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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괴담
온다 리쿠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눈에 확 띄는 연두색 바탕에 전통 문양, 붉은 빛의 다다미 방 너머로 보이는 기괴한 무언가로 단번에 분위기를 장악하네요.
바로 온다 리쿠 작가님의 《커피 괴담》의 표지네요. 공포 호러 장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면서도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에 뭔가 감춰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괴담에는 딱 어울리네요. 맛있는 커피와 괴담의 조합이라니, 둘 다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대환영이네요.
온다 리쿠 작가님이 한국 독자들을 위해 쓴 서문을 보면, "친애하는 한국의 독자 여러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아마도?) 괴담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괴담이라는 장르는 모든 세대를 초월하여 가장 보편적인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장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괴담이란 장르는 읽을 때나 직접 쓸 때나, 마음이 따뜻하게 치유되는 느낌이랄까, 어쩐지 '안심이 되는' 장르인 것 같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문득 오싹해지면서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공포'라는 감각. 『커피 괴담』을 통해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바로 여러분 곁에 있는 비일상의 세계를 즐겨 보시기 바랍니다." (7p)라고 적혀 있는데, 이 말에 완전 공감했네요. 평소에 아주 드물긴 하지만 악몽을 꾸다가 잠이 깬 순간,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꿈이라서 다행이다!'라는 거예요. 악몽을 꿔서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괴담, 공포 장르를 즐겨 읽는 것도 멀쩡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악몽을 꾸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저자의 말처럼 '어쩐지 안심이 되는 장르'가 된 것 같아요. 이번 작품에서는 네 명의 중년 남성들이 함께 교토, 요코하마, 도쿄, 고베의 찻집을 순례하며 각자의 괴담을 들려주고 있어요. 다 큰 어른들, 아니 제법 나이 먹은 남자들의 대화가 은근히 재미있어요. '맞아, 정말 그렇네.'라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아, 생각났다." 다몬이 멈춰 서자 미즈시마와 오노에가 뒤를 돌아 보았다.
"뭐가?"
"아까 중정을 보고 연상한 영화 말이야. 로만 폴리스키의 「혐오」야."
"폴란스키? 그 학교의 어디서 그 영화를 연상했다고?"
"주연 여배우인 카트린 드뇌브가 사는 집 맞은편에 수도원이 있는데, 그 수도원 건물과 중정이 딱 그런 느낌이었어. 아아, 속 시원해. 생각해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다몬이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두 사람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이번엔 뭘 보고 생각난 거야?" 미즈시마가 질린 표정으로 묻는다.
"저거야. 팔손이나무 잎사귀." 다몬이 손으로 가리켰다. 길가에 있는 개인 주택의 현관 근처에서 팔손이나무가 햇살을 받아 새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왜?"
"영화에 나오잖아. 벽에서 손이 잔뜩 나오는 장면. 저걸 보고 생각이 났어." (26-27p)
어딜 가든지, 새로운 뭔가를 볼 때마다 기존에 알고 있는 익숙한 것들을 연상하는 버릇이 있어서 이들의 대화가 친근했네요. 다몬은 폐교된 학교 건물이 다른 용도로 바뀐 모습을 보다가, 뻥 뚫려 있는데도 사방이 막힌 듯한 느낌을 주는 네모난 공간에서 기시감을 느꼈던 거예요. 이전에 봤던 영화를 떠올리고 있지만 정확하게 내면에 뭔가를 건드리는 트리거가 아니었을까요.
"으음, 교토는 여름의 낮 시간이 괴담에 딱 어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 다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난 뭐가 무섭냐면, '찜통더위'라는 말이 무서워."
··· 오노에가 수궁했다. "왠지 내가 길바닥에서 푹 쓰러지는 장면을 상상하게 돼. 조금만 더 가면 그늘이 있는데 도중에 힘이 빠져서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조용하고, 멀리서 매미 소리가 들리고, 태양이 이글거리는 소리만 나고, 통닭구이처럼 그을려 가는 거야. 그게 무섭지 않아?"
"위험해. 화상과 탈수 증상이야. 중증 열사병이지." 미즈시마가 냉정하게 의견을 말한다.
다몬은 몸서리를 쳤다. "뭐가 무섭냐면, 그런 더위를 '찜통더위'라고 이름 붙인 언어 센스가 무서워. '솜으로 목을 조르는 듯하다'는 표현에 필적하는 무서움이야." (30-31p)
아저씨들의 흔한 대화 같지만 흘러가는 양상을 보면 신기하게도 쭈뼛 소름 돋는 요소들이 있어요. 소소한 괴담의 매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온다 리쿠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이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