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식물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 가장 느린 것들이 가장 오래 빛난다
이유리 지음 / 청림출판 / 2026년 7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힘들 때 종종 바람 쐬러 가자는 말을 하는데요.
어디로 갈까, 멀리 갈 수 없을 때는 나무들이 무성한 공원 벤치가 제격이네요.
가만히 앉아서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등을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평온해지네요.
나이들수록 꽃이 좋아지고, 식물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아요. 갑자기 좋아졌다기보다는 잊고 있던 것들을 비로소 깨달은 거라고 생각해요. 원래 좋은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아지는 법이니까요. 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나무들과 저마다의 속도와 방식으로 피어나는 꽃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걸, 새삼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식물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은 서울대 생명과학부 이유리 교수의 식물에세이네요.
저자는 수십 년간 식물 세포를 연구해 온 과학자의 시선으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식물의 세계를 다정하게 소개하고 있네요. 식물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식물의 죽음은 어떻게 조절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의 답을 찾다보니 식물의 삶이 놀라울 정도로 우리의 생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닮아 있음이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책은 학술적인 지식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식물이 온몸으로 써나가는 그 치열한 생존의 기록을 통해 삶의 지혜를 나누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네요.
우리에게 식물이란 어떤 의미인가. 저자도 한때는 식물을 병풍의 그림처럼 여겼는데 다르게 보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면서부터였대요. 그 관심의 출발점은 벼꽃이었대요. "벼꽃을 본 적이 있나요?" (75p)라는 교수님의 질문을 듣고, 서른이 다 되어서야 처음으로 벼의 꽃을 보았다고 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꽃은 꽃잎이 있어야 하는데 벼꽃은 여섯 개의 수술과 한 개의 암술로만 이뤄져 있어서 다른 곤충의 도움 없이 스스로 수분을 하고, 수술이 영글어 꽃밥을 방출하며 고개를 숙일 즈음, 이삭 껍질이 수술 아래쪽에 있는 암술에 닿기 쉽도록 살짝 입을 열어준다는 거예요. 수정이 끝나면 닫힌 벼 이삭 안에서 한 톨의 귀한 알갱이가 영글어가는 거예요. 작고 볼품없어서 꽃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벼꽃의 실체는 '스스로 수분'하는 자가수분 식물인 거예요. 꽃이 핌과 동시에 벼꽃은 2시간 이내에 수분이 이뤄져서 벼꽃의 일생은 참으로 짧네요.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한 채, 그렇게 쌀알이 될 생명이 잉태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모든 꽃이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는 걸,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이 눈에 띄어야 할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네요. 화려한 꽃잎이 없어도 짙은 향기가 없어도 제 방식으로 피어나는 벼꽃을 알고 나니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던 어린 왕자의 말이 떠오르네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의 소중함, 그리고 삶의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