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해부학 - 완전한 질서 너머 삶의 의미를 찾아서
가브리엘 웨스턴 지음, 김성훈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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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야단스러운 겨자색의 지방, 이 색깔이 맞자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내 망막을 강타하는 선홍빛의 동맥, 피막 아래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푸른 정맥, 깊은 심연에서 얼음처럼 시릴 정도로 하얀 뼈. 반면에 평범한 일상에서 피부라는 장막을 온전히 걸친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사람이 수술대에 반듯이 누워 수술실이라는 무지갯빛 낙원에서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내면을 드러내는 모습과 비교하면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p.29


우리는 어딘가 아프거나 불편해지고 나서야 우리 몸 속 장기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질병 덕분에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우리 몸 속 우주에 대해, 우리가 무엇으로 이뤄진 존재인지에 대해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콩팥이 매일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뇌의 작동방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간의 재생능력은 얼마나 뛰어나며, 허파는 우리를 어떻게 세계와 연결해주며, 피부가 나를 바깥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책은 뼈에서부터 자궁까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장기들의 해부학적 사실들을 따라가는 여정을 통해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낡은 해부학 교과서에서 삭제된 부분들을 채워넣으며 우리의 몸에 덧씌워진 사회적, 역사적 편견들을 날카롭게 해체한다. 수십 년 동안 수술실에서 쌓아온 외과의사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사유한다.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심장질환의 경험부터 쌍둥이를 임신하고 제왕절개 수술대에 누웠던 자신의 경험과 아들의 갑작스러운 뇌출혈까지... 저자 자신의 내밀한 삶까지 모두 담겨 있다. 흑색종을 비롯한 피부암부터 쌍둥이 제왕절개 수술, 생존기증자 간 이식수술 등을 관찰하고, 경험해온 외과의사에게도 질병은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지금 아무리 건강해도 누구나 늙어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내 몸이 무너졌을 때,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이다. 




모든 경험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는 없다. 우리가 겪는 가장 깊고 힘겨운 순간 중에는 그저 완곡하게 암시하거나 파편화된 형태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런 것들을 과학의 냉철한 언어에 담기는 쉽지 않다. 그게 전부도 아니다. 객관과 주관, 직업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지성과 감각을 통합하려는 나의 그 모든 시도에도 끝내 바뀌지 않는 의학의 본질적인 모순이 하나 남아 있다. 질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정지화면처럼 마비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자를 보살피려면 그들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야 한다.               p.360~361


외과의이자 유명 TV프로그램 진행자인 저자는 부검실과 수술실뿐 아니라, 투석 전문 병원, 이민자격리센터 등 다양한 현장에서 사람들의 몸을 관찰하고 들어왔다. 해부학과 의학에 관한 책을 꽤 읽어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형식은 굉장히 독특했다. 무엇보다 '몸'을 고쳐야 할 기계적인 부품이 아니라 무수한 삶의 이야기가 새겨진 텍스트로 바라본다는 것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인간의 몸을 묘사하는데, 외과적 관점을 넘어서 그 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읽어내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환자가 되어 보고 나서야,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 할지라도 우리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수술실에서 시작해 다시 수술실에서 끝이 난다. 첫 장면에서는 여성의 시신을 해부하는 부검실을 통해 '죽음'을 보여주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고로 죽은 젊은이의 장기들이 또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떠나는 과정을 통해 '삶'을 보여준다. 끝에서 또 다른 시작으로, 죽음에서 다시 삶을 살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도록 말이다. 서늘하고 차가운 의학 지식과 해부학적 사실들을 통해 섬세하고 다정한 연민과 위로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의과대학에 진학했다는 저자의 이력이 매 페이지마다 빛을 발하는, 의학책임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책처럼 읽히며 뭉클한 감동까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아름다운 책이다. 차가운 해부학의 언어로 어떻게 삶을 향한 뜨거운 찬가를 만들어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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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엘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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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응석받이 아이로 자랄 수만 있다면 성인기의 삶을 반쯤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앞서 우리가 연극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는데, 그건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한 그 상황의 기이함과 부자연스러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말을 좀 바꾸자면, 그 자리는 일종의 리허설 같았다. 우리는 늘 지금이 아니라 다음에 일어날 장면의 리허설을 하는 중이고, 나는 그 장면이 재앙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장면은 우리 모두를 변하게 하고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이를 결코 잊지 못할 터였다.              p.116~117


살면서 누구와 알고 지내는지는 꽤나 중요하다. 그로 인해 삶의 많은 경로들이 달라질 수 있고, 뜻밖의 인맥이 될 수도 있으며, 그 관계가 서로를 구원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68년 뉴욕 바너드 대학, 조지와 앤은 기숙사 룸메이트로 처음 만난다. 자신과 최대한 다른 세계에서 온 룸메이트를 특별히 요청했다는 앤은 부유한 명문가 출신으로 사실 흑인 룸메이트를 바랐다고 말한다. 앤은 왜 자신의 부류인 백인 상류층을 지독하게 증오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토록 마음을 쏟았던 것일까. 그에 반해 조지는 겨울이 여덟 달씩 이어지는 작은 소도시 출신으로 가족 중에 대학에 간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만성 피로에 지친 엄마는 가끔 손찌검을 해댔고, 자신은 절대로 엄마 같은 인생을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룸메이트가 아니었다면, 살면서 한 번도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극과 극의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털어 놓으며 우정을 키워 나간다. 조지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기에 앤을 바라보는 동경과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앤은 똑똑했고, 에너지가 넘쳤으며,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무수한 정치 집회, 궐기대회, 토론회에 나갔고, 무료 급식 센터 운영을 돕고, 노숙인 쉼터에서 자원봉사도 했으며, 도서관 문맹 퇴치 센터 강사도 하면서도 높은 학점을 받았다. 앤은 자신의 활동에 조시를 참여시키고 싶어했지만,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시간을 쓸 생각이 없었던 조시는 모두 거부했다. 조시는 대학 서점에서 일하고, 타이핑 일을 하며 점점 학교 수업에는 그만큼 멀어졌다. 조시는 앤의 에너지와 매사에 심혈을 기울이는 태도에 감탄했고, 부러웠다. 하지만 조지는 앤이 될 수 없었고, 앤도 조지처럼 살 수는 없었다. 




그 이후의 시기는 내게 지옥 불처럼 끔찍했어요.

순수한 낭만주의자들은 인생에 진정한 사랑은 한 번뿐이라고 믿죠. 평생 다른 사랑을 많이 하더라도 그것들은 유일한 사랑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죠. 난 그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만을 알 뿐이에요. 이제야 돌이켜보며 알게 되었죠.

배신의 맛은 어떨까? 내겐 레몬 절임 맛이었어요.

어던 것들은 글로 적어야만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죠.

아무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어요.             p.507


대학이 혼돈과 혼란의 본고장처럼 느껴진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이유로 학교를 떠나게 된다. 둘 다 환멸을 느꼈고, 대학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그 이유는 달랐던 거다. 앤은 여전히 세상을 바꾸려 하고 있었고, 조지는 로맨스를 찾고 있었다. 대학을 나와 조지는 대학의 에디터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앤은 사회 운동에 헌신적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건 앤이 먼저였고, 위층 남자와 만나고는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없던 조지는 앤에게 해묵은 질투심을 느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금씩 멀어지다가 앤의 흑인 애인에 대해 사소한 대화를 나누다 크게 싸우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연락이 완전히 끊어진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시간이 흘러 앤이 경찰 살인죄로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되면서이다. 


시그리드 누네즈는 반전 시위, 민권 운동, 우드스톡, 대마초와 LSD가 혼재했던 1960년대 말의 시대를 배경으로 두 여성의 엇갈리는 삶과 우정의 연대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누구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나와 대비되는 인물에 더 끌리게 마련이다. 다르기 때문에 더 가까워질 수 있고, 이해할 수 없기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정은 때로 사랑보다 더 깊고, 애틋하고, 잊혀지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두 주인공 외에도 여러 여성들의 삶과 다양한 관계들이 등장한다. 혼란스럽고 뜨거웠던 시대 속에서 여성들 간의 유대와 애정, 보살핌으로 서로를 구하고, 위로해주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한 시절이 끝나도 삶은 계속되고, 시대가 변해도 누군가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이 작품은 어쩌면 마지막이 아닐 그 존재들에게 보내는 사려 깊은 찬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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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영화관 ㅣ 환상 시리즈
호리카와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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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에 가서 자리에 앉았을 때의 즐거움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지. 자리에 앉아서 문득 뒤를 돌아보면 저 높은 곳에 자그마한 창문이 있는 거야. 극장 안이라는 게, 꼭 먼지가 떠다니잖니? ... 영사실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서 그 부분만 먼지나 티끌이 또렷하게 보이는 거야. 뭐, 먼지니 좋은 건 아니지. 하지만 어린 마음에는 마법 가루처럼 보였단다. 저 꼭대기 작은 곳에서 나오는 마법 가루가 영화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                 p.75


스미레는 아침 등교길에 노신사의 유령과 마주한다. 스미레가 유령을 보는 일은 신기하기는 하지만 결코 드문 일은 아니었다.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이미 학교는 지각이었다. 전철에서 내리는데, 옆 차량에서 내린 한 쌍의 남녀를 보며 깜짝 놀란다. 딱 봐도 불륜임을 알 수 있는 중년 남자와 상대 여성이었는데, 그 중년 남자가 바로 스미레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요즘 일주일에 절반은 집에 안 돌아오고, 늘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는 것이 수상했는데, 역시나였던 것이다. 화가 나서 아버지와 불륜 상대의 뒤를 쫓아가는데, 그곳은 옛날부터 좁은 2차선 차도 양옆으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상점가였다. 


그렇게 그들을 쫓아가다 무심코 들어간 곳은 오래된 잿빛 빌딩의 로비였다. 무척 오래된 서양 영화 포스터와 한산한 매점, 충전재가 튀어나온 긴 의자와, 게르마 전기관이라는 금색 간판, 그곳은 비좁고 낡아 빠진 영화관이었다.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맞닥뜨리고, 정신없이 달려가다 급기야 학교에도 가지 않고 영화를 보게 되다니... 열여섯 살 오늘날까지 바른길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스미레에게는 엄청난 하루였다. 그곳에서 영사 기사로 일하는 아름다운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만 스미레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는데, 마침 학교에서 친구도 없고, 따돌림을 당하던 차에 학교 대신 일을 하고 싶다고 집에 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스미레는 낡은 영화관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그곳은 여러 모로 이상한 일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해해 주는구나......"

마리코 씨가 갑자기 힘차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세상에서 '돌아온 사람'을 찾지 못하면 지배인님이 책임져야 해...... 그렇게 되면 내가 게르마 전기관에 눌러앉은 것도 들통날 테고, 큰일이야......"

"그래서 지배인님이 그렇게 당황했던 거군요? 그럼 저희도 '돌아온 사람'을 찾는 건가요? 완전 미인 유령과 소녀 탐정이네요." 

무서우면서도 설레는 일입니다. 긴장과 흥분으로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p.135~136


사람이 죽기 직전에 인생에서 겪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바로 그 '주마등'을 보여주는 영화관이 있다면 어떨까. 매달 달빛이 사라지는 초승달 밤에 죽은 사람들이 심야 상영을 보러 영화관에 모여든다. 그리고 다들 자기 인생의 '주마등'을 보면서 천국으로 떠난다. '게르마 전기관'이라는 이름의 이 영화관에는 두 개의 관이 있는데, 1관은 지나간 영화들을 상영하는 일반 영화관, 2관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 존재하며 주마등을 상영하는 곳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망자들이 방문하는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여고생 스미레가 극장에서 벌어진 불가사의한 일과 같은 반 친구의 할머니 유령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호리카와 아사코의 '환상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신의 계약서 및 망자의 유품 등 ‘경계’를 오가는 우체국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졌던 <환상 우체국>에 이어, 이번에는 망자가 방문하는 영화관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환상 영화관>이다. 각각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전작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해 원령이 되었던 마리코가 등장해 시리즈로서의 매력도 놓치지 않는다. 판타지적인 배경에 호러와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적절히 섞여 들어간 이 시리즈는 가볍게 읽히지만, 따뜻한 여운을 남겨주는 힐링 드라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담은 핵심 메시지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 도망쳐!"라고 말한다. 각자가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대할 때 '도피'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 지금 일상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면, 이 작품을 통해 잠시나마 쉬어 가는 시간을 가져보길,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는 뜻이다. 오싹한 힐링이 필요한 당신에게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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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백나무성의 라푼젤
배명은 지음 / 고블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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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남자가 뜻 모를 말로 투덜거렸다. 나는 죽었으나 살았다는 안도감에 울어버렸다. 눈물을 닦으려 팔을 들었는데, 손이 그 자리에 있다. 고개를 들어 하반신을 보니 다리도 제자리에 있었다. 잃어버렸던 내 몸이 다시 생긴 것이다. 

마치 일찍이 죽었으나 오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올해 귀신날도 이렇게 지나가는군,"

그렇게 닭이 세 번째로 울었다.              '1월 16일생' 중에서, p.116


졸업과 동시에 도시로 빠르게 떠났던 '나'는 오랜만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산속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싸락눈은 그친 지 오래지만 숲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날리는 눈이 시야를 가라는 날씨였다. 오래도록 방치되어 담장도 허물어지고, 외양간과 창고 지붕도 주저앉았으며, 장독대도 깨지고 부서져 온전치 못했다. 시간이 좀먹어 무너져버린 것들 사이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에 들어가니, 수척한 얼굴의 동생 다원이 보였다. 통통하고 잡티 하나 없던 뽀얀 얼굴은 살이 빠져 도드라진 광대뼈가 날카로워 보였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애교살이 있던 자리는 검게 그늘졌다. 머리카락은 푸석했고, 별로 좋아 보이는 꼴은 아니었다. 


깜빡 잠이 들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밤이었다. 부엌으로 가보니 다원이가 부산스레 움직이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미역국을 끓이며 사과와 배를 꺼내 담고, 접시에 잔뜩 쌓인 음식들을 보니 영락없이 제사상처럼 보였다. 내일이 생일이라 생일상을 차리는 줄 알았는데, 웬 장난이냐고 동생을 타박하는데, 밖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정월대보름이라 달집을 태우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밖에서 소리만 들려도 화들짝 놀라며 끊임없이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고, 큰아버지는 내일이 귀신날이라 집마다 귀신 쫓는 연기를 태울 것이니 다니기에 좋지 않다며 집에 있으라고 말한다. 그날 새벽, '나'는 낯선 남자를 부엌에서 발견하고 뒤쫓았지만 놓치고, 무서워하는 동생에게 그놈이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두려움을 몰아내진 못한다. 동생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게다가 이상한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신당에서 만난 수상한 남자의 정체는 뭘까. 




동해는 하품을 하고 멍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귀를 간질이는 신호음과 저 멀리 막힌 공간에서 부서지는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습관처럼 커피잔을 들어 미지근해진 커피를 들이켰다. 조금씩 시야에 뭔가가 들어왔다.

좁은 차 안, 차창 너머를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 설핏설핏 보이는 초록색 숲. 똑딱틱톡톡틱탁탁. 규칙적인 소음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쾅쾅! 동해는 갑작스러운 충격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신을 번쩍 차렸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중에서, p.237~238


일본군의 총칼에 사랑하는 외할머니를 잃은 소녀는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마적들로 인해 쑥대밭이 된 상황에 소중한 보따리를 도둑맞는다. 보따리를 찾기 위해 수상한 남자를 쫓아 기차에서 내린다.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와중에 총알이 난무하는 불 켜진 기차와 점점 멀어져 끝도 없는 숲속에 들어서게 된다. 빽빽이 들어찬 자작나무들을 붙들며 조심히 나아갔지만, 사위는 점점 어두워졌고, 눈이 쌓인 숲은 거기가 거기처럼 보인다. 결국 보따리를 되찾지만, 영원히 길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남자는 보따리에 뭐가 들었든 당장 버리라고, 그게 우릴 죽일 거라고 말하지만, 소녀에겐 소중한 것이었다. 주위엔 작고 푸른 빛들이 곳곳에 피어올랐고, 남자는 그것이 죽은 자들의 혼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두 사람은 깊은 숲속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전작들을 통해 신화와 설화 등을 현대적이고 장르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독보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던 배명은 작가의 신작이다.  초기작부터 최근 작까지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일제강점기로 시간 배경을 옮기고, 우리 나라 도깨비인 갓귀와 야강귀가 등장하고, 라푼젤에서 모티프를 얻어 측백나무와 울타리에 둘러싸인 집에서 벌어지는 공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담 너머 어둠의 세계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특히 귀신과 도깨비가 등장하는 토속 호러에 호기심이 많다. '직접적이지 않은 허구의 이야기로 안전한 두려움을 선사하는데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호러를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내면의 깊숙한 정서와 맞닿아 있어 매번 인상깊게 읽어 왔다. 초현실적인 공간과 현실적인 공간을 자유자재로 가로지르며 보여주는 공포가 익숙한 곳마저 낯설게 느껴지게 만들어 주곤 했다. 자, 환상적인 이야기로 지극히 현실적인 공포를 보여주는 배명은표 호러의 세계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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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나무
윤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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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어느 지점을 자꾸 맴돌다보면, 그 끊임없는 복기가 신비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그 파동이 저 아래 잠들어 있던 심해어들을 깨우고 결국 수면 위로 솟구치게 한다. 뒤늦게 알게 됐다. 40킬로미터를 넘어서면서부터 내가 줄곧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그건 이미 지나쳐버린 한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p.15


생존 용품 회사에서 일하는 미아는 지하철 역사에서 유실물 관리를 하는 인턴 테오와 민원인과 담당자로 처음 만난다. 생존배낭의 부속 하나를 선로에 떨어뜨려 유실물을 찾기 위해 스쳤다가, 지하철 역사를 달리는 하프코스 러닝 대회 ‘라인런’을 진행하기 위한 거래처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된다. 미아가 직접 기획한 생존배낭이 라인런의 기념품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빠듯한 일정 속에서 대회를 준비하며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누군가 내 삶으로 들어오게 되면,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이전과 같을 수 없어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액자 같은 어둠도 놀랍도록 황홀해지고, 테니스코트 바닥에 떨어진 라임색 테스트공들은 새콤한 맛이 나는 싱그러운 열매들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로 등장하는 '홍해파리'라는 존재도 매우 흥미로웠다. 홍해파리는 필요할 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외부 환경이 좋지 않다고 느끼면 성체로 살아가기를 멈추고 다시 유년기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성체 이전의 폴립 형태로 돌아가 아이가 되는, 그러고는 정말 시간을 되돌린 듯 거기서부터 현재를 다시 시작하는 거다. 생물학적으로 불사인 존재가 실제한다니 너무 신기했다. 이거 조금 홍해파리 같은 얘긴데, 이런 홍해파리 같으니라고... 그러면서 오래전 풍경들을 소환하는 것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고명처럼 쓰이곤 했다. 그렇게 시간을 쌓아가며 두 사람은 러닝 대회를 잘 마무리하고, 이제 더 편하게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생존배낭을 메고 잠든 사람이 죽는 변사 사건이 벌어지고, 미아는 그때부터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건의 여파가 번져가면서 두 사람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천국의 끝에서 낭떠러지로 향하게 된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니, 어쩌면 그게 더 슬플까. 나는 어느새 음악을 사랑으로 바꿔 부르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에 들을 음악을 남겨두듯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 사랑의 총량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고, 지금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설령 안다고 해도 나중을 위해 사랑을 남겨둘 수 있나? 사랑은 바라봄과 풍덩 사이의 낙차, 그 힘으로 나아가는 것 아닌가. 나중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모든 것은 현재형의 파도뿐.               p.155


<밤의 여행자들>로 대거상을 수상했던 윤고은 작가의 신작이다. 소설 작품들에선 기발한 상상력을 선보이고, 에세이에서는 일상의 빈틈을 다정하게 보여주었는데, 작가의 최신작들을 읽지 못해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매우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제목인 '테니스나무'라는 설정부터 흥미로웠는데, 실제로 길을 걷다 테니스코트 울타리 너머로 라임빛 열매들이 떨어져 있는 풍경을 목격했고,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공이 바닥에 떨어져 있을까 기대하게 되었다고. 공이 아니라 낙과를 찾는 마음으로 말이다. 마치 제철 과일이라도 된 것처럼. '사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기꺼이 사로잡히고 싶은 마음, 그 추동의 안팎을 살피면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극중 두 사람도 하루치의 움직임을 모두 소진한 테니스코트에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테니스공들을 보며 나무에서 방금 떨어진 싱그러운 열매들같다고 느낀다. 한 입 베어 물면 여기까지 새콤한 맛이 쫙 뻗칠 것 같지 않냐고. 그렇게 두 사람은 테니스코트 옆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테니스나무로 지정해버린다. 


찬란한 시간은 왜 순식간에 과거형이 되는 걸까. 오직 그 시절에만 포착할 수 있는 빛을 붙잡을 수가 없기에, 문학이 필요한 게 아닐까. 이 작품 속 여자와 남자의 연애 이야기처럼 말이다. 힘들 때 나를 살게 만들었던, 서로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포개었던 사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서로를 모르는 시절로 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삶에 예기치 않은 균열이 생겼을 때, 우리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되돌릴 수도, 멈춰 세울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고은 작가의 신작은 담백하게 흘러가는 짧은 분량의 이야기였지만, 뭔가 사무치는 마음이 잔상처럼 남는 그런 작품이었다. '다정한 서성임으로부터 번져나가는 찬란한 파동'이라는 작품 소개문구처럼, 잔잔하게 휘몰아치는 이야기같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이상한 사로잡힘이 시작되었다가 사그라드는', 슬프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시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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