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3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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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물에 인생을 바쳐온 이들에 대한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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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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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생 때였다. '반다이'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때였고, 당시 반다이를 벤치마킹하여 국내 입지를 굳혀가던 '아카데미'의 건담 시리즈 프라모델을 사 모으던 때였다. 'Z건담'이 당시 돈으로 3천 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십 몇 년 전에 3천 원이면 국민학교 꼬마에겐 큰 돈이다. 세뱃돈이 오백 원, 천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프라모델 조립은 형이 다 맡아했다. 나도 만들어 보고 싶었으나 형은 손을 못 대게했다. '나를 믿을 수 없었'거나, '자신이 더 섬세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어느날, 형이 외출하고 없는 틈을 타서 형이 만들던 Z건담을 들고 다락방에 올라갔다. 형이 돌아오기 전까지, 최대한 나도 조립의 희열을 느끼고 싶었다. 세밀하고 작은 부품이 많아 손이 떨렸다. 작은 가위로 부품을 잘라내고, 삐죽하게 잘린 부분은 손톱깎이로 다듬으면서 한낱 플라스틱 쪼가리가 건담의 몸체가 되는 이적의 현장에 함께하는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그런데 3mm 정도 되는 부품 하나가 튕겨져 날아갔다.
부품이 워낙 작다보니 가위로 '뚝'하고 자르는 순간 날아간 것. 아무리 찾아봐도 잃어버린 부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작 3mm 짜리였지만, 사람으로 따지면 다리와 골반을 고정시키는 부분이었다. Z건담은 건담 시리즈 중 '변신'을 하는 흔치않은 녀석인데, 변신을 하기 위해선 다리를 단단히 고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말인즉슨, 3mm짜리 부품 하나 때문에 우리집의 Z건담은 변신을 할 수 없다는 소리였고, 3천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엄마의 잔소리'를 감안해가며 산 Z건담이 반병신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또한 형에게 죽도록 갈굼당할 거라는 소리이기도 했고. 

고작 3mm 부품 하나 때문에. 

고작 3mm 부품 하나 때문에 Z건담은 '특유의 정체성'인 변신도 못하는 반병신이 되었고, 나는 형에게 죽도록 갈굼당했으며, 꼬마로서는 벌벌 떨면서 두손으로 받아들 3천원이 날아가 버렸다. 고작 3mm 부품 하나 때문에.  


너는 3mm 냐?
'미친 존재감'을 지닌 글쟁이 김언수의 소설 <설계자들>은 대놓고 묻는다. "너는 3mm냐?" 대답이 궁색해 우물쭈물하는 사이, <설계자들>은 판결을 선고하듯 대답을 해 버리기까지 한다. "너는 3mm보다 못한 존재다. 부품은 더더욱 아니고, 손톱깎이로 다듬어서 버려야 할 부품 옆의 플라스틱 쪼가리야!"라고 말이다. 

<설계자들>은 제거해야할 대상과, 손에 피를 묻히는 암살자와, 암살의 계획을 짜는 설계자들, 암살을 중개하는 업자들, 암살을 의뢰하는 계약서상의 '갑'들이 등장한다. 뭐냐, 또 킬러냐?라고 코웃음 치지 마시라. 그런 반응은 미야베 미유키, 일명 '미미여사'의 <모방범>더러 "뭐냐, 또 살인사건이냐?"라고 웃어버리는 것과 똑같은 얘기다. 미미여사의 <모방범>은 '추리소설'의 껍데기를 쓴 '인간탐구'의 얘기이며, 미친 존재감 김언수의 <설계자들>은 '킬러가 등장하는' 사회의 권력과 부조리에 대한 얘기이다. 살인도 깔끔한 대형마트에서 주문하듯 맞춤형 필요상품이 되어버린 이 부조리의 세계말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세상을 바꾸고자 한들 3mm도 안 되는 입장에서 바둥거려봤자 내가 부스러질 뿐이다. 국민학생 따위나 3mm에 연연하지, 권력의 '빈 의자'에 앉는 이들은 3mm부품 없어졌다고 쩔쩔매지 않는다. 가게에 가서 '금빛' 신용카드 내밀며 "이거랑 똑같은 걸로 하나 더 주세요."하면 그만이다. 누군가 감쪽같이 죽어 없어졌다고? "똑같은 여자로 하나 더 주세요."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아니, 얼마든지 더 좋은 걸로도 살 수 있다. 권력자들은 '상실'이나 '인권'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저 '증빙'과 '안위' 확보가 우선이다.

<설계자들>의 주인공 '래생'은 3mm다. 본인 스스로도 3mm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래생의 태생부터 그렇다. 애미애비도 모르는, 수녀원 앞 쓰레기통에 버려진 존재가 바로 래생이다. 래생은 '개들의 도서관'의 도서관장 '너구리 영감'의 손에 이끌려 '암살중개업소'인 '개들의 도서관'에서 자란다. 그는 책은 많으나 개조차도 얼씬거리지 않는 '개들의 도서관'에서 훈련관 아저씨에 의해 킬러로 길러진다. 래생이 얼마나 어이없는 3mm인가 하면, 어리바리할 뿐만 아니라 싸움실력도 뭔가 못미덥고, 3mm주제에 '농담'을 할 줄도 안다. 권력과 실세 앞에서 웃으며 눙치는 3mm라니. 튼튼한 동아줄을 잡아야 하늘의 해님도 되고 달님도 되는데, 래생은 썩은 동아줄인 걸 뻔히 알면서도 '자기가 선택한 줄'을 잡는다. 수수밭에 고꾸라져 떨어져 그 피로 수수를 물들일지라도 독고다이 마이웨이다. 이렇듯 싹수부터 노란 래생은 창조자님인 '소설가 김언수'의 제재도 듣지 않은 채 '미친 세상'을 향해 질주한다.

나는 <설계자들>의 래생을 읽으며 미친 존재감 김언수를 떠올렸다. <캐비닛>이라는 포복절도할 책으로 혜성처럼 등장했고,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문화예술 후원처럼 '소설을 쓰다 사업을 시작한 친구'로부터 매달 1일에 입금되는 방식으로 2년 동안 월 50만 원을 후원받은 소설가 김언수 말이다. 다작을 한 것도 아니고 작가 이미지 자체가 백화점 명품샵이 아니라 시골 5일장스러운 그, 하지만 미친 존재감을 지닌 그 말이다. 그는 래생같고, 래생은 그 같다. 썩은 동아줄을 붙잡을지언정 독고다이 마이웨이를 걷는 한국문단의 래생, 바로 김언수. 래생의 창조자님 김언수는 래생이 더럽게 말을 안 들어서 '소설가와 캐릭터가 서로 싸워서 삐지는'상황에 갔다고 밝힌 적 있는데, 내가 볼 때 김언수 역시 '말을 더럽게 안 듣고' '자기의 글을 통해 세상에 일갈하는'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소설에서 래생은 '지적이고, 듬직하고, 자뻑이긴 하다만 잘생겼고, 귀엽기까지'하다. 게다가 3mm주제에 권력 앞에서 농담도 할 줄 안다. 내가 아는 김언수가 딱 그렇다. '잘생긴건' 수긍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적어도 '지적이고, 듬직하고, 미친듯 귀여운데다가 농담을 할 줄 안'다. 그렇다. 그는 '농담을 할 줄 안다') 

잘 키워주니 물어뜯는다고, '개들의 도서관'에서 자라 유학물까지 먹은 '한자'는 도서관장 너구리 영감을 뛰어넘으려한다. 그와중에 훈련관 아저씨와 추, 정안이 칼잡이 이발사에 의해 살해된다. 지령을 내린 이는 한자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빨이 빠진 호랑이, 검은털이 몽땅 빠진 너구리처럼 추락해버린 너구리영감은 실체와 배후를 뻔히 알면서도 꼬리 끝을 약간 잘라내는 것으로 일을 덮는다. 배은망덕한 한자 역시 꼬리 끝만 조금 잘라서 생색내는 것으로 자신의 손을 씻는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고서 깨끗한 물에 손을 씻음으로 자신은 상관없다고 자위하던 저 뻔뻔한 빌라도처럼.

권력의 '빈의자'를 노리는 높은 분들 입장에서 한낱 암살자들이야 3mm도 안 되는 대체가능한 부속품에 불과하다만, 이런 세상에서 여전히 '인간'으로 살아가는 래생은 분노한다. '사람백정'이니 래생 자신도 죽어 마땅한 존재이지만, 시니컬과 냉소로 자신을 지켜왔던 래생 속 인간이 꿈틀거린다. 

래생이 풋내기 암살자이던 시절, 래생의 암살 작업에 지저분한 흔적이 남아 도피 중일때 만난 여인이 있다. 알뜰살뜰 손도 맵고 살림꾼인 여인을 만나 '일반인'으로 살 수 있는 인생 유일의 기회 앞에서도 상황이 수습되자 다시 암살의 판으로 돌아왔던 래생. 사랑을 버리고 오면서도 기계적으로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암살자로서의 직업병을 발휘하던 냉혈한이었지만, 래생은 이발사의 칼자국이 선명한 친구의 시체 앞에서 자각하고 각성한다. 래생은 '스스로 설계하고 스스로 움직이는' 판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돌연히 나타난 미토, 미사 자매. 그리고 자매와 엮인 사팔뜨기 사서. 똑같은 3mm인 암살자 래생, 설계자 미토. 사랑이 설계되었다면 래생과 미토의 만남은 이보다 더 낭만적일 수도 없겠다만, 둘의 만남은 '똥'에 반응하는 변기 속 사제 폭탄이 실마리가 되었으니 유쾌할 수만은 없을 터. 세상을 바꾸겠다는 미토는 래생 입장에서 '미친년'일 뿐이다.

하지만 잘 만났다. 미친놈 미친년끼리 한바탕 어울려 세상을 한번 뒤집어 보자.
아름다운 밤하늘의 폭죽처럼, 권력을 상징하듯 수직 이동만 가능한 엘리베이터들에서 폭탄이 빵빵 터진다.

각성한 래생은 거칠 것 없이 미친 춤사위를 선보인다. 브레이크는 필요없다. 가속페달 하나로 끝까지 가는거다. 쿵쾅거리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다. 그리고, '농담을 할 줄 아는' 래생은 웃는다. 치명적일 정도로 매력적인 웃음이다.  

문학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누군가가 거대 담론을 던진다면 글쟁이 김언수는 저 래생의 마지막 장면마냥 슬쩍 웃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는 '농담을 할' 것이다. 누가 앉든 상관없는 권력의 꼭대기 자리, 그 자리는 그저 빈 의자로 존재하며 억겁의 시간동안 윤회가 되풀이되듯 권력자는 얼굴이 다른 누군가로 바뀔 뿐이며, 영원불변한 것은 그 자리, 빈 의자 뿐이다. 권력자를 설계하고 암살한다 한들 '빈 의자'를 치울 수는 없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건 래생 말마따나 '미친년' 소리 듣기에 딱 좋다. 하지만 그래도 썩은동아줄 독고다이 마이웨이를 걷는 또라이들이 세상에 있기 마련이고, 세상의 질서 개편까지는 아니어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이들은 지렁이처럼 계속 땅을 뚫고 나온다. 비가 멎고 해가 떠오르면 아스팔트 위의 지렁이들은 온몸이 말라 마른 낙엽처럼 죽어가고 개미의 배를 채울 뿐이다. 하지만 지렁이는 끊임없이 땅을 뚫고 나온다. 오직, 꿈틀거리기 위해서. 

나는 김언수가 비 내리는 날 땅을 뚫고나와 태양이 떠오르기 전 아스팔트를 건넜다고 생각한다. 몸이 잘라져도 꿈틀거리고, 암수 한몸으로 외로워도 좋다. 지렁이가 몸에 흰 띠를 두른 듯, 김언수는 태어날 때부터 하얀 종이를 들고 태어났다. 죽음을 담보로한 아스팔트 위의 행보처럼, 미친 존재감 김언수는 몸으로 부딪히고 꿈틀거린 흔적을 날때부터 들고온 종이에 새긴다. 그리고 나는 대가없이 그것을 읽는다. 정말 미안하지만, 뻔뻔스럽게도 책값 얼마를 지불하고선 죽음을 담보로한 흔적을 읽는다. 

 

나는 3mm다. 사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은 3mm다. 튀어 없어질 수도 있고, 알고보면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하기도 하다.

하지만 3mm가 부재함으로 인해 반병신이 되는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김언수는 한국문학의 3mm로서, 그 어떤 골드카드를 들고가도 구해올 수 없는 '물건'이 분명하다. 그의 꿈틀거림, 이무기나 용이 되는 건 관심조차 없고, 그저 지렁이로 세상을 향해 '농담'을 던지듯 '화두'를 던지는 그가 좋다. 그렇다. 그는 '농담을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희귀한 소설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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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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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깃집에서 쌈을 싸먹지 않는다. 쌈을 싸먹는 경우는 하나다. 바다건너 온 고기들, 수입산이라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듯 네모 반듯하게 잘린데다 겨울철 주공아파트 베란다 유리창에 성에 끼듯 살얼음이 살짝 낀, 동물성 단백질이라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하는 고기를 먹을 때 뿐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고기맛이 없다면 풀맛으로. 고기가 맛있는 집에선 그저 고기만 주워먹는다. 내 이와 혀와 눈이 고기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다. 기름장도 사양이다. 쇠고기는 약간의 소금만 있어도 충분하다. 진짜 참기름도 아닌 것에다 소금 풀어봤자 뭐하나. 진짜 참기름은 그것 자체로 맛나고, 쇠고기는 쇠고기의 기름 자체로도 만족스럽다.

나는 조용히 까탈스러운 편이지만, 우리 아버지는 대놓고 까탈스러운 미식가시다. 자가용 없이 지금도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고, 좋은 집으로 이사 한번 가보자는 어머니 말씀에도 그저 "됐어." 한마디로 끝내시는 분이지만, 입에 들어가는 음식 하나만큼은 '인정'과 '관용'이 허락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맛없는 식당에서는 화를 내시고 밥 대신 쏘주만 자신다.

언젠가 여자친구를 인사시켜 드린다고 시골에 내려간 적이 있다. 아버지는 보수적인 시골 양반이라 그 앞에선 둘이 손도 잡지 못하고, 그저 긴장한 채 아버지 낯빛을 살폈다. 당시 내 여자친구는 아버지 마음에 탐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좋다 싫다 왜왔냐 괜히 왔다, 이런 말 한마디 없이 어딘가로 전화를 거셨다. 그러고는 식당 이름을 알려주시며 택시타고 얼른 가란다. 뭘 먹겠느냐, 뭐 그런 물음도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등돌려 나가는 나를 불러 십만 원짜리 수표를 한장 쥐어주셨다. 도착한 곳은 복어집. 나나 여친이나 복어는 처음이었던지라 비교 대상이 없으니 그집이 맛있었는지 없는지 평가할 깜냥도 되지 못했다. 다만 밑반찬의 하나로 북어국이 나왔는데, 평생 먹어본 북어국 중 그집의 맛이 최고였다는 것만큼은 똑똑하게 기억한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시다. 밉든 좋든 일단 찾아온 손님은 맛있는 걸 먹여 보내야한다. 먹는 게 자신에게 있어 큰 즐거움이므로, 상대에게도 최고의 즐거움을 대접하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나는 회를 좋아한다. 한점 먹어보고서 이게 무슨 생선이다, 생선 대가리만 봐도 이놈은 고놈이다, 라고 말할 수준은 물론 아니다만, 회는 사양치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나고자란 곳이 전북 군산이다. 군산하면 부산과 함께 회 하나로 유명한 곳 아니던가. 봄철의 군산 주꾸미도 최고이고. 그런데 군산에서는 여름에 횟집들이 일시에 문을 닫는다. '내부수리' 명목이지만 군산에선 여름에 회를 먹는 이도 적고, 횟집도 굳이 팔 생각을 않는다. 여름은 어종, 어획량 모두 적고 제철 생선이라 할만한 게 그닥 없기 때문인데다 먹고 탈이 나는 것도 우려해서다. 여름에도 문을 연 집이 있다면 수도권에서 역풍으로 내려온 '광어 한 마리 9,900원', 뭐 그런 횟집들이다.

회가 그리운데 여름이라 그저 참고 살았는데, 어젯밤 몹쓸 책을 한 권 읽고 말았다. 진실로 땅을 치며 후회했다. 첩첩산중 달도 안 뜬 어둔 밤 오솔길에서 삼 일 굶은 호랑이를 만난 선비가 흘린 땀을 종지로 받아본다 한들, 내가 어젯밤 이 책을 읽으며 흘린 침보다 양이 적을 것이다. 아, 이놈의 몹쓸 책, 모 일간지에서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라고 연재되었던 것을 엮은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이다.

이런 망할 책 같으니라고. 감칠맛 나는 글만으로도 간장게장마냥 맨밥 한 끼 뚝딱이지 싶은데, 사진까지도 침을 돋게 만든다. 사진속 횟감으로 쓸만한 갈치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무림고수의 번쩍이는 검처럼 은빛찬란 물 좋은 갈치를 엊그제 마트에서 봤다. 아, 물좋다! 하며 다가갔더니 한 마리 5만 원. 쓸쓸한 발길 돌리는 것을 보니 나도 아버지를 닮았다.

그러고보니 갈치회와 고등어회도 복어회 여친과 처음으로 먹었구나.

소설가 한창훈 작가님의 글은 이전에도 맛깔나게 보아온 터였다. 소설집 <나는 여기가 좋다>의 경우, 책장을 넘길 때 바닷바람과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듯했고, 뭍보다도 바다가 더 좋은 갯놈의 처연함이 온몸을 휘감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새로 나온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는 음식만화인 <식객>으로 유명한 만화가 허영만 선생이 먼저 읽고 빠져들었다 하고, 섬에서 나고 자란 배우 고두심 님 역시 좋다 말하니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 그저 구미가 당기고 말았어야 했다. 딱 그선에서 끝내야 했다. 선을 넘듯 책장 넘긴 게 잘못이다. 차라리 야쿠자 오야붕의 애인을 집적거리다 선을 넘는 바람에 일본도를 피해 도망다니는 게 낫지, 늦은밤 책 읽다 새벽녘에 미친 듯 회가 먹고싶어지는데 어쩌란 말인가! 스탠드 하나 켜놓고 책 읽다가 앉질 못하고 거실을 서성였다. 아, 생선! 아, 바닷것! 뭐 없을까, 뭐 없을까? 비린 것 뭐 없을까? 정말 우리집에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일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쏘주는 한 병 있는데 물고기는 어디에서! 어디에서!

시간 보니 횟집 문 다 닫았을 시간이다. 이런 망할, 이런 젠장할! 왜 이런 책을 쓰고 만들어서 이 쌩난리냐고!

아, 저기... 작가님 맞으시죠? 글 쓰는 분 맞으시죠? 그러나 사진 속 한창훈 작가님은 영락없는 뱃사람, 어부의 모습이다. 아마도 작가님 만나뵈러 내려갔다가도 회 써는 모습 보면 그저 동네 뱃꾼이려니 해서 "거 아저씨, 담배 한 가치만 꿉시다!"라고 말하고 넘어갈지도......

물론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는 결코 요리책이 아니다.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라는 신문 연재 당시의 제목에서 잘 보이듯, 1814년 손암 정약전 선생이 쓰신 <자산어보>를 200년 후의 '생계형 낚시꾼' 한창훈 작가님이 현세와 연결시켜 밥상으로 끌어올렸다 보면 맞겠다. 월척이다. 흑산도 바다 동식물에 관한 사전쯤 되는 <자산어보>, 가치는 높다만 "그래서 뭐?"하게 되는 옛날 책을 이렇게 맛깔스럽게 밥상으로 끌어올리다니 월척 낚은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 몹쓸 책에는 친절하게도 이런 장면까지 풀컬러 사진으로 지원해 주신다. 이 책, 공포영화의 공식과 똑같다.

1. 절대 밤에 읽지 말것! (공포영화에선 밤에 꼭 당한다.)

2. 절대 혼자 읽지 말것! (바보같이 혼자 나가는 금발 글래머 여자부터 먼저 죽는다.)

그러니까 낮에 여럿이 읽다가 마음 동해 횟집가서 쏘주 한 잔 하면 완벽하단 소리다.

책은 자산어보에서 손암 정약전 선생이 언급한 바다 동식물의 옛이름과 설명을 소개하고, 그에 따르는 21c 생계형 낚시꾼 한창훈 작가님의 추억과, 손맛과, 인생과, 바다내음을 열거한다. 글 자체로도 충분히 맛깔스럽고 눈물겹고, 사람들 부대끼는 땀내와 바닷내가 어우러져 있다. 요즘 인기를 얻는 만화 중에서 비슷한 느낌의 작품이 있는데 바로 <심야식당> 되시겠다. <심야식당>도 무척 훌륭한 작품이다만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는 흑백의 밤식당에 비해 으리번쩍 눈이황홀 컬러 사진으로 바다를 생생하게 옮겨왔으니 훨씬 더 씹는맛, 읽는맛이 좋다 하겠다.

읽으면서 이렇게 포만감이 느껴지고 만족스러웠던 적이 별로 없었다. 바다도 좋고, 바다에서 나는 '사는 것'과 '먹는 것'도 좋고, 그안에 얽힌 사람 이야기, 사람의 생 이야기도 참 좋더라. 몰랐던 것은 새로 알게되니 좋고, 알았으나 정확히 몰랐던 것은 더 깊이 알게되니 더욱 좋다. 글만으로도 맛있으나 사진과 정보와 뒷이야기 또한 메인메뉴 못잖은 깜찍하고 맛깔난 요리로 충분하다.

그러니 요즘 환절기라고 입맛 없는 양반들, 맛깔난 책 있으니 한번 맛볼 것을 추천한다. 책 모양새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앞표지에 물좋은 생선의 프로필 사진이 자리하고 있는 자태 하나로도, 충분히 황홀하다 하겠다. 그러니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허기진 속과 인생을 달래는데는 바다가 최고다.



갈치, 삼치, 모자반, 숭어, 문어, 고등어, 군소, 볼락, 홍합, 노래미, 병어, 날치, 김, 농어, 붕장어, 고둥, 거북손, 미역, 참돔, 소라, 돌돔, 학꽁치, 감성돔, 성게, 우럭, 검복, 톳, 가자미, 해삼.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바다 생물은..... 비밀이다. 다만 놀랄 준비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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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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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대학생이 된 촌무지렁이는 서울에 올라왔다. 적응이 수월치 않아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돌던 때, 김영삼 정권의 대선자금 공개 요구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집회 도중 연세대 노수석 학우가 과잉진압으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보다 한 학번 위, 그는 95학번이었다. 스물한 살 젊디젊은 젊은이의 희생에 '서울지역 총학생회 연합'(서총련)에서는 대대적인 집회에 돌입했다. 홍익대학교를 비롯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등 서부총련에 속한 각 대학들은 총학의 깃발을 세우고 끊임없이 행진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던, 백치와 같은 새내기에 불과한 나도 그 대오에 끼어들었다. 

지금은 불타 없어진 숭례문까지 행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깃발은 드높았고, 분노 역시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순간, 대오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선배들은 큰 목소리로 총학의 깃발을 중심으로 모이라고 외쳤으나 소용없었다. 지랄탄이 터진 것이었다. 페퍼포그 차량에서 로켓이 발사되듯 번쩍하는 순간, 어느새 바닥에서는 미친듯 돌아대며 최루가스를 뿜어대는 지랄탄이 발광하고 있었다. 그 독기와 매섭기는 최루탄 따위가 댈 게 못되었다. 군에 다녀온 예비역 선배들은 그 와중에도 지랄발광하듯 굴러다니는 지랄탄을 밟아 멈추려 했고, 기가 약한 우리들은 양계장에 삵 한마리가 풀린 듯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상가로 들어가 몸을 피하려고 하였으나 문을 걸어잠근 이들이 많았다. "학생, 얼른 들어와 숨어."라는 건, 80년대를 경험하지 못한 새내기가 추억하는 어설픈 낭만일 뿐이었다. 주변 상인들은 영업에 지장을 주며 '데모 따위나 하는' 학생들을 노골적인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장을 막 시작한 풋풋한 여대생도, 아직 고등학생 티를 채 못 벗은 촌놈 무지렁이였던 나도, 눈물 콧물 침범벅이 된 얼굴로 서로를 챙겼다. 하나 둘 아는 얼굴들이 보여 그저 반갑기만 했다. 굳이 전투로 따진다면 패배였고, 우리는 패잔병이었다. 지친 기색으로 지하철을 타 학교로 돌아갈 때, 홍해가 갈리듯 승객들이 갈라지며 우릴 피했다. 옷에 밴 최루가스 냄새 때문이었다. 
 



IMF가 도래했다. 나는 군에 입대했다. 내가 새내기였던 96년도에는 잠수함을 탄 공비가 침투했고, 군에 있던 99년에는 연평해전이 벌어졌다. 전역했을 때, 미대 학우들은 내가 '신학대'에 간 줄 알았다고 했다. 내가 군에 다녀왔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게 변했다. 

오늘내일하던 당산철교가 철거되었다. 새로 지어진 다리로 쌩쌩 지나는 지하철 안에서 한강을 바라보았다. 교내엔 투쟁가 대신 대학방송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고, 새내기들은 맥주만 마셨으며, 쏘주나 막걸리를 탐하는 나 같은 이들은 홍대의 밝은 빛을 피해 시장통의 다락방으로 기어들어갔다. 기본으로 나오던 선지해장국의 국물을 데우고 또 데워가며 막걸리를 축냈다. 더이상 아무도 광장에 모이지 않았고, 다들 사채빚마냥 늘어가는 대학 등록금을 충당하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정신이 없었다. 총학의 깃발은 더이상 종로를 질주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우리 과의 깃발만을 체육대회 때 앞에 나가 흔들었을 뿐. 많은 게, 변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대신 폴 오스터와 하루키가 득세했다. 너무 무겁던 세월은, 아무도 반기지 않았다.  

 


<리진>, <엄마를 부탁해> 등을 통해 관계와 친밀감, 사랑, 이해 등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의 결을 떠내던 소설가 신경숙 작가님의 신작이 새로이 출간되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줄여서 애칭으로 <어.나.벨>이라고도 부른다. 만화가 누군가의 말을 빌자면 '죽음과 맞바꾸는 맛'이라던가. 황복은 담겨있는 접시가 내비쳐질 정도로 얇은 꽃잎처럼, 잠자리 날개처럼 썰어내는 게 보통이다. 굳이 내가 신경숙 작가님의 글을 일러 감정의 결을 '떠낸다'는 표현을 쓴 것은, 잠자리 날개와도 같을 정도로 투명하게 회를 떠낸 황복처럼 감정의 결 하나하나가 소설 속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말은 밖으로 나오면 곧 휘발되며 글은 책으로 남아 시간을 견디니 말보다 글이 더 무거움이 분명함에도, 신경숙 작가님의 글은 때론 무겁게, 때론 민들레 홀씨 위에서도 가뿐히 서서 균형을 잡듯, 무게와 높이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감정들을 잡아낸다.

다만 신작에서 의외였던 것은 청년들, 청춘들이 통과하는 시대가 집회와 열기, 의문사로 얼룩진 어두운 터널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었다. 시간적 배경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없기에 유신의 시대인지, 군홧발의 시대인지, 믿어달라 말했으나 믿을 수 없던 시대였는지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이것은 반대로 '그 어느 시기를 지나왔건 간에 젊음은 치열했고, 치열한 삶 가운데 사랑으로 버텼던 모든 청춘들'의 이야기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서 나의 청춘을 길게 늘여 느물거리는 뱀을 지네와 같은 꼴의 다족류로 만들고 말았다만, 굳이 내 젊음의 통과의례를 길게 늘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언제 어느 시기였던간에 우리의 젊음은 치열했고, 싸우고 죽고 소리 없이 묻히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사랑을 했다.

소설 속에서 어느 누군가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등을 바라본다. 입은 앞에 있으니 등만 봐서는 그의, 또는 그녀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에게 그와 그녀가 말을 건네주지 않아도 좋다.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말해주는 입이 없어도 바라볼 수 있는 등이 있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충분하다'는 것은 내게 이렇다. 소설 속에서 소위 말해 '운동'을 하던, 언제 어디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운동권인 그가 푸짐한 저녁상을 앞에 두고 실종되었을 때. 작가는 '실종'에 대해서는 무겁지 않다. 작가는 단지 사랑하는 그를 기다리는 언니의 마음을 공들여 정성껏 묘사한다. 동생 때문에 무용을 못하는 몸이 되어 생의 줄 하나를 놓은 '언니'를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사랑으로 물들인 '운동하는' 그. 그런 그를 위해 정성껏 저녁을 준비하는 언니의 모습에 대해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묘사를 할 뿐이다. 어찌나 다부지고 참하게 묘사를 했는지 마치 갓 시집 보낸 딸아이가 친정을 찾아 친정엄마에게 처음으로 저녁상을 차려 주는 걸 바라보는 듯한 흐뭇함, 충만함, 사랑스러움이 느껴졌다. 사랑 앞에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다만 식사의 주인공이 끝끝내 오지 않았다는 걸 빼곤. 언니가 정성스레 준비한 저녁상은 손 한 번 못 대고 고스란히 버려진다.

실종과 의문사가 끝간 데 없이 무거웠다면 비탄과 절망으로만 흘렀겠지. 하지만 죽음에 이른 사랑을 충분히 보여줬고 오히려 비탄을 감췄기에, 나는 더 아파하고 더 안타까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드러난 슬픔보다 가슴에 품은 슬픔의 멍빛이 더 푸르른 법이다. 너무나 큰 슬픔은 드러내는 것 자체가 사치일 수도 있으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꾹꾹 눌러 고봉밥을 담듯 사랑은 밥처럼, 슬픔은 밥처럼 꾹꾹 눌러져 드러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에게 따뜻한 밥 한끼를 먹이려던 마음, 맛나게 먹어줄 이가 실종되었을 때 버려진 밥들. 밥은 실존이고 사랑은 추상이라 말하지만, 소설 속에서 사랑과 슬픔은 아끼고 아껴 표현되나 몸을 사르고 목을 매달만큼 구체적이다. 드러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구체적이다. 이런 게 '작가 신경숙'의 능력 아닐까. 나도 그 순간에는 목구멍으로 밥을 넘기기가 차마, 쉽지 않았다.

사랑하는 그를 잃은 언니는 끝내 삶을 포기한다. 불꽃 속 언니의 죽음을 막으려했던 동생 미루에게 남은 상처, 그리고 화상의 흔적. 그런 미루를 바라보는 윤과 명서, 그리고 윤의 등을 바라보는 한 남자, 단. 사랑이 깊어질수록 사랑이 멀어짐을 목도하게 되는 관계. 하지만 충분하다. 그녀의 입술은 다른 그에게 향했지만, 그녀의 뒷모습은 여전히 시야에 있으므로. 뒷모습 하나로도 충만했던 그, 그리고 군입대한 단의 돌연한 죽음. 또 다시 이어지는 또다른 죽음. 그리고 죽음. 
 

하지만 충분하다. 비통이 흘러 넘쳤다면 넘치는 감정이 부담스러웠겠지. 그 시절엔 죽음이 친구처럼 머물렀고 어두움이 안개처럼 내려앉았지만, 그들은 사랑했다. 뒷모습이라도 온전히 사랑했기에 죽음이 무거우나 다시 수면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죽음이 남았고 남은 자들은 하나의 길이 아닌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그래도 청춘의 페이지는 찢어버리거나 구겨버릴 수 없는 것이다. 결과만을 따지자면 세상에 슬픈 사랑만이 가득할 것이나, 아름다웠던 그 때, 그 순간을 생각한다면 그래도 세상은 눈부신 사랑으로 가득찰 것이다.

나는 다만 한마디만 하고 싶다. 내 사랑아, 끝까지 견뎌다오, 살아만 있어달라고.

어디 있든, 네가 어떤 삶을 살더라도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며 우리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눈부신 사랑으로 기억할 터이니 부디, 살아만 있어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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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3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가까이 가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여기 소년 탐정 김정일, 아니 김전일이 그런 인물이다. 우리의 전일 씨는 <데스노트>라도 품고 다니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족족 죽어넘어간다. 친구, 친구의 친구, 아는 사람, 그 누구든 관계없다. 김전일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북두의 권>의 명대사를 빌어 표현하자면 "넌 이미 죽어있다!"쯤 되시겠다. 죽는 순서 1번이냐 2번이냐의 차이일 뿐. 아파트 청약 순위도 아니고 이 무슨!

 

죽는 것도 억울한데 곱게 죽는 사람은 또 아무도 없다. 도끼 살인마 쯤은 애교. 게다가 죽는 사람은 하나같이 '밀실'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어쩜 그토록 지조있게 '완벽한 밀실'에서 시체로 발견되는지. 침입의 흔적, 탈출의 흔적, 그 딴 거 없다. 이러니 무능한 경찰은 맨날 '소년'인 김전일에게 죽는 소릴하고, 아직 '소년'이라 경제관념도 없고, 직장도 없고, 여친도 없는 김전일은 마음씨 착하게 사건을 척척 해결해준다. 노동이 없으면 임금도 없는 게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의 진리인데, 전일 씨는 노동만 있고 임금은 없다. 고용주 또는 부르주아 입장에서 정말 착하기 그지없는 노동자 전일 씨.
  

나훈아 짝퉁 너훈아. <중년탐정 김정일>은 <소년탐정 김전일>의 앗쌀한 개그버전 -_-;;;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이 말은 소년 김전일이 자주 읊조리는 말이다. 명탐정이었던 할아버지 '긴다이치 코스케'의 이름을 걸고 사건을 해결하겠단 소린데, 아니 무슨 할아버지 명의의 통장에 사건 해결 찬조금이 입금되는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의 이름이 뭐? 할아버지가 명탐정이었는데 할아버지의 아들인 전일 씨 아버지는 '탐정'이 왜 안 되었겠는가. 밥벌이가 시원찮으니까 아버지가 명탐정이건 말건 생업과 살길을 찾아 떠난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깊은 뜻도 모르고 왜 전일 씨는 탐정놀이에 빠지는지. 전일 씨 발자국마다 피가 뚝뚝 떨어진다. 온통 피칠갑이다. 도끼에 찍힌 머리만 봐도 트라우마가 장난 아닐텐데, 우리의 전일 씨는 매일매일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피바다 속으로 돌격 앞으로! 인데도 정신이 멀쩡하다.   

(참고: 전일 씨 할아버지의 활약상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책을 잘 살펴보시라)

 
그런데 나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는 명탐정이 한 명 더 있다해서 찾아보았다.
그를 만났더니 생업 유지가 안 되는 푼돈 수입의 탐정일로 스트레스를 받아 슬슬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는, 그래서 버섯머리 가발을 쓰고 다니는 탐정이시더라.
어떻게 해야 돈 좀 만져보나 고민하는, 그런 현실 속 명탐정이더라. 그분 말 빌어보면 ''다잉 메시지'는 무슨 얼어죽을 다잉메시지? 칼에 찔리면 얼마나 아픈데 자신의 피로 암호같은 다잉메시지를 남기겠는가? 그럴 시간이면 문밖으로 기어서라도 도망가야지 않느냐'는 것. 게다가 뭔놈의 밀실 살인이더냐. 그냥 문닫고 지가 자살한거지. 아아, 솔직한 리얼 생계형 명탐정 되시겠다. 그런 분 어디가면 볼 수 있느냐고? 

여기다, 여기.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를 쓴 우타노 쇼고는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로 국내 추리물 매니아들에게 꽤 알려진 작가이다. 그런데 갑자기 웬 밀실? 더구나 '밀실트릭 3부작?' 이거이거, 밀실은 우리 전일 씨 덕분에 물리도록 봐왔는데, 뚜껑 열어봤자 시시한 거 아닌가 싶다. 완벽한 밀실 운운하며, 피칠갑 시체들, 정말 손에서 피비린내가 날 정도로 전일 씨 책에서 봐왔는데 21세기에 왜 또 밀실? 
 

그런데 책장을 열어보니 전일 씨와는 완전 딴판인 리얼 생계형 찌질이 탐정 나와주신다. 명품 정장 걸치고 사건을 즐기듯 농락하듯 멋진 폼으로 유유자적 "범인은 너지!"하는 건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흐름과 똑같다. 그런데 이 탐정, 방에 올라와서 한다는 소리는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지? 그러니까 첫단추가 중요한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돈도 안 벌리고 머리는 빠지고 여친도 없고 이런 우울한 짓을 내가 왜 하고 있지? 경찰놈들, 공무원놈들의 사례비는 쥐꼬리만하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돼? 한방 뭐 없을까?' 그러고 앉아있다. 아, 이쯤은 되어야 현실같지. 

표제작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두 번의 의미심장한 반전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안 돼. 걔는 너의 이복동생이야!'라는 상투적인 반전 따윈 결코 아니다. 적당히 때에 찌든 세속적인 명탐정과, 그를 좇는 정의감이 투철한 '소년' 같은 조수, 이 둘의 화음은 허탈하고 어이없으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반전 또한 그렇다. 그러나 더는 말 못하겠다. 더 말하면 스포를 날리는 게 되므로.

장르문학이나 추리물, 연재와 단행본이 발달한 일본은 우리를 길들여왔다. <소년탐정 김전일>을 비롯한 일본만화들은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있다!'는 식으로 강한 적을 쓰러뜨리면 또다시 더 강한 적이 나오는 점입가경 식 구성으로 만화팬들의 주머니를 털어왔다. 저 유명한 <드래곤볼>부터 <슬램덩크>까지, 적과 맞서 싸우며 더 강해지고 성장하는 주인공들의 눈물겨운 스토리를 보여왔다. 하나의 성공 공식이기도 하고. 하지만 뼈대를 살펴보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다 알면서도 그 무한반복에 긴장하고, 또 기다리고, 다시한번 주인공이 통쾌하게 승리하길 기대한다. 그렇다. 주인공은 결코 죽지 않으니까. 이번 적도 충분히 무시무시하지만 충분히 더 강한 적이 또 나올 것이고, 또 이기리라는 것을 안다. 주인공이니까. 

그런데 그런 공식,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에는 없다. 이불 속 개그랄까? 아닛, 뭐야? 이건 뭐야? 했는데 집에가서 자려고 누워 이불을 덮으면 그때서야 웃음이 터지는, 아니면 그 때서야 무서운 이야기였다는 걸 알고 온몸에 솜털이 곤두서며 소름이 돋는.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에는 상투적인 반전, 반전을 위한 반전 따윈 없다. 분명 밀실이 있고 트릭이 있지만, 설득되는 현실과 때묻은 정의, 그리고 앞만 보며 달려가는 정의가 공존한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 째 단편인 <생존자, 1명>이 인상깊었다. 반전도 자연스럽고, 이야기의 흐름도 물 흐르듯한다. 깔끔하게 잘 짜인 작품이다. 고립상황의 사람 심리를 적절히 묘사했다는 인상! 조금씩 조여와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만드는 구성과 엮여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심리가 좋다. 

마지막 세 번째 작품인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는,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쓸쓸하게 저무는 이의 마지막 꿈을 노래한듯하다. 질펀한 피바다도 없고 이렇다할 사건도 없지만 쓸쓸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홀로 존재하여 빛을 낼 보석 같은 단편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야말로 추리물을 읽는 순간, 바로 그 시간과 공간을 '낙원'처럼 여기는 추리소설의 진정한 팬들에게 헌화하듯 띄우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장르문학과 추리소설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수년간 추리소설의 내공을 쌓아온 정통 추리독자들은 아마도 이 작품을 읽으며 깊게 공감하고 위로를 얻을 게 분명하다. 이런 글을 쓴다는 건, 저자 자신의 '추리소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없다면 구상조차 못할 작품이니까. 쓸쓸하고 처연하나 작가의 마음이 엿보여 좋았다. 이렇게 죽는 것도 아주 나쁘지만은 않겠지. 자신이 평생 품어왔던 꿈을 풀고나서 맞이하는 그런 죽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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