. 그림만 봐도 참으로 아름답다. 빼어난 그림과 탄탄한 글이 만나 참으로 즐겁고 기분 좋은 동화가 나왔으니, 그 이름은 바로 <책과 노니는 집>이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 아이와 함께 책과 노닐어 보시길. 즐거운 산책이 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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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말을 걸다 - 백성현 포토 에세이
백성현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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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글은 아니다. 아무렴, 당연한 소리. 가수가 쓴 글이니까. 소설가가 노랠 불러 음반을 냈다고 하면 비슷한 반응 나오겠다. 잘 부른 노래는 아니라고. 아, 그러고보니 소설가 한강이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라는 책을 내며 자기가 부른 노랠 담은 음반을 붙여 줬구나. 책 뒤 보랏빛 봉투의 은박 스티커를 떼면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내밀던 보랏빛 CD. 어쿠스틱 기타의 프렛과 넥 위로 손가락이 스륵, 스쳐지나갈 때 나는 기분좋고 매력적인 현의 쇳소리처럼, 마디마디 깊게 내쉬는 소설가 그녀의 떨리는 숨소리. 조용함과 나긋한 음색이 매력인 노래들. 한강이 직접 쓰고 곡을 붙인 노래들. 하지만,

가만가만 소설가 그녀의 숨소리는 여리고 새로웠으나 그녀의 노래를 말하자면 귀가 호사를 누릴 정도는 아니었다. 한강은 소설가이고, 가수가 아니니까. 

노랠 부르는 소설가 한강이 그랬듯, 가수인 빽가가 백성현이란 이름으로 쓴 책은 거듭 말하지만, 잘 쓴 글은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도, 대필작가에게 알바비를 지불했을 리가 없는 책이다. 백성현이 직접 쓴 이야기라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는 투박하다. 

그러나 그 투박함에 나는 경의를 표한다.  

행여 코요테의 노래가 싫어요, 빽가의 랩은 데스 메탈(death metal)에 제주도 방언으로 가사를 붙인듯, 생크림 케이크에 초고추장으로 간을 한듯 부자연스러워요, 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거야 뭐 개인 취향이니 미성년 여학생들이 떼거지로, 그것도 빤쓰같은 바지 입고 나와 온몸 흔들며 노랜지 뭔지 몇 마디 해도 '짱이에요!'라 할 수 있는 것이고, 나처럼 심수봉 선생님은 정말 짱이에요!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대중음악평론가도 아니니 코요테와 빽가의 노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할 생각도 없거니와, 코요테가 좋든 싫든 난 아무래도 상관 없다. 

하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성의 문제니까. <당신에게 말을 걸다>의 백성현은, 연예인으로서의 메이크업과 조명 따윈 싹 걷어버리고 미칠듯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굳이 백성현의 친구 정지훈이가 인정했다고, 백성현이 빽가이듯 정지훈은 '비'라고, 워얼드 스타 비가 인정한 사진쟁이가 백성현이라고, 그렇게 유명인의 이름을 빌려 포장하지 않아도 사진쟁이 백성현은 충분히 멋지다. 그러니 연예인이 써봤자 뭘 쓰겠어,라 색안경을 끼지 말고 그저 사진을 좋아하는, 그리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노력할 줄 아는 한 남자가 쓴 자기와 사진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봐주면 좋겠다. 그런데 정말 웃긴 것은, 포토그래퍼 백성현이 촬영한 정지훈의 벗은 상반신, 빨래판 같은 식스팩 사진이 이 책에 실려있다 해서 책이 잠깐이나마 검색순위 상위를 링크했다는 것이다. 뭐냐, 이거. 한 사람의 눈물겨운 노력과 사진에 대한 애정이 담긴 이 책이 워얼드 스타의 복근, 뱃살만도 못하다는 것이더냐. 그 사진 보니 어둡고 침침해서 빨래판인지 아랫배인지 잘 보이지도 않더만.  

어릴 적부터 현재까지, 백성현의 흔적과 사진과의 인연을 담은 책이니 '일기'로 봐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이 '일기'를 그저 맑음, 흐림, 몇 시에 일어나 숙제하고 밥먹고 게임하고 친구와 놀다 들어와서 씻고 잤다'류의 방학숙제식 일기로 보면 곤란하다. 이 일기는 단순하고 투박하지만 웃는 날보다 우는 날, 고민하는 날, 방황하는 날이 더 크게 다가오는 일기이다. 그리고 그런 눌림 속에 끝내 성취하고 이루고, 다시 도전하고, 더 큰 것에 도전하고, 후학들까지 배려하는 마음이 담긴 대견한 일기이다. 단순하지만 진정성이 담긴 일기. 밀린 방학숙제식 일기가 아니라 매일매일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쓴 솔직한 일기. 그게 바로 백성현의 <당신에게 말을 걸다>라 말하겠다.

'성취를 이룬 문학작품', '미문', '철학적 사색이 돋보이는 진중한 본격문학'을 찾는다면야 굳이 이 책을 권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당신이 지닌 능력을 그저 신선놀음을 구경하는 나뭇꾼의 도끼자루처럼 내버려 둔 채 썩히고 있다면, '뭘 해야할지도 모르고', '무얼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야근과 특근은 하기 싫은데 연봉은 많이 받고 싶다'라 생각하고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나름 열심히 살고 있는데, 뭘. 이 정도면 됐지, 하는 분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그런 분들, 조금 부끄러워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나도 이정도는 하고 있다!", "나도 사진쟁이 백성현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 미친듯이 좋아해서 빠져드는 일을 지금, 바로 여기에서 하고 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당신에게는,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를 꼭 해야겠다.  

나는 당신을, 열심히 사는 당신을 존경한다.  
 

..........
애정으로 일하는 당신, 무얼 해도 될 것이다. 시간이 누적되면, 당신은 분명 무언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애정과 열정의 만남은 투박한 질그릇도 보석처럼 빛나게 하는 법이니까. 당신도, 나도, 꿈을 이룬 바로 그 자리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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