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정 너머 한 시간
헤르만 헤세 지음, 신동화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열아홉, 스물, 스물 하나... 그 무렵의 헤르만 헤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자정 너머 한 시간》은 1899년 발표된 헤르만 헤세의 첫 산문집이에요.
헤르만 헤세는 1941년, 라이프치히의 오이겐 디더리히스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된 《자정 너머 한 시간》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자정 너머 한 시간》의 산문 습작들에서 나는 자신을 위해 예술가의 꿈나라를, 미(美)의 섬을 창조했고, 그 시적 특정은 낮 세계의 풍파와 저속함에서 밤과 꿈과 아름다운 고독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 내가 보기에 《자정 너머 한 시간》은 나의 길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적어도 라우셔와 카멘친트와 똑같이 중요한 것 같다." (13-15p)
이 작은 책에는 아홉 편의 짧은 산문들이 실려 있어요. 산문의 제목만 나열하자면, 섬 꿈, 엘리제를 위한 알붐블라트, 열병의 뮤즈,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왕의 축제, 말 없는 이와의 대화, 게르트루트 부인에게, 야상곡, 이삭 여문 들판 꿈으로 작가의 내면 세계를 꿈의 장면처럼 묘사하고 있어요. 독자들을 염두에 둔 작품과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점, 이것은 오직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탐구하고 있다고 봐야 해요. '나의 길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라고 저자가 밝혔듯이, 이 책은 작지만 매우 깊고 심오한 세계를 담고 있네요.
여왕이 오렌지 꽃가지 하나를 부러뜨려 그것을 보트 안으로 던진 뒤 나를 부드러이 아래로 밀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여행 잘하길! 작별이란 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는 예술이죠. 당신이 언젠가 돌아와 내게서 빛을 얻어 갈 걸 나는 알아요. 언젠가 당신에게 더 이상 노가 필요 없을 때 말이에요." _ 「섬 꿈」 (48p)
첫사랑의 봄과도 같은 꿈속에서는 아름다운 여인들과 여왕의 환대를 받고 있어요. 그곳에서 게르트루트 부인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따뜻한 위안과 조언을 해주는 존재, 가장 이상적인 여인이니까요. 그의 뮤즈는 게르트루트 부인이 아니라 꿈나라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네요. 젊은이가 꿈꾸는 모든 것, 절망한 순간조차도 너를 사랑했노라가 말해주는 꿈의 여인들 덕분에 어두운 청춘 환상곡이 울려퍼지네요.
"나는 내 슬픔을 나른한 시의 박자로 흔들고 어두운 압운에 반영하는 법을 배웠다. ... 우리는 마치 저주의 거울 속처럼 모든 삶이 뒤집혀 있어 사람이 노인으로 태어나 젊게 살다가 마지막에는 어린아이가 되어 불안하게 마지막을 직시하는 우화들을, 불행한 사랑의 운명들을, 그리고 잔혹함으로 가득한 이야기들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나중에 내가 어느 불안한 밤에 나의 뮤즈를 저버리고 달아나 양지의 푸른 평야로 가버리고 난 뒤에도 그녀는 오늘처럼 가끔 나를 찾아와... " _ 「열병의 뮤즈」 (61p)
자정 너머 한 시간은 고요한 밤의 시간인 동시에 불안에 떨며 뮤즈를 저버리고 도망가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네요. 헤세는 살짝, 단테의 『신곡』의 장면들을 언급하면서 불타는 영혼의 이루어지지 못한 소망들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전에 꾸던 꿈들을 되살릴 수 있을까요.
"그때 나는 추위에 떨면서 내 청춘 세계의 폐허들 아래를 걸으며 부서진 생각들과 팔다리가 경련하는 일그러진 꿈들을 지났고, 내가 바라보는 것은 먼지로 흩날리고 살아 있기를 멈추었다. ... 모든 것이 내게서 멀어졌고, 나는 곧 엄청난 공허와 무풍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 고독의 밑바닥을 본 적이 있는 자가 있을까? 체념의 땅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내가 심연 위로 몸을 숙이자 시야가 아찔해지며 끝을 모르고 추락했다. ... 고요한 슬픈 밤이 나를 위로하고 잠재우며 내 위에 궁륭처럼 떠 있었다. 마치 친구들이 귀향자에게 찾아가듯 잠과 꿈이 내게로 찾아와 죽을 것만 같은 무게를 내 어깨에서 여행 보따리처럼 내려주었다. ... 구조된 사람과 회복하는 사람처럼 감사와 평온과 빛과 행복의 소용돌이가 나를 휩쌌다. ...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나는 새사람이 되었고, 나 자신에게는 또 기적이 되었다. 쉬는 동시에 활동하고, 받으면서 베푸는. 나는 재산의 주인이 되었는데, 그 중 가장 값진 것을 나는 어쩌면 아직 알지 못한다." _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65-67p)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단테의 『새로운 삶 (La Vita Nuova)』 에 나오는 첫 문장이라고 하네요. 난파 당한 배, 파수꾼 잠든 땅, 사막과 같이 길을 잃은 그에게 새로운 별들이 나타나 빛을 내고 있네요. 그를 일으켜 세운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내게는 당신이 먼 옛날 황홀경에 빠진 단테를 스쳐 지나간 여인이었던 듯, 그리고 나의 동경 가득한 청춘의 그늘 속에서 딱 한 번 더 지상을 거닐었던 듯 여겨질 때가 많아요. ... 잠든 나의 꿈속에서 자주 당신 몸의 형체가 보이고 당신의 고상한 손에서 마디가 섬세한 흰 손가락들이 그랜드피아노의 건반에 놓인 것이 보여요. 혹은 당신이 저녁 무렵 서서 창백해지는 하늘의 변화하는 색을 지켜보는 모습이 보여요.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로운 앎으로 인해 깊은 광채로 가득한 눈으로 말이에요. 그 눈은 내게서 셀 수 없이 많은 예술가 꿈을 불러일으키고 이끌어주었죠. 그 눈은 어쩌면 내 삶에 주어졌던 가장 소중한 것이었을지도 몰라요." _ 「게르트루트 부인에게」 (107-108p)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아련한 꿈속의 이야기를 통해 예술가의 꿈, 예술의 세계를 짐작해보네요.
"나는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ㅡ 그 모든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성을 지키며 고요한 저녁 내내 나의 층계에 앉아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잘 아는 얘기겠죠. 당신은 나를 이름으로 불렀고 천년 전부터 이 피난처에 출입한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당신은 그분의 방들을 여는 열쇠도 가지고 있잖아요! 들어갈 건가요?" 우리는 등 뒤로 문을 닫는다. 파수꾼이 고리에서 횃불을 집어 위쪽 층계를 밝혀준다. _ 「야상곡」 (119p)
고통스럽지만 사랑했노라고, 이 고백을 통해 작가 자신이 어떠한 마음으로 본인의 길을 걸어왔는가를 알 수 있네요. 삶의 파수꾼이자 주인으로서 횃불을 밝혀야 해요. 젊은 출판인 오이겐 디더리히스는 헤세의 산문집을 '스케치'라고 표현하면서, '스케치들에 해방적인 면이 없어 아쉽다'라면서도,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저는 이 책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리라고는 별로 믿지 않지만 그 문학적 가치를 그만큼 더 확신합니다." (12p)라고 했는데, 그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네요.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초기 습작 산문에 대해, '내가 살던 왕국, 내가 시적인 시간과 나날을 보낸 꿈나라', '시간과 공간 사이의 어딘가에 비밀스럽게 자리한 그곳' ,'밤과 꿈과 아름다운 고독으로 물러나는 것' (13p)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 같아요. 비밀스러운 꿈의 나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