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정원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전차 안.

스즈가미 세이치는 우울하게 전차 시트에 앉아 있어요.

피곤에 절어버린 직장인 세이치는 문득 눈에 들어 온 여자 덕분에 마음이 환해졌어요.

사랑을 느꼈고, 그녀와 잠시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워 눈을 감았어요. 여기에서 살짝 오해했어요. 연애도 한 번 못 해본 모태솔로인 줄.

계속되던 전차의 진동이 문득 사라지면서 한순간 무중력이 된 듯 묘한 감각을 느꼈어요. 음, 살짝 졸면 그럴 수 있지요.

세이치가 눈을 떴고, 마침 그녀가 전차에서 내리려는지 출구 쪽으로 이동했어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쫓아 내렸어요. 와,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네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플랫폼에 내린 상태였고...

앗, 서류 가방을 놓고 내렸어요. 가방에는 오늘 6시까지 회사에 들어가 상사에게 줘야 할 중요한 서류가 들어 있었어요.

가방을 전차에 깜빡 두고 내렸다고 하면 어떤 욕설이 쏟아질지, 멘- 붕.

호흡이 힘들어지고 눈에 눈물이 고였어요. 거의 포기 상태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어요.


<멸망의 정원>의 첫 장면이에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에요. 여기까지는.

세이치가 엉뚱한 역에 내린 그 순간, 굉장히 간절하게 염원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고.

우리도 그럴 때가 있잖아요. 팽팽하게 버티고 버티다가 툭! 끊어진 듯한 느낌. 

놀랍게도 세이치는 자신의 염원대로 현실이 아닌 이상하고 신기한 세상으로 들어 왔어요.

그곳 사람들에게 지명을 물어보니, '오오마쓰리 군 오오마쓰리마치'라고 했어요. 그들은 세이치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여기고 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세이치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어요. 모두가 친절했고, 마녀가 떠나버린 빈집에서 편안하게 머물 수 있었어요. 정령의 숲 너머에 있는 닭산에서 금빛 덩어리를 주웠더니 광물상의 노주인이 진짜 금이라면서 팔라고 했어요. 사실 닭산이란 이름이 붙은 건 닭이 매일 아침에 알을 낳는 것처럼 그 산이 금이나 보석을 낳기 때문이래요. 누구나 줍는 게 임자인데, 동네 사람들은 닭산에 가질 않았어요. 닭산에는 종종 곰이나 마물이 나타나서 위험하거든요.  

현실 세계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세이치에게 편지가 도착했어요. 발송인 스즈가미 가논은 세이치의 아내였어요. 그가 떠난 후 보고 싶다는 내용인데, 그 정도로 애틋한 관계가 아니라서 의아했어요. 뒤이어 온 편지는 내각총리대신이 보냈어요. 무슨 불길한 날 이후 국가적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다음은 '방위성 이공간존재대책본부'에서 보낸 편지였어요. 

스즈가미 세이치가 사라진 그 날, 20XX년 1월 19일 새벽 지구에는 '미지의 존재'가 찾아왔고, 퇴치가 불가능한 '푸니'가 지상 여기저기에 나타서 온갖 것들을 침식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푸니'라는 이름은 미지의 존재가 푸딩 같은 흐물거리는 생물이라서 붙여졌어요. 처음에는 푸니는 작은 조각이었는데 점점 성장하며 분열하더니 점점 개체 크기가 거대해지면서 거대한 해파리 같은 존재가 되었어요. 1월 19일 이후 많은 사람이 정신이상을 일으켰고,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이 연간 100만 명을 넘었어요. 

대개 생물종은 타자에게 잡아먹힘으로써 개체 수가 줄어드는데, 푸니는 잡아먹은 쪽이 푸니가 되고 있어요. 좀비처럼. 그러다 보니 이상증식이 계속되어 지구 전역이 새하얀 푸니로 뒤덮이는 지경이 되었어요.

그 '미지의 존재' 내부의 핵 바로 옆에 한 인간이 발견되었고, 시체인 줄 알았던 그 인간이 바로 스즈가미 세이치였던 거에요.

가상현실 같은 세계에 갇혀 있는 세이치는, 진짜 현실에서는 '미지의 존재'의 핵 부근에 붕 떠 있으며, 살아서 뇌파를 발산하고 있다는 거예요.

멸망 위기에 처한 지구는 세이치가 갇혀 있는 이공간으로 편지를 보내다가, 급기야 돌입자를 파견하기에 이르렀어요. 

돌입자의 미션은 세이치를 설득하여 핵을 파괴하도록 만드는 것.

그 핵은 결국 세이치가 머물고 있는 이공간.

과연 세이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핵을 파괴할까요?


'미지의 존재'가 왜 세이치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세이치는 개인의 행복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운명에 처했어요.

<멸망의 정원>은 각박한 현실을 버텨내는 사람들에게 신기하고 놀라운 탈출구를 보여주고 있어요.

그러나 주목해야 할 건 '미지의 존재'로 파괴되어 가는 지구와 인간들의 행태인 것 같아요.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너무 적나라한 것 같아요. 스스로 묻게 되더라고요. 나라면, 나는 다를까?

문득 첫 장면이 떠올랐어요. 세이치가 낯선 여자에게 사랑을 느꼈던 그 순간으로.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저 물컹대는 푸니와 다를 게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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