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 - 개정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 박영사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50여년의 인생을 진리에의 길에 바쳤다. 그 동안 그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 강사를 시작으로 초기에는 성운설 등의 자연과학적인 연구에 바친 후에도 그러나 진리에 대한 그의 갈증은 다 해소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바로 앞시대의 영국의 회의론자 데이비드 흄에 의하여 "독단의 꿈"에서 깨어난 충격이 이 위대한 저술의 집필작업에 그가 착수하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으리라. 또한 당시의 시대 상황도 그에게 이 작업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의무감을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당시는 서구사에서의 대 변혁의 시기로 종교적이고 정신적가치가 헌신짝처럼 조소되고 물질적 숭배가 새로운 신앙으로 스스로를 혁명가로 생각하는 속물 지식인의 마음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경험론자에게 특히 흄에 있어서 플라톤 이후 그토록 서양사상사에서 존중되던 "이성"이란 것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것이 현실이었다. 데카르트의 이성론은 오히려 유물론적인 의미로 잘못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고 대륙과 영국은 인식에 있어 이성이근본적인지 아니면 경험이 보다 근본적인지에 대해 소모적인 논쟁에 몰두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항거로 칸트는 펜을 들었고 그간의 인생에서 얻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때문인지 이 위대한 작업은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이성에 대한 이러한 양 극단에 이른 태도는 사실상 오늘 날에 비유컨대 한낱 광기어린 이데올로기적 대립과도 같은 것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이성을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만능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이성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이며 그것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며 이성의 월권행위 즉 이성이 간여할 사안이 아닌 것에 대해 이성의 횡포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순수이성을 법정에 세우는 것뿐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성론과 경험론의 참된 중도가 이 책을 통해 추구되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시작하지만 모든 인식이 경험에 근원을 둔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어떤 선천적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상식일망정 결코 제외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며 그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선천적(a priori) 종합판단이 가능한가?"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중심주제의 한 골격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선 대상을 받아들이는 감수성 즉 감성에 대한 검토로 부터 논의가 진전된다. 감성의 두 형식인 시간과 공간은 근대에 매우 중요시되는 개념이었으므로 칸트 역시 이를 진지하게 검토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하지만 그는 여기에 대해 그것이 내적 감관의 주관적인 조건 이상이라는 어떤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일단 이 부분에 대한 결론인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인식의 자발성에 해당하는 오성이 오성사용의 규칙인 논리학과 결부되어 체계적인 검토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범주등을 비롯하여 오성과 오성사용의 기본적 원리들이 총 망라되어 검토되어 인식에 관한  피상적인 인식에 머물르고 있는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넉넉할 것 같다. 다음에야 비로소 이성의 월권 행위를 폭로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시간을 갖는 이성이라는 최고의 인식상태에 대해서 다룬다. 칸트는 초월적인 인식과 관련되어 기만적으로 사용되는 이성의 월권 행위를 이율배반이라는 이름하에 철저하게 단죄하고 경험밖을 벗어난 이성사용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한다. 이로써 우주나 신 존재 증명에 관한 독단적 견해와 이성의 괘변추리의 문제가 비로소 해결된다. 마지막으로 이제 이성이 우리에게 이 위대한 저작을 통하여 자신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스스로의 자기고백을 하였으므로 이제는 우리들이 실천적인 이성사용의 방도를 위한 훈련과정을 제시하는 것도 이 책이 담는 의미있는 항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나 역시 이 난해한 책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로 인해 골치깨나 썩였을 <순수 이성 비판>. 누구나 한 번 읽어보고 인식에서 이성의 참다운 의미를 음미하는 것도 좋은 일로 생각된다. 철학을 전공하는 이들이라면 특히 현대철학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정독해 볼 것을 권한다. 그러나 잘 되지 않더라도 낙담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이 책의 7할 이상을 이해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한두명 정도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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