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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직한 비밀
라라 프레스콧 지음, 오숙은 옮김 / 현암사 / 2020년 8월
평점 :
헉, 소름 돋았어요. 현실 공포!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어요.
보리스가 보낸 편지들, 공책, 음식 목록, 신문 스크랩, 잡지, 책들을 샅샅이 뒤졌어요.
그리고 여자의 팔을 붙잡아 끌고 갔어요. 가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어요.
왜,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말하지 않은 채.
그녀를 태운 차는 로터리를 돌아 루뱐카*의 내부 중정으로 들어갔어요.
[* 루뱐카 : 소련의 비밀경찰인 KGB(국가보안위원회) 본부의 별칭.
루뱐카 광장에 있어서 그렇게 불렸으며, 지금 이 건물은 러시아 FSB(연방보안국) 본부로 쓰이고 있다.]
차가 멈췄고, 남자는 차 문을 열면서 물었어요.
"모스크바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뭘까요?"
"물론 루뱐카죠. 그곳 지하실에서는 시베리아까지 한눈에 내다보인다고 하거든요." (25p)
문득 남산의 부장들이 떠올랐어요. 남산은 중앙정보부(중정)을 의미했고, 중앙정보부장은 남산의 부장이었어요. 권위주의 시대 중정은 권력과 공포의 대상이었고, 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은 중정 대신 남산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어요.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된 남산은 아직도 고문 현장이 남아 있어요. 아무리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미화해도, 숨길 수 없는 피비린내가 있어요. 지금이야 우리는 남산을 휴식의 공간으로 여기지만, 역사를 안다면 공포와 억압의 공간이었음을 똑똑히 기억할 거예요.
끌려 온 여자의 이름은 올가 프세볼로도브나 이빈스카야예요.
검은 정장의 남자들은 올가를 두 여자 간수에게 인계했고, 감방에 가두었어요.
올가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고, 그녀의 몸을 훑어보더니 임신했냐고 물었어요. 올가는 보리스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어요.
그들은 사흘 동안 시멘트 상자에 가둬놓고, 하루에 두 번 죽과 쉰 우유를 주었어요. 사흘이 지난 후 열네 명의 여자들이 수감된 감방으로 옮겨졌어요.
그리고 몇 주 후, 아무런 번호도 없는 문 안으로 끌고갔어요.
자신을 아나톨리 세르게예비치 세묘노프라고 소개한 신문관이 서류를 들추면서 물었어요.
"그래서 당신은 무슨 짓을 했나요?"
"테레리즘적 성격의 반소비에트 견해 표명."
"제발요. 우리 가족한테 연락하게 해주세요."
...
"그자 쓰고 있는 소설에 관해 말해주시죠. 이런저런 말이 들리더군요."
"이를테면요?"
"말해보세요. 이 『닥터 지바고』가 무엇에 관한 소설입니까?"
"저는 몰라요."
"모른다고요?"
"아직 집필 중인걸요."
"만약 종이와 펜을 주고 잠시 당신 혼자 있게 시간을 준다면, 그러면
그 책에 관해 아는 것이든 모르는 것이든 전부 다 쓸 수 있겠죠.
좋은 생각이죠?" (30-31p)
『닥터 지바고』가 뭐길래, 작가도 아닌 작가의 연인을 붙잡아 가두고 고문하는 걸까요?
이 책은 소비에트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소설로, 10월 혁명에 대한 비판과 이른바 체제전복적인 성격 때문에 동구권에서는 금지된 책이라고 해요.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워낙 영화가 유명해서, 이제껏 슬픈 사랑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유리 지바고와 라라 안티포바의 희망 없는 사랑을 다룬 장대한 서사가 어떻게 체제를 뒤엎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지, 정보국의 창의적인 분석이 놀라울 따름이에요. 그들에게 『닥터 지바고』가 책이 아니라 무기였다면, 왜 작가를 직접 부르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왜?
보리스의 아내도 아닌, 연인이었던 올가를 3년 넘게 감옥에 가두고 중노동을 시켰다는 사실이 너무나 끔찍해요. 그녀는 감옥에서 아이를 유산했어요. 이 책에는 안 나오지만 보리스가 죽은 뒤 8년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고 해요. 『닥터 지바고』를 쓴 것도 보리스,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도 보리스인데 왜 그녀의 삶이 짓밟혀야 하는 건지.
정보국에서는 보리스를 통제하기 위해 철저히 올가를 이용했던 거예요.
<우리가 간직한 비밀>에서는 미국 정보국 CIA 에 소속된 여자 스파이들이 등장해요. 표면적으론 타이핑 부서에서 일하는 타자수일 뿐이지만, 은밀하게 정보국 지시를 수행하고 있어요. 그들 임무 중 하나가 『닥터 지바고』를 추적하는 일이었어요. 이탈리아에서 그 책 초판(1957년)을 입수하고, 그 소설의 러시아어 원고를 확보하는 일.
'지바고 작전' 이후 소설은 소련에서 지하출판물 형태로 유행했고, 1987년 파스테르나크가 복권되면서 이듬해『닥터 지바고』가 해금되었다고 해요.
근데 중요한 건 그 부분이 아니에요. 냉전 이후 정보국에 남아 있는 여자들, 한때는 전설이었던 그녀들이 어느 구석의 책상으로 좌천되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녀의 동료였던 아이비리그 출신 남자들은 그녀의 상사가 되었는데 말이죠.
이 책은 바로 그녀들이 지켜낸 비밀과 놀라운 활약상을 그려내고 있어요. 샐리와 이리나의 이야기는 역대급 스파이 영화 같아요. 그녀들만의 비밀을 알고나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네요.
내 이야기는 이제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집단의 상상력 속에서 나는 다른 사람, 여주인공, 한 등장인물이 되었으니까요.
나는 라라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여기엔 그녀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도 나를 그런 식으로 알게 될까요?
그것이 그들이 기억하게 될 사랑 이야기일까요?
보랴가 썼단 여주인공의 결말이 생각나네요.
어느 날 라리사 표도로브나는 외출했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날 거리에서 체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쪽의 혼성 수용소나 여자 수용소 중 한 곳으로 보내져,
나중에는 찾을 수조차 없게 된 명단의 이름 없는 한 번호로 잊힌 채
자취 없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나톨리, 나는 이름 없는 번호가 아닙니다. 나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482-48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