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2권
굽시니스트 지음 / 애니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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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왔다. 
소림, 화산, 무당, 아미, 개방 등의 무림 정파에서는 절대 인정 못 하는 무림 사파의 독수와도 같은 '서브컬처', '막장 패러디 만화', 오덕후 형님들의 절대 지존 굽시니스트의 본격 역사, 전쟁, 패러디 만화 <본격 제2차 세계대전>2권, 그 찬란한 세계대전의 완결편이 드디어 나왔다. 본격 1권이 세상에 자태를 드러낸지 1년여가 지났으니, 과연 1년간 갈고닦은 무공은 얼마나 될까? 몇 갑자의 무공증진을 이루고 다시 무림강호에 출정했을까, 호기심이 불끈하여 책을 펼쳐들었다. 

일단 '승리의 굽본좌'가 최근에 '시사IN'에 연재를 시작했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전혀 안 그럴 것 같으나 굽시니스트는 본래부터 역사학도이자 장차 '선생님이 될 분'이라는 것도 밝혀둔다. 교단에 선 오덕들의 교주라니 언뜻 상상이 안 되긴 한다만, 굽시니스트는 '굽시니스트'이전에 '김선웅'이라는 '한글 이름을 가진', 장차 똘망똘망하거나 적당이 비뚤어지거나 적당히 담배를 태우며 야자를 제껴도 여전히 귀여운 아이들로부터 '김선웅 선생님'이라 불릴 사람임을 밝혀둔다. 

거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니 당연히 한국 이름을 쓸 것이며, 선생님은 만화도 그리면 안 되느냐, 따질 분 있을 수 있겠다. 아, 고정하시고.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를 읽으신 독자라면 내 말뜻을 이해하리라 본다. 허무와 허탈과 박장대소와 실소 사이에서 종횡무진, 세계대전의 이면을 낱낱이 까발리는 B급 유머 속에서, 언뜻언뜻 빛나는 역사, 세계관의 해박함과 자기 철학을 접할 때면 '이 만화를 그린 사람은 지구인이 아닐거야!'란 생각이 자연스레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작가는 어쩌면 철수나 영희 다음으로 튀지 않는 '김선웅'이란 이름을 지닌 사람이고, 오덕들의 교주로 군림할 듯하나 후에 선생님으로서 교단에 설 사람이다. 우리가 흔히 '중, 고등학교 남자 선생님'을 떠올릴 때 옵션처럼 따라붙는 '엄격함의 표본'과 '오덕들의 교주'라는 이미지는 참으로 까마귀와 까치 없는 견우와 직녀처럼 멀기만 하다. 하긴, B급 패러디에, 서브컬처의 대표주자 격으로 만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오덕들의 교주가 '시사IN'에 연재를 한다는 것도 작품과 그를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놀랍긴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교과서는 시대를 역행하고 역사는 앞이 아니라 기어를 R에 놓은채 열심히 지난 세월로 후진하고 있다만, '시사IN'에 연재를 하는 이가 교단에 서서 아이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가르치게 될 거라니, 적어도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소리는 하지 않을 게 아닌가. 

 

자, 이제 '본격적'으로 본격 만화 얘기를 해보자. 왼쪽이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1권의 표지이고, 오른쪽은 2권, 완결편의 표지다.
개인적으로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1권의 표지 디자인은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 뛰어든 각 나라의 국기를 배경으로, 히틀러가 지구 모양의 요요를 한 손가락에 걸고 있다. 요요놀이를 하는 듯도, 손가락으로 세계에 도전장, 내지는 선전포고를 한 듯 정면을 주시하는 히틀러의 모습. 약간은 희극지왕(주성치 말고) 찰리 채플린이 떠오르기도 하는, 수천 수만의 목숨을 담보로 미친 희극을 벌이는 듯도 하다. 패러디와 B급 유머를 실었으나 그 안에는 철학과 세계관을 단단한 뼈대로 세운 작품답게, 표지 디자인의 글씨체와 색감, 화면배치는 더이상 뺄 게 없을 정도로 적재적소에 자리를 잡고 있다. 

표지의 은유와 철학적 상징성: ★  

그림과 글씨, 디자인적 요소의 조화: (별 다섯 개 만점 중)

그렇담 새로 나온 2권의 표지.  

걸그룹의 원조격이랄 수 있는 소녀시대의 앨범 재킷을 패러디했다. 소녀시대의 앨범 재킷은 초반에 제로센 전투기가 삽입된 디자인이 떠돌아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굽시니스트는 제로센과 나치 친위대를 패러디한 소녀시대의 앨범 재킷을 또 한 번 패러디한 셈이다. 어찌 보면 2차 세계대전을 그리는 만화이니, 제로센과 나치의 배열은 코스프레틱한 소녀시대의 앨범 재킷보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세계대전 만화에 더 잘 어울린다 볼 수 있다. 굽시니스트 쪽에서는 소녀시대의 앨범 재킷 이전에 '앨범 재킷으로 인한 파문에 가까운 수준의 소란'마저도 본인의 만화 작품 표지의 이면에 깔아넣은 듯하다. 20C를 뒤흔들고 세계 권력의 판도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간 세계대전마저도 핫팬츠를 입은 걸그룹의 앨범 재킷에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코스프레 수준으로 거론되는데, 굽시니스트는 전쟁광들의 희극지왕같은 전쟁질이야말로 권력이라는 미친 놀음의 코스프레에 재미를 붙인 자들의 마스터베이션 수준으로 희화화 시켰다.

표지의 은유와 철학적 상징성: ★ 
그림과 글씨, 디자인적 요소의 조화:

(1권의 패러디와 은유는 문학적이고 세련되기까지 한데 반해, 2권의 패러디는 조금 더 거칠고, 육덕지다. 뒤틀어 씹는 맛은 2권의 표지도 이루 말할 데 없으나, 1권의 패러디가 살롱에서 오고가는 시니컬한 비꼼이라면 2권은 포장마차에서 시뻘건 개불을 앞에 놓고 소줏잔을 쳐올려 대운하를 논하는 듯 거칠고 직접적이다. 완성도에 상하나 경중이 있는 게 아니라 직설과 은유의 차이랄까? 1권 표지 디자인이 워낙 완벽하기도 하고.)  
 

그렇담 내용은 어떨까? 
일단 2권은 1권에 비해 더 방대한 양의 사실과 의견을 집어넣느라 조금 빡빡한 게 사실이다. 1권은 허무개그와 온갖 패러디가 난무하며 개그적 성향이 강했는데 - 그로 인해 각주를 달아 '각 장면에 삽입된 패러디를 설명한' 분량도 상당했는데,- 2권은 역사와 전쟁의 종결 앞에 더 많은 이야기, 더 깊이 파고 들어간 작가의 메시지가 늘어났다. 패러디는 여전하나, 패러디를 설명하는 부분이 줄었고 - 그래도 패러디는 여전해서, 자신의 매니아 지수를 측정해 볼 수 있다 - 그림에 비해 역사의 무게를 담아낸 텍스트의 무게가 상당하다.

표지 디자인의 문학적 은유와 깊이는 1권이 앞서나, 본문에 담긴 작가의 철학과 1년새 자란 생각은 오히려 2권이 더 무겁다고 봐야겠다. 가장 인상깊었던 장은 제14장 '동경과 남경' 편이다. 진주만 공습이나 세계 대전사의 굵직한 전쟁 신은 많은 글과 적당한 내용으로 굽신거리며 짧게 넘어간데 반해, 작가 굽시니스트는 '동경 폭격'과 '남경 대학살' 부분에서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자신의 철학과 고민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진중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 머나먼 상공에서 단추 하나를 누름으로써 수많은 민간인을 불귀신으로 만들어버린 미국의 일본 본토 - 동경 - 폭격과, 전쟁에 미쳐가는 일본 군인들이 소총에 대검을 장착하여 남경의 민간인들을 칼로 쑤시고, 베고, 강간한 지옥도 풍경을 대비시키며 무엇이 정의인가, 승리자의 학살은 타당한가, 물리적으로 1m 앞에서 칼을 휘둘러 목숨을 앗아가고 강간하는 살육과, 직접적으로는 희생자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은 폭격의 살육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를 묻고 있다. 작가 굽시니스트의 정리를, 인용해본다. 
 

결국...
역사의 신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바른 대의를 위해 손을 더럽힌 쪽이 용서받는다. 
어떻게든 역사는 지나가고 도시는 다시 번영한다. 



만화가 굽시니스트가 결코 '만화를 잘 그리는 만화가'에 속하지는 않지만, 어찌보면 굽시니스트는 '강풀과'에 분류되는 만화가라 할 수 있겠다. 만화가 강풀은 최근에 미디어 다음에 연재하는 작품들에서 상상도 못할 정도로 작화 실력이 성장했음을 보여주었지만, 그렇게 성장했어도 여타 만화가 중에서 잘 그리는 축에 속하냐, 하면 아니올시다,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작가이다. 하지만 강풀이 짜내는 만화의 스토리와 얼개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임을 부정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만화 스토리 면에서는 만화가 강도하, 윤태호, 강풀이 최고 수준이라 생각하는데, 그중 대중성과 완성도 양 쪽을 겸비한 이는 강풀이 유일하다 하겠다. 물론 작화 실력에서는 강도하, 윤태호 작가를 강풀이 넘볼 수 없다지만, 그것은 차치하고. 

굽시니스트 역시 1년의 시간을 숙성의 시간으로, 겨울철 땅 속에 묻힌 김장독 속의 김치처럼 스스로를 발효시키며 지냈다지만, 작화 실력만 놓고 보자면 '천상 만화쟁이'로 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를 논하는 그의 작품은, 아주 대중적이랄 수만은 없는, 오히려 골수 만화팬과 매니아들이 열광할 만한 B급 유머와 '일반인'은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패러디 천지라지만, 그가 역사와 세계를 논하는 서술의 밑바닥에 깔린 확고한 철학과 세계관은 대중 스토리에서 강풀 작가가 최고이듯 역사 패러디 물에서의 굽시니스트의 역량과 가능성에 기대를 걸기에 충분하다. <풀하우스>의 원수연 작가가 그랬다던가. 강풀 작가는 그림을 잘 그리면 안 된다고. 너무나도 뛰어난 그의 스토리라인이, 잘 그린 그림에 묻혀서는 안 된다고 그랬다던가. 어찌보면 굽시니스트의 약간은 허술해서 더 정이가는 그림은, 굽시니스트만의 세계관과 정치 철학을 부각시키고 드러내는 '아주 뛰어난 조연'을 감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판에서도 가끔은,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이 있기 마련이다만. 
 

창비에서 '인문서'에 가까운 정치 만화, 역사 만화가 나왔었다. 뛰어난 작화 실력에 의식까지 갖춘 최규석 작가의 <100˚C>가 그것이다. 초기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를 느꼈던 작가인데, 창비에서 연달아 두 권의 만화집을 내며 확실한 자리매김을 보여주었다. <100˚C>는 6월 민주항쟁을 극화체로 다루고 있는 진중한 작품이다. 뒷부분에는 작품을 접할 청소년과 어른들을 위해 YMCA스러운 해설도 덧붙였는데, 어찌보면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와는 스타일에서 극한에 서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최규석 작가가 우리 정치사의 뜨거운 소재를 다루었듯 굽시니스트가 현 정권이 물러난 후 우리 나라의 정치사를 한번 다뤄주었음 하는 소망이 있다. 극화체의 진지한, 끓는점에서 단 1도가 모자란 우리 사회에서 1도를 더 보태 민주화의 열망이 끓어오르기를 기원하는 작품(백도씨!)가 있다면, 굽시니스트처럼 개불 앞에서 소줏잔을 쳐올리는 작품도 분명 필요한 것이다. 이제는 이순신 장군 대신 세종대왕님이 굽어 살피시는 종로 한복판에, 하루아침에 산성이 쌓이고 청계천 마냥 4대강도 파헤쳐지는 이 시기, 한편에선 친일인명사전이 나오지만 한편에선 국민의 99%를 이루는 서민이 짓밟히는 이 세상을 굽시니스트가 통쾌하게 만화로 그려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제정신으로는 볼 수 없고, 현실이 패러디가 아닌가, 이건 믿을 수 없는 만화 한 판이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이 세상을, 굽시니스트가 후련하고 통쾌한 B급 유머로 한바탕 신나게 패러디해 주면 좋겠다. 굽시니스트가 한국사를 그린다면, 돈 주고 사서 볼 1이 바로 나인데 말이다.

정리한다. 

굴곡진 역사를 판타지로, 때론 끝날 줄 모르는 입담으로 소개한 문학 작품으로 멀게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있고, 가깝게는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 있다.(차마 현실일까, 싶을 정도로 묘사되는 독재자 트루히요의 악행이 나오는 이 작품을 읽고 있으면, 언뜻 우리의 군인 출신 대통령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리고 만화로는 창비에서 나온 <100˚C>가 있다. 세 작품 다 진지한 작품이다. 하지만 나는

창비의 것은 창비에게, 애니북스의 것은 애니북스에게,
라 말하겠다. 

이미 지나간 20C의 전쟁을 패러디한 <본격 제2차 세계대전>을 읽으며 웃고 울었지만, 21C의 현실이 그때로부터 얼마나 앞으로 나아갔나, 어찌보면 배밀이을 마치고 갓 기어다니기 시작한 아이의 몸짓보다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닌가, 아니 어쩌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오히려 뒤로 퇴행한 것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세월이 계속 이와 같다면, 굽시니스트의 영광, 굽본좌의 영광은 영원하리라. 그의 작품 소재는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므로.  

굽시가 통렬히 패러디할 한국사를 위해, 그 작품을 사기 위해 그 때까지 열심히 책값을 모아 두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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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봉투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제프리 브라운 고양이 시리즈
제프리 브라운 지음, 사나 옮김 / 애니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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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묘인, 애견인 인구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어찌보면 우리 나라가 선진국에 근접해 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갈수록 조직화, 개인화되는 사회, 누군가를 책임지고 거느리기보다는 홀로인 게 더 좋은 사회. 결혼은 늦어지고, 출산율 또한 낮아진다. 어느 소설에서는 혼자여서 외로운 게 아니라 둘이 있어 오히려 외롭다 했던가. 군중 속의 고독이 날로 심화되어, 모두들 안 그런 척하지만 홀로 남겨진 집 현관문을 들어설 때면 쓸쓸함과 처연함이 감돈다. 이 때 나를 반겨주는 외침. 멍멍! 또는 이야옹! 

반려동물 중 으뜸인 게 개와 고양이인데, 개를 사랑하는 사람과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캐릭터가 분명하게 나뉜다. 고양이를 기르는 쪽은 좀 더 시크함을 추구한다고 해야할까? 따뜻하고 가정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는 개와 달리, 고양이는 도도하고 우아하다. 개를 홀로 남겨두고 출근하면 개는 외로움에 몸을 떨며 우울증에 빠져들 확률이 높지만, 고양이는 퇴근하는 동거인(결코 주인이 아니다!)을 보며 "왔썹? 그러면 얼른 와서 내 앞에서 재롱 좀 떨어봐!" 하는 식이다. 의도든 아니든 간에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은 '쿨함'을 좇는 경우가 많고, 초등학교 짝지와 나란히 앉은 책상에 선을 긋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 투명의 선을 긋고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이런 사람들, 알고 보면 많이 외롭더라. 외로움을 타더라. 어찌보면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은 혼자여도 외롭지 않고, 외로움에 처하되 추하지 않고, 스스로를 외로움에 떨어뜨려도 태생적으로 도도하고 우아한 고양이에게서 위안을 얻는지도 모른다. 아, 성급한 일반화라 하여 돌 던져지는 소리 들려온다. 잠깐 피해 주시고.  

참으로 사랑스러운 고양이 관련 책이 있어 소개해 본다. 고양이를 사랑한다면, 고양이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외롭다면, 그래서 위로받고 싶다면, 이 책을 펼쳐볼 것을 권한다. 백발백중, 당신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위로와 안식을 느낄 것이다. 사실 난 어느 동생에게 이 책 중 한 권을 이야기하다가 조금 울 뻔했다. 옛날에 우리집 마당을 뛰놀던 강아지 예삐와 고양이 나비가 생각나서였다. 작명 센스 제로라고 욕하지 마시라. 시골에선 다 그랬다. 그리고, 옥탑방에서 자취할 때 기르던 토끼 꿈키와 아몽이가 생각나서였다. 여름 장마, 며칠째 비 내리던 날, 펫샵에서 파는 토끼가 아니라 시골에서 받은 토끼라 일절 사료 따윈 안 먹던 꿈키와 아몽이. 시장에 나가 푸성귀라도 얻어볼까 했는데 채소 파는 아주머니는 한 분도 보이지 않고, 자취방 앞 대학 캠퍼스에 숨어들어가 잔디며 뭐며 손에 잡히는 대로 닥치는 대로 풀을 뜯어왔으나 젖은 풀을 안 먹던 둘. 며칠 만에 비가 갠 어느 날, 꿈키는 몸을 쭉 뻗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묻을 수 없기에, 내 손으로 쓰레기 봉투에 뻣뻣해진 꿈키를 담았었다. 아, 또 말이 길어졌다. 아아, 또 눈물이 나려한다. 집어 치우고, 위로 받고 싶은 당신, 어쩌면 나 자신을 위해, 사랑스러운 야옹이들의 모습을 담은 책을 추려봤다. 그리고 또, 어디에선가 이 글을 보고 있을 어느 누군가에게도 말을 전한다. 울지 마요. 이 책을 보고 웃길 바라요.

단 한 쪽의 그림을 보고 꽂혀버리다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단 한 권의 책이다. '고양이 만화'는 사실 적지 않은데, 대부분의 고양이 만화가 의인화된 고양이, 심지어 직립 보행을 하며 사람보다 더 사람같은 고양이 캐릭터를 보여주는데 반해 이 작품은 고양이 그 자체를 보여준다. 작품 속에 '사람'이 등장하긴 한다만 '사람 남자'나 '사람 남자와 동거묘'에게 잔소리하는 '사람 여자, 엄마'는 조연에 불과하다. 고봉빠 - <양이가 투에서 져나오는 방법> 은 고양이의 일상을 그린 한 쪽 내지 두 쪽의 짧은 만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만화는 손바닥만 한 드로잉북에 끼적인 듯 허허롭지만 만화가 담아낸 고양이의 일상은 놀랍도록 디테일하다.  
책 뒷면에 보면 나오지만, 이 책을 맡은 편집자는 책을 만들며 잠깐의 인연을 맺었던 길고양이 '니케'와의 추억에 잠겨 행복했다고 한다. 편집자는 번역까지도 직접 맡았다는데, 그게 출판사의 원가 절감 전략인지는 모르겠으나 읽어나가는 동안 한 단어 한 단어를 옮기며 애정을 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무려 '자문'까지 받았다는데, S대 교수나 박사가 아닌 고양이 카페에서 활동 중인 애묘가가 나섰단다. 마지막으로 표지의 제목과 본문 말풍선 안의 캘리그래피(손글씨)를 맡은 분 역시, 고양이 '부르쓰', '에밀리'와 동거중인 애묘인이란다. 이 작품이 왜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작품인지는 이해 되셨을 듯. 
 

그럼 마지막으로, 내가 꽂힌 한 장면을 소개해 본다.


단 한 쪽의 그림이다. 사람의 대사라곤 훌쩍과 흑흑 뿐이다. 고양이의 대사도 고르르릉, 냥, 야옹, 야아옹 뿐이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 컷, 사람은 더 이상 훌쩍이지 않는다. 고양이는 그의 품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세상 어느 위로의 메시지보다 더 강렬하고 따뜻한 한 마디를 외친다. 고르르릉.

나도 누군가에게, 훌쩍이며 울고 있는 슬픔에 잠긴 누군가에게, 슬픔에 동참하며 이렇듯 온몸으로 위로를 전하고 싶다. 고르르르릉. 울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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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봉우리 1
다니구치 지로 지음, 유메마쿠라 바쿠 원작 / 애니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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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내려올 거, 뭐하러 올라가나. 그저 산아래 시리도록 차가운 계곡물에 수박 한 통 동동 띄워놓고, 매기나 잡어 등 민물고기 넣고 끓인 매운탕에 소주 한잔 하고 후식으로 수박 먹고 내려오면 그게 산행이지. 뭐하러 비싼 돈 내고 비행기 타고 외국까지 날아가서 죽을지도 모르는 겨울산에 올라? 거 다 외화 낭비야. 산은 모름지기, 관광버스 대절해서 차 안에서 노래도 한 곡조씩 뽑고 쏘주도 나발 불어가며 처음보는 아줌마 손 맞잡고 부르스도 튕기고, 올라갈 땐 남이더라도 내려올 땐 '자기'나 '허니'가 되어 손 꼭잡고 내려오는 게 산 타는 맛 아닌가? 국내에서 돈 쓰니까 내수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하고 얼마나 좋아? 암, 그게 애국자의 자세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에베레스트에는 왜 가려고 하는가? 라는 질문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 (Because it is there)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말한 이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불과 200여m 남겨둔 채 실종된, 그리고 실종 후 75년 만에 미라로 발견된 조지 맬러리다. 미라로 변해 버린 조지 맬러리의 시신은 아직도 에베레스트에 얼어붙어 있다. 제 한몸 가누기 힘든 설산에서 시신을 옮기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그저 유품을 정리하고 시신의 사진을 촬영하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 2005년 5월 18일,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고 하산하던 중 조난당한 박무택 대장이 있다. 만년설의 반사광에 서서히 눈이 멀어가며, 한참 어린 후배 장민 대원에게 '자신을 버려 두고' 혼자 내려가길 종용한 산사람. 그리고 끝내 연락이 끊긴 그 둘을 구하기 위해 홀로 산에 오른 백준호 부대장이 있다. "여기가 8,700미터가 넘어서 구조가... 구조가 어렵습니다." 백준호 부대장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다들 왜 이렇게 미련한 것일까. 왜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를까? 그런데 이보다 더 미련한 사람이 있다. 바로 산악인 엄홍길. 어쩌면 힐러리보다 더 먼저 '세계 최초의 에베레스트 정복'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조지 맬러리의 시신도 수습은 커녕 겨우 사진 촬영만 한 게 전부였는데, 산악인 엄홍길은 '무택이의 시신을 수습해 오겠다'며 산에 오른다. 다들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미련한 것일까. 하지만 결국 엄홍길은 박무택 대장의 시신을 수습하는데 성공한다. 비록 백준호 부대장, 장민 대원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지만 말이다. 

<음양사>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원작 <신들의 봉우리>를, <열네 살> <아버지> 등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극한의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가 경이로운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만화에 담긴 산이 어떠한가는, 미련한 산사람 엄홍길의 말을 빌려보자. 

정복이란 말은 쓸 수 없다. 산이 잠시 내게 허락했을 뿐. 눈이 시리도록 생생한 산경의 묘사에 내 입에서 입김이 서려나오는 듯하다.
_ 산악인 엄홍길 (세계 최초 히말라야 16좌 등정)
 

산이 좋아 산으로 돌아간 '무택이'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산에 오른 산악인 엄홍길, 그가 권하는 책. 과연 어떨까 싶어 펼쳐들었다. 과연, 다니구치 지로는 우직하다. 그의 펜은 정직하여 돌아가는 길을 모른다. 산사람이 정상을 향해 아래가 아닌 위를 쳐다보며 올라가듯, 다니구치 지로의 펜은 가장 좋은 그림을 위해 그저 위를 쳐다보며 달려나간다. 원작자 유메마쿠라 바쿠 역시 자신의 쓴 글임에도 다니구치 지로에 의해 재탄생한 <신들의 봉우리>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다니구치 지로의 산에 대한 묘사는 압도적이다. 고도감이 있으며, 무시무시하다. 작품이 완성되어 다니구치 지로판 <신들의 봉우리>를 읽을 때, 독자는 그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해냈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국내에는 이제 겨우 소개되었지만 지면에 연재되어 먼저 작품을 접한 세계인들은, 2005년에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최우수 작화상을 수여함으로써 다니구치 지로가 창조한 산의 세계에 경의를 표했다. 

그런데 우려를 표하는 이도 있을 수 있겠다. 원작이 있는 경우가 아닌 다니구치 지로가 글과 그림을 진행한 <열네 살> <아버지> 등을 보면 남성위주의 시선을 느낄 수 있고, 특히 <아버지>의 경우는 부자지간의 갈등과 해소가 주를 이루지만 아버지의 사라짐으로 인한 어머니의 고통이나 여성의 상처는 전혀, 라고 할만큼 드러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뜨내기 남성들은 '여성'과 '산'을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에베레스트를 몇 번째 올랐냐, 보다는 '처음 올랐느냐'가 더 중요하듯이, 같은 산을 오르고 어느 여성을 '정복'하더라도 '초등정', '첫 번째 관계'를 남성들, 마초들은 더 중요시한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지만 누구도 밟지 못한 산 정상에 깃발을 꽂는 것'이야 말로 남성들이 들어찬 뒷골목에서의 음담패설 중 가장 영광스러운 정복기이자 명예로운 훈장이다. 그런데 남성의 시선을 지닌 이가 험산에 등정하는 거친 사내들의 이야기를 옮겼다니, 은연 중 마초가 미련스럽게 산을 기어오르는 만화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우려는, 기우라는 것을 밝힌다. 물론 <신들의 봉우리>에 중요한 여성 캐릭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고독하고 상처를 지닌 남성 캐릭터가 안식을 얻는 따뜻한 품, 정도랄까? 하지만 <신들의 봉우리>는 '남성'만화가 아니라 '인생' 만화 내지는 '사람의 만화'라 말하는 게 옳다. 왜 미련스럽게 산을 오르는지, 왜 산이 전부이며 자신의 증명이며 존재 가치인지가 은연중 드러나며 대비되는 캐릭터들이 있는데, 고독하고 마초 같으나 실은 그 안에 보듬어지지 못한 얼마나 여린 감성이 있는지, 연약한 존재가 웅크리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흑백으로 표현되는 극한의 상황, 극한의 작화 속에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자연 앞에서 왜소한 인간이 왜 자신의 전부를 걸어 산에 오르는지 감동 가득한 다큐멘터리로 담담하게, 때로는 손에 땀을 쥐게 표현하고 있다. 과연, 명불허전, 다니구치 지로다.



사랑하는 그녀가 떠났다. 결혼을 부담스러워하는 그녀는, 친구와 결혼하겠다고, 오래 전부터 그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가 사랑한 '친구'는, 산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무언가 스스로에게서 대답을 얻기 위해 카메라를 짊어지고 산으로 떠났으나 그의 앵글에 잡힌 것은 추락하는 두 명의 비명 없는 죽음. 산은 비명조차 앗아갔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그들은 낙화하는 벚꽃처럼 점점이 떨어져간다. 
 

가족을 잃은 천애고아, 산 이외에는 자신을 증명할 게 아무것도 없는 천재 등반가.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자신을 존경하는 어린 후배. 선배와 후배는 설산을 오르고, 후배는 등산 도중 추락하여 몸이 상한다. 줄 하나로 연결된 둘. 한 명이 죽어야 한 명이 살고, 둘이 함께 살 길은 없다. 후배는 스스로 줄을 끊어 선배를 살리고, 선배는 모든 이들로부터 '자신이 살기 위해 줄을 끊은' 비정한 산악인으로 몰리게 된다. 실력은 충분하나 세상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스폰서조차 구하지 못해 세계의 험산들에 다가갈 수도 없는 비운의 천재. 어두움의 천재. 어느샌가 나타난 '빛의 천재'는 그의 전부였던 산을 하나씩 정복하여, 오히려 그보다 빠른 걸음으로 세계 등산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나간다.  

그녀를 잃은 사진기자 그와, 후배와 세상을 잃은 천재 등반가. 둘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음에도 산을 좇고, 산에서 해답을 구한다. 그들은 과연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끝내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인생이란, 결국 산에 오르는 것이다. 저 유명한 엄홍길이 열여덟 번쯤을 도전하여 스무 번을 성공하였다던가. 아니, 스무 번을 도전하여 열여덟 번쯤을 성공하였다던가. 내로라 하는 산사람인 그도 절반 가까이는 '실패'를 간직하고 있다. 하물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은 절반 이상, 아니 거의 대부분의 도전이 실패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은 내게서 이미 멀어져 있으나, 절벽에 줄 하나로 매달린 듯, 인연의 끈을 끊기는 너무 고통스럽다. 줄을 끊어야 한 명이라도 살 수 있지만, 한 명은 상할 수밖에 없다. 둘 다 사는 길은 없다. 산은 모든 것을 보고 있으나 개입하거나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내가, 우리가 오르고자 하는 정상, 어쩌면 꿈이라는 목표도, 대부분의 도전에 실패라는 답을 줄지도 모른다. 인생은 보고 있으나 결코 친절한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내가 살기 위해선 또 어떤 줄을 끊어야 하는가. 그 줄을 끊은 후 내게 돌아올 세상의 시선은 무엇일까. 

하지만 누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야겠지. "산이 거기 있으니까. 이게 내 인생이니까."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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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한국동시 100년 애송동시 50편 문학동네 동시집 9
강소천 외 지음, 양혜원 외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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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시간을 견디는 것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을지라도, 그 아름다움은 길어야 5년, 후로는 늘씬한 몸이나 탄력있는 피부가 아닌 그 사람 자체의 매력으로 친구처럼 동지처럼 함께하는 시간이 흘러간다. 아니, 외모로만 견디라면 도무지 못 견딜 것이다. 흰 쌀밥도 먹다보면 물리는 법, 눈이 부셔 아름다운 외모라 할지라도 아름다움이 눈에 익으면 어둠이 눈에 익어 눈이 퇴화된 두더지마냥, 아름다움도 식상해지고 일상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람은 아름다움 그 너머의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흘러 퇴화되는 아름다움 말고, 영원히 변치 않을 그 무엇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 부르는 작품들, 고전 명작들은, 시간을 견디고 심지어 이겨내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널리 읽히고 권할 만하다. 독자의 입맛은 세대마다 바뀌며 문학을 비롯한 책의 세상에도 지는 해와 뜨는 달이 있는 법. 독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갈구하기에 '노장'으로, '거장'으로 살아남기가 쉽지가 않다. 그 와중에 100년을 견뎌왔다면, 정말 클래식이라는 칭호를 선사할 만하다. 

새로 나온 동시집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제목을 들으면, 아마 열이면 열 동요 <고향의 봄>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동요 '고향의 봄'은 알아도 시인이자 동화작가인 이원수 님의 동시 '고향의 봄'을 떠올리긴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온 국민이 즐겨 부른 그 노래, 원전인 그 동시 '고향의 봄'이, 소년 이원수가 열여섯에 발표한 작품이란 걸 떠올리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작년 2008년은 현대시 출범 100주년이 되던 해였다. 시인 최남선의 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소년>에 발표된지 햇수로 100년을 채운 것이다. 100년, 강산이 열 번 이상 탈바꿈할 세월이다. 한국시, 동시는 100년의 세월동안 계속 허물을 벗어왔고, 허물을 벗는 만큼 자라고 성장해왔다. 그리고 100년을 견디고 자라온 경사스러운 해를 기념하여 어느 일간지에서 특별한 지면을 마련했다. 한국동시문학회 회장 이상교 선생님(동시작가)를 비롯하여 수많은 동시인, 시인, 아동문학평론가 들이 선정위원으로 모여 100년을 빛낸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시들을 추려 뽑은 것이다. 새로 나온 동시집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는 선정위원의 다수 추천을 받은 동시만을 가리고 추려 50편을 꼽은 후 한 권의 동시집으로 엮은 것이다. 한 편, 인용해본다.  

 

반달

윤극영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추이는 것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우리가 알고 불렀던 수많은 동요들, 찾아 보니 여기에 다 모여 있다. 그러므로 동시집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는 '읽는 동시집'이 아니라 '부르는 동시집'이라 말하는 게 어울리겠다. 동시 '반달'은 어릴 적 하던 '쎄쎄쎄' 류의 놀이로 수많은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작품이다. '국민학교' 시절, 저 노래를 부르며, 서로의 손등을 부딪히며 양 손을 교차하는 여자애들의 손동작과 그 빠름을, 그저 입을 헤벌리고 바라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동시집을 읽으면, 아니 부르면, 언어의 아름다움과 동시의 순수함과 함께 추억을 건져올릴 수 있다. 옆에서 지켜보다 결국 나도 쎄쎄쎄를 배웠고, 푸른 하늘 은하수~를 부르며 손놀이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여자애들의 빠름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아, 이 책을 읽으니 따라잡을 수 없는 세월을 지나쳐 늙수그레한 어른처럼 시들해져 버린,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한 동심에게 미안해진다. 고작 삼십여 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해 내 푸른 마음은 색이 바래 버렸는데, 우리가 부르던 노래, 우리가 부르던 동시는 100년을 견디고도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근 것처럼' 푸르고 푸르다. 

우리 아이들은 멤버가 다섯 명, 아홉 명 씩이나 되는 가수들의 이름,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다 외우고 말하는데, 부모들은 도무지 누가 누군지 모르겠고, 거리에서 쇼윈도를 비집고 흘러 나오는 노래들이 다 그게 그거 같다. 아이들은 촌스럽고 뒤떨어진다며, 냄새나는 똥을 피하듯 부모와 어른을 멀리한다. 가수 이름 하나 못 외우는 게 왜 창피한 일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알까? 엄마 아빠들이 부르던 보석 같이 아름다운 노랫말들, 동요들, 동시들을. 하나같이 어리고, 잘생기고, 늘씬한 요즘 가수들은 줄줄이 꿰고 있지 못하지만, 엄마 아빠들은 부르면 따뜻해지는 동시 중의 동시, 클래식을 알고 있노라고 자신있게 말해주자. 아이들은 그저 이 동시집을 '읽고 있을' 때, 아이들에게 이 동시집으로 '노래를 불러줄 수 있다'는 것. 한국의 시와 100년을 함께 살아온 어른 세대로서 받은 축복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아이보다 책갈피에 단풍잎을 끼워넣던 까만 교복의 할머니들, 호출기에 '8282'를 입력하던 젊은 엄마아빠들이 가슴에 꼭 품고 간직할 클래식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시간을 견딘 클래식, 감히 '한국인의 애송 동시'라 말할 수 있는 동시집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를 힘주어,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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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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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이다. 1Q84 라는 것은, 9와 Q의 일본어 발음이 유사하기에 1984년을 희롱하듯 갖고 논 것이다. 제목을 가지고 놀기로는, <아키라>의 오토모 가즈히로 이후로 가장 천재적인 일본 만화가로 꼽히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 <철 크리트>도 빠지지 않는다. 철근 콘크리트가 아니라 철콘 근크리트다. 유치원 아이들 옹알거리는 말투와 말장난을 흉내내어 철근 콘크리트가 아니라 철콘 근크리트로 제목을 지었다는데, 어눌한 제목과 달리 본문 들춰보면 피칠갑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들이 다 큰 형님들 머리를 배트로 휘갈겨 피를 봐 주신다. 철콘 근크리트의 세계에서 머리에 피가 안 마른 건 애들이 아니라 어른이다.



<철콘 근크리트> 본문 중 

말장난이라 하나 글과 그림으로 먹고 사는 이들이 가장 중요한 제목 짓기에 한량처럼 그저 희롱만 던져두었겠나. 말장난 같은 제목 뒤로는 분열된 세계, 갈라진 세계, 오해와 다툼이 도사리고 있다. 제목만 보자면 술 취한 한량의 꼬부라진 혀로 내뱉은 발음 같으나, 속을 들춰보니 수풀에 숨어 갈라진 혓바닥 날름거리며 틈만 노리고 있는 살모사 대가리 같다. 놀고 희롱하듯 제목을 굴려댄 것은, 결국 강하고 단단한 세계에 제대로 한방을 지르기 위해 숨죽이고 있던 것이다. 몸을 많이 숙일수록, 더 많이 뛰어오를 수 있는 법이니까.

<1Q84>는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대한 하루키식 재생산이라 할 수 있겠다. 전함 포텐킨의 오데사 계단신이 민중에 대한 권력의 학살이었다면, 오데사 계단신에 대한 오마주인 언터쳐블의 계단신은 민중의 지팡이가 갱단을 상대로 내지르는 통쾌한 액션이었다. 조지 오웰의 <1984>가 오데사 계단에 임한 빅브라더의 군림이었다면, 하루키의 <1Q84>는 '법의 이름으로' 갱단을 학살하는 언터쳐블의 통쾌함처럼 힘을 가진 자, 주로 남성 권력에 대한 스타일리시 여성 킬러의 아이스픽(얼음송곳) 법집행이 번뜩인다. 물론 여성 킬러에게 법집행의 권위를 부여한 자는 없다. 그 권위를 부여한 것은 그녀 자신이다. 그녀는 어디에서부터 뒤틀린 지 알 수 없는 세계, 사랑하는 그가 없는 세계, 두 개의 달이 뜨는 비현실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 바로 1Q84년의 세계.  

그녀가 보통 이들처럼 1984년에 살았다면, 그녀는 아이스픽 대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철콘 근크리트>로 돌아와 보자. 1984년을 살지 못하고 1Q84년에서 살아가는 여성 킬러는 어느 순간 자신의 세계가 왜곡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철근 콘크리트가 아닌 철콘 근크리트의 세계에 사는 두 주인공 꼬마 역시 세상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 있다 생각하지만, 안정되고 단단하다 생각했던 그 세계 역시 빅브라더의 손길 아래 서서히 무너져간다. 두 꼬마 주인공은 원치 않아도 철콘의 세계에서 서로 멀어지고, 걷잡을 수 없는 폭력과 위험의 세계로 내던져진다. 1Q84의 여성 킬러 아오마메가 사랑하는 덴고와 멀어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폭력과 살인의 세계로 떨어지듯, 사랑하는 사람의 진폭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폭력은 가까워진다. 아니, 멀쩡한 듯 보였으나 사실은 진작에 왜곡되어 있던 현실에 눈뜬다고나 할까? 1984년과 철근 콘크리트의 세계에서 다른 '보통 사람들'과 같이 일상을 살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왜곡되고 뒤틀려 버린 세계를, 1Q84년과 철콘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비로소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진짜 세상'이 그들 앞에 열린 것이다. 오호, 영화 매트릭스런가. 모두와 함께 걸으면 '현실이라고 믿는 현실'을 살 수 있으나, 각성하여 눈을 뜨면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현실'이 눈 앞에 도래하는 것처럼, 1984년과 철근 콘크리트에서 살짝만 희롱하고 말장난 하듯 벗어나면 미쳐버린 세상, 폭력과 권력의 세상이 도래한다. 진작부터 있었던,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현실이 말이다.

 

<잘자 뿡뿡> 본문 중

 
1Q84의 여성 킬러 아오마메도, 날 때부터 킬러였던 것은 아니다. 아오마메에겐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데, '증인회' 신자인 부모의 손에 이끌려 원치 않는 포교활동을 다니며, 학교에서는 식사 전 이상한 기도문을 외워야만 했던 기억이다. 점심시간, 모두가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또박또박 이상한 기도문을 외운 후 홀로 식사하는 아오마메. 놀림과 따돌림을 당하던 아오마메에게 처음으로 '인간적인 시선'을 보낸 어린 덴고. 사고가 나도 수혈을 거부하고 과다출혈로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독실한 믿음의 표현이었던 증인회 신자인 아오마메는, 덴고의 시선에서 피보다 뜨거운 사랑을 느낀다. 

이쯤 되니 만화 한편이 또 생각난다. <소라닌>으로 유명한 아사노 이니오의 <잘자 뿡뿡>이다. 두 꼬마가 느와르를 펼치는 철콘 근크리트나, 노르웨이의 숲을 거니는 하루키처럼, <잘자 뿡뿡> 역시 뭔가 15도 쯤 일상에서 뒤틀려있다. 주인공 뿡뿡은, '철근 콘크리트'를 '철콘 근크리트'로 발음하는 유치원생이 그린 것마냥 선 몇가닥으로 그려진 '사람도 아니고 새도 아닌 이상한 생명체'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대가리 뿡뿡이 좋아하는 소녀는, 엄마를 따라 원치않는 포교활동을 다니는 소녀 아이코다. 엄마 손에 이끌려 포교활동이라니, 아이코나 아오마메나 매한가지, 따돌림 당하는 포교 소녀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 이성에게 꽂히는 것도 <잘자 뿡뿡>이나 <1Q84>나 매한가지. 아이코는 뿡뿡에게 자신을 이 세계에서 구원해달라 말한다. 점심 때마다 주술 비슷한 기도문을 외우던 <1Q84>의 아오마메에게 덴고가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던 것처럼, 아이코 역시 인간이 아닌 새대가리 뿡뿡에게 자신을 구원해줄 것을, 자신의 믿음 속 신이 아닌 새대가리 뿡뿡에게 요청한다. 

 

<잘자 뿡뿡> 본문 중

세상이 '비정상'이라 일컫는 이들에게는 '진짜 현실'과 함께 희망과 동경의 낙원이 펼쳐져 있다. 중학생이 되어도 어떤 친구는 여전히 UFO 또는 정체불명의 신과 교신하며, 어른들 포교활동의 희생양인 소녀는 인간이 아닌 새대가리 뿡뿡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하지만 살펴보노라면, 새대가리 뿡뿡과 외계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 이상한 친구들 빼곤 모두가 비정상이다. 우리가 '정상'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자위하며 만족해하는 삶이, 사실은 지독히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삶인 셈이다. 오히려 1Q84와 철콘의 세계, 새대가리 뿡뿡이 말을 하고 걷는 세계가, 우리가 믿는 '현실'보다 더 인간적이고 사랑을 품은 삶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여지껏 그의 어떤 작품보다도 방대한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하루키가 내놓은 5년 만의 장편소설이며, 그의 문학을 집대성한 작품이라 칭송받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나는 하루키가 여느 무협지처럼 외딴 동굴에 떨어져 무공비급을 얻는 바람에 갑자기 내공이 증가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갑자기 <1Q84>에서 신묘막측한 문장을 선보였다거나, 세상이 놀랄만한 엄청난 소재를 등장시켰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 킬러라는 것만 해도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소재 아니던가. 하지만 <1Q84>를 일컬어 하루키 문학을 집대성한 작품이라고 평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하루키의 시선이나 응대가 달라져서가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저 시대를 상실했거나, 양을 찾아 모험을 떠나거나, 달리기가 좋다고 내처 달리는 할아버지 작가가 아니라, 낯선 1Q84의 세계에 던져졌으나 현실에 눈뜨고 현실을 개척해나가는 적극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하루키가 <1Q84> 전과 후로 나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기에서 애액이 나오지 않아 느끼기가 불편한 여성처럼 상실의 시대, 불감의 시대에서 외롭고, 떠돌고, 꿈을 꾸는 청년들, 쿨해 보이지만 사실은 지독히 외로운 청년들이 거리를 누비는 세계가 아니라, 비록 남과 다른 1Q84의 시대를 살아도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덤벼들기에 충분히 그들은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하루키가 느끼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일본인들, 정신 없이 살아오면서, 때론 누군가를 짓밟고 때론 누군가에게 짓밟히면서, 가열찬 투쟁과 그보다 더 뜨거운 경제성장 속에서 1984년의 수면 아래 진짜 세계, 1Q84년의 세계는 잉태되었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 어린 아이를 거리로 내모는 이들, 수혈을 거부하여 수술대 위에서 죽어가더라도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믿음을 부여잡는 이들, 말도 안 되는 믿음에 투신할 만큼 붙잡아야할 확실한 자아가 없는 이들, 쿨해 보이고 멋져 보이며 프리섹스를 즐기는 듯하지만 그만큼 껍데기뿐인 청년들. 느끼지 못하는, 상실한 사람들, 불감의 사람들. 새대가리가 더 인간적이고, 꼬마의 주먹에 희롱당하는 어른들, 권력들. 하루키가 써온 쿨해 보이지만 공허한 이야기들. 
 

하지만 하루키는 1Q84년의 밤하늘에 두 개의 달을 띄워놓고, 1984년을 사는 이들은 그저 한 개의 달을 볼 뿐이지만, 어딘가 당신의 진짜 사랑은 당신처럼 두 개의 달을 바라보고 있다 말한다. 아이코와 뿡뿡이 되었든, 철콘 근크리트의 두 소년이 되었든, 당신과 똑같은 두 개의 달을 보는 이가 세상에 있다 말한다. 왜곡된 이 세계, 반듯하고 질서 정연해 보이고 경적 한번 제대로 울릴 줄 모를 정도로 신사적이고 배려하는 일본인들이 가득한 듯하지만 혼네와 다테마에가 공존하는 세계. 겉으로는 평화로운 일본의 세계이지만 그 아래에는 공허함을 쿨함으로 포장한 프리섹스와 번성하는 섹스산업, 야쿠자와 폭력, 신흥종교와 독가스 테러, 초등학생이 더 어린 '어린이'의 목을 잘라 담장 위에 올려놓는 지독히 비현실적인 현실이 있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러한 공허함과 1984년으로 멀쩡하게 포장된 삶 아래 1Q84년의 진짜 세계에서 '진짜 사랑'을 찾는 '진짜배기' 아오마메와 덴고가 인간으로서 살고 있음을 얘기한다. 

1Q84 이전의 하루키가 공허와 부적응의 표피를 핥으며 초현실과 신화를 감싼 당의정 같은 얘기를 선보여왔다면, 신작 <1Q84>는 쓴 게 몸에 좋은 것이다, 성장하기 위해 난 약을 삼킨다, 라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난 무라카미 하루키, 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신뢰하지 않지만, <1Q84>이후로, 예순이 넘은 하루키에게 비로소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지오웰이 <1984>를 세상에 선보인 해에 태어난 무라카미 하루키, 예순이 넘은 노작가를, 나는 비로소 신뢰하게 되었다. <1Q84> 2권이, 몹시 기다려진다.  

아직 <1Q84>의 2권을 맛보지 못했다. 아직 합쳐져 하나를 이루지 못한 두 개의 달 아래 사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사랑은 더욱 부각될 것이며, 하루키의 초현실적인 세계는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하루키를 통해, 하루키의 작품을 통해 뭔가 답을 찾을 것 같다. 문학에 꼭 답이 필요한 게 아니며 문학이 세상을 바꿀 필요도 없겠지만, 공허함을 노래하는 <1Q84> 이전의 하루키가 <1Q84>이후로 어떤 결말을 선보일지, 벌써부터 잠이 아까워진다. 
아, 잠을 아껴가며 볼만한 책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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