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표적인 추리소설 작가이자 다작의 작가로도 잘 알려진 '히가시노 게이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신의 사생활이 거의 노출되지 않은 작가이다. 데뷔작 이후 20여 년에 걸쳐서 50편 이상의 작품을 썼으니 그의
작품을 따라 읽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몇 년이 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교통경찰의 밤>을 읽게 되었는데, 그 책
속에 담겨 있는 작가의 '10년만의 후기'가 인상적이었다.
이 책이 간행된 것은 약 10년전이다. (...) 어떤
작품을 써도 팔리지 않고 찬사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여러 분야에도 도전했다. 아이디어를 짜내기보다 소재거리를 찾아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한심한 짓을 하기도 했다. <교통경찰의 밤>
중에서 p.268
지금은 꽤 잘 알려진 추리소설 작가에게도 이런 시기가 있었다고 하니, 지금에야 에피소드로 넘길 수 있겠지만 당시의 작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교통경찰의 밤>에는 6 편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는데, 작가 자신이 자동차 부품 회사 엔지니어였던 경험과 교통사고라는 주변의
경험을 토대로 다양한 이야기를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가 소름이 끼치도록 섬뜩하게 다가온다. 처음에 한 두 편은
결말을 예상해 보기도 했지만 이내 섣부른 결말을 예측할 수 없음을 알게 되면서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관심이 가게 된다.
그의 작품들 중에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백야행>,< 탐정클럽>, < 교통경찰의 밤>, < 용의자 X 의 헌신>
등을 읽었는데, 작품들마다 섬뜩한 살인사건이 담겨
있었으며, 추리소설의 묘미인 기막힌 반전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는
살인사건도, 이야기를 풀기 위한 추리도 담겨 있지 않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얼기 설기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야기와 이야기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치 흩어진 퍼즐이 하나 하나 제자리를 잡아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퍼즐 맞추기라면 우선 큰 그림을 알고
있기에 큰 그림을 생각하면서 작은 조각들을 이리 저리 꿰맞추어 보고 안 맞으면 다른 퍼즐 조각을 다시 맞추어 가면서 큰 퍼즐의 판을 완성시키게
되는데, 이 소설은 그렇지가 않다. 각 장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다가, 방심하고 다음 이야기를 넘어가서 읽다보면 그 이전에 이미 나왔던 이야기와
또 다른 이야기가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모여서 큰 틀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도 30 여 년이라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넘나들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아마도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에서도 힐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소설에 따라서 치밀하게 짜여진 구성과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으로 인하여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어떤 소설은 너무도 흔한 내용과 급조한 듯 결말을 짜맞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작품이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모든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누군가 조력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건 한
작가가 그렇게 왕성하게 작품을 쓰기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그가 추리소설작가이기는 하지만 본격 추리소설만 쓰는 것이 아니라, 추리소설의 틀
속에 학원물, 서스펜스, 패러디, 엔터테인먼트, 로맨스 등의 다양한 장르를 가미시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에 베일에 가려진 작가에 대한 사생활이 그런 추측을 해보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의 소설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영화로 만들어진 <백야행>,
<용의자 X 의 헌신>이 있어서 비록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그의 작품은 잘 알려져 있다.
얼마전에 출간된 <몽환화>는 앞의 작품들과는 또다른 재미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편소설이다. 혹시 노란색
나팔꽃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어릴 적부터 나팔꽃을 많이 보고 자랐는데, 아버지가 심어 놓은 장미와 라일락, 사루비아, 봉숭아, 과꽃 사이에서
덩굴을 따라 살짝 얼굴을 내밀면서 뻗어나가는 나팔꽃은 아침 일찍 피곤했다. 꽃이 지면 황금색에 가까운 씨가 맺히는데, 그것을 벗기면 까만 씨가
몇 개 나오곤 했다.
그래서 낯익은 나팔꽃, 나팔꽃은 청자색, 분홍색, 흰색 그리고 테두리는 흰색이고 가운데는 분홍이나 청색이니 분명 노란색
나팔꽃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일본의 에도 시대에는 노란색 나팔꽃이 있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노란색 나팔꽃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고 한다.
사라진 노란 나팔꽃을 소재로 쓴 <몽환화>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독자들은 이미 노란 나팔꽃의 추척하는 미스터리의 세계로 빠져 들게 된다. 그런데 처음부터 2개의
프롤로그가 심상치가 않다. 예측할 수 없는 결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조차 상당부분을 읽을 때까지 감(感)을 잡을 수 없다.
첫 번째 프롤로그는 도쿄 올림픽이 일어나기 2년전인 어느
여름날, 평범한 건설회사 직원인 신이치는 출근길에 누군가가 휘두른 일본도에 찔려서 죽고, 그의 아내인 가즈코는 가까스로 생명을 구하게
된다.
두 번째 프롤로그는 첫 번째 프롤로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 같은 이야기로 다이토 구 이리야에서 칠석에 열리는 나팔꽃 시장 순례 이야기이다. 가모 가족은 연례 행사로 나팔꽃 순례시장을 가게 되는데,
14살 소타는 가족 행사로 나팔꽃 순례를 하던 중에 이바 다카미를 만나 첫사랑을 하게 되지만 집안의 반대로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급진전이 되어서 소타 집안과 리노 집안의 이야기로 바뀌게 되는데....
올림픽 수영선수였던 리노는 갑작스럽게 사촌인 나오토의 자살을 접하게 되고, 얼마 안 있어서 홀로 살던 할아버지가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된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전에 리노는 식물을 연구하던 할아버지가 많은 꽃을 재배하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을 블로그에 올려주는 작업
중에 할아버지가 은밀하게 키우는 노란꽃 화분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살인 사건 이후에 그 노란꽃 화분이 없어지니....
원자력 공학을 공부하던 소타는 리노와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과정에서 그의 형이 노란꽃에 관심을 가지고 사건 형사인
하야세와 접촉을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할아버지가 마지막 피웠던 노란꽃, 그러나 세상에 알리기를 꺼렸던 노란꽃. 그 노란꽃을 노리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리노의 사촌인 나오토의 죽음과의 연관은?
그 노란꽃은 에도시대에 번성했으나 지금은 없어진 노란 나팔꽃.
" 짙은 노란색을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카로니토이드 계열의 색고사 꼭
필요해. 이것은 현존하는 나팔꽃에는 포함되지 않아. 그래서 환상의 꽃인 거지." (p. 217)
" 어떤 꽃은 피워도 좋지만 노란 나팔꽃만은 쫒지 마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것은 몽환화이기 때문이라고 했어"
" 몽환화?"
" 몽환(夢幻)의 꽃이라는 의미일세, 그 뒤를 쫒으면 자기가 멸하고
만다고, 그렇게 얘기했어. " (p. 220)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퍼즐 맞추기 그리고 씨줄과 날줄의 만남이 이 소설의 결말에 도달하게
해준다.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소설 속의 이야기를 분류할 수 있는데, 한 축은 리노와 소타가 사건 해결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면서
알아내는 이야기, 그리고 한 축은 소타의 형인 요스케와 이 사건을 맡은 형사인 하야세가 노란꽃의 진실을 찾아 가는 과정의 이야기이다.
분명 어떤 연결도 감지할 수 없었던 독자들은 MM사건이 결말에 이르는 힌트임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마릴린 몬로의
팬이었던 사람이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일으키게 되는 살인사건, 그리고 나팔꽃의 진실만을 찾던 독자들은 노란 나팔꽃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된다. 전혀 감지 할 수 없었던 노란 나팔꽃, 그런데, 과연 꽃 자체에 결정적인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던가...
여기에 이 소설이 가지는 독자의 허를 찌르는 한 방이 있다.
몽환화, 몽환, 환각... 마성의 식물.
작가는 이 작품을 이미 10년전에 <역사가도>라는 잡지에 연재하였는데, 당시에 작가는 자신이 역사물에관련된
소설을 쓰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집필을 꺼렸지만 편집자가 권유해서 썼다가 다시 그 틀만 남겨 놓고 다시 쓴 소설로 긴 기간이 약
10년이 걸렸다.
<몽환화>를 읽게 되면 홍보글에는 '에도시대'라는 말이 나오지만 역사적 사실은 거의 이 소설에 담겨 있지
않다. 오히려 노란 나팔꽃을 다시 재배하기 위한 식물학자의 이야기 속에서 식물에 관한 이야기와 소타가 자신이 전공한 원자력 공학에 회의를 느끼게
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더 심도있게 다루어진다.
그렇다면 <몽환화>를 통해서 작가가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몽환화인 노란 나팔꽃이 없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대비하여 원자력 발전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원자력은 분명
인간들에게 이로운 점이 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해(害)가 존재한다. 그래서 소타는 자신의 전공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원자력 발전, 그건 지금에 와서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높은 기술이 요구되니. 작가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에 이 소설을 새로 쓰기로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소타군." 다카미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모른
체해서 없어지느 거라면 그대로 두면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이어받아야 하잖아? " (p.
409)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 (p. 420)
<몽환화>는 처음에는 얽히고 설킨 이야기의 매듭을 풀기가 힘들어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지 궁금증이 많이
드는 이야기이지만 한 겹, 한 겹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그 존재를 잊어 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사라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에, 그리고 사라진 것을 다시 존재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원자력과 관련된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부각시키고 싶었던 이야기임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책의 말미에 크게 깨닫게 된다.
추리소설이라는 하지만 범인 색출에 집중되는 그런 추리소설이 아닌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추리소설이기에
<몽환화>가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탄탄한 구성과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그 어느 추리소설 보다 돋보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