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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메이커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박현주 옮김 / 소소의책 / 2026년 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트레이시 슈발리에 작가님의 작품은 처음 읽는데, 특별한 시간 여행을 함께 한 느낌이었어요.
일단 도입부의 설정이 흥미로웠어요. 물 위로 납작한 조약돌을 던져 물수제비를 뜨는 것처럼 물 위를 통통통, '물'을 '시간'으로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어요. 우리를 1486년 물의 도시 베네치아 무라노 섬으로 데려갔다가, 통통통, 시간의 물을 껑충 뛰어넘어서 2020년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이끄네요.
《글래스메이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유리공예 가문의 딸로 태어난 오르솔라 로소예요.
아홉 살의 오르솔라가 엄마와 오빠들과 함께 할머니댁에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르코 오빠에게 떠밀려 물에 빠지는데, 엄마는 근처에 위치한 바로비에르 공방에 들어가서 용광로에 몸을 데울 겸 뭐든 보이는 대로 알아오라는 지시를 하네요. 경쟁업체를 살짝 염탐하라는 약간의 꼼수였고, 오르솔라는 그곳에서 당시로는 드문 여성 유리공예가인 마리아 바로비에르의 존재를 마주치게 돼요. 마리아 바로비에르는 유리공예 훈련 중인 도제(가르초네) 청년에게, "안 돼. 균형을 살리려면 빨간색이 좀 더 두드러져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 구슬은 흰색과 푸른색에 눌리게 될 거야. 말귀 못 알아듣니? 주형은 어디에 있지? 내가 다시 시범을 보여줘야 하겠지만, 이제 그러는 것도 지겹다." (19p)라며 야단을 치고 있었네요. 그때 들킨 오르솔라는 쫓겨났지만, 엄마에게 할 말은 생겼네요. 바로비에르가는 한 달 후, 세상에 로세타, 장식 구슬을 선보였고, 이 신기하고 놀라운 물건은 서서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네요. 유리 구슬, 어쩌면 이 유리공예품이 진짜 주인공이 아닌가 싶네요. 영롱하고 단단한 결정체가 완성되기까지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니 말이에요.
"유리는 우리 피에 흐르고 있어." (415p)
마르코가 오르솔라의 능력을 처음으로 인정하면서 했던 말인데, 가문을 위해 사랑을 포기했던 오르솔라의 선택은 그 피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관통하며 무라노 유리 산업이 쇠퇴하고 관광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요. 급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오르솔라는 우리에게 유리 구슬을 건네고 있어요. 오랜 세월, 그녀에게 전해진 유리 돌고래처럼 소중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걸 기억하면 돼요.
"언니는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해." 스텔라가 단언했다.
"에코(있잖아), 난 너랑 같지 않아. 우리 누구도 같지 않지."
"그래, 언닌 같지 않아. 언니는 가족과 무라노에 묶여 있으니까."
"나는 가족과 무라노에 충실한 거야.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리고 테라페르마에서 일어나는 일이 두렵고. 너는 안 그러니?"
스텔라는 어깨를 으쓱하고 뒤로 기대더니 칸나레조 둑을 따라 어둠을 뚫고 나타나는 높은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황갈색과 황토색, 분홍색 건물, 아치형 창문, 발코니, 그리고 물이 흐르는 쪽을 향한 전면. 언제나 물이었다.
"이런 건 전혀 그립지 않을 것 같은데." 스텔라는 말했다.
오, 아니, 넌 그리워하게 될 거야. 오르솔라는 언젠가 아련한 엣날, 메스트레에 떨어져 말을 피하려 하면서 물을 조금이라도 보길 원했던 날을 떠올렸다. 무라노인과 베네치아인의 혈관에는 물이 흘렀다. 심지어 여동생의 차가운 핏속에도. 오르솔라는 다른 도시에 가본 적이 없지만, 관광객들이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기에 스텔라가 이를 그리워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당장은 아니라도, 결국 언젠가는.
(446-447p)
"베네치아에는 홍수가,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산불이, 캘리포니아에는 가뭄이 난리네요."
오르솔라의 손녀 아우렐리아는 소위 아쿠아 그란다(베네치아어로 '큰 물', 홍수)가 있고 며칠 후 통화할 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봐요, 할머니. 그리고 이 모든 게 인간이 멍청한 선택을 해서라니까요!" (469p)
"아름다운 진주가 만들어지려면 모래알이 들어가야 한다. 아름다움은 입술의 상처, 벌어진 잇새, 그리고 구부러진 눈썹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리바 디 산 마테오에 다다랐다. 오르솔라의 인생에서 극한의 순간에 몰렸던 장면이 펼쳐진 곳이었다. 지난 45년 동안, 가끔은 수백 년의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그 세월 동안, 오르솔라는 이 자리에 서서 거기서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생각하며 잠깐 서 있곤 했다. ··· 아픔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아픔의 기억이 남았고, 그다음에는 마침내 그 기억의 기억만 남았다." (499-500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