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월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북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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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떠났다. 가까운 곳에서 저 먼 곳까지 커다란 검은 점들이 뜨거운 햇볕 아래 먼지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셴 할아버지는 자기 집 밭머리에 섰다. 공허한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음속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는 온몸을 떨면서 마을을 통틀어, 산맥 전체를 통틀어 일흔두 살 노인 하나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은 한없이 공허해졌다. 죽음 같은 적막과 황량함이 깊은 가을처럼 그의 온몸 위로 내려앉았다.                    p.21


옌롄커의 대표작 <연월일>이 새롭게 양장본으로 나왔다. 이 작품은 옌롄커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이자, “영감을 얻어 쓴 유일한 소설”이기도 하다. 기존에 국내 출간 당시에는 다른 중단편 소설과 묶어서 나왔으나, 이번 개정판에서는 작품을 온전히 만날 수 있도록 한 권의 단행본으로 선보인다. 이 작품은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중국 농촌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그 속에서 살아 남고자 악전고투하는 한 노인과 눈먼 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천고 이래 최악의 가뭄이 덮친 그해 세상 전체가 온통 말라 죽은 빛깔이었고 농가들은 세월 속에서 기다림에 지쳐갔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지독한 가뭄을 피해 떠나기 시작했고,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는 남았다. 자신의 나이 일흔둘이라 사흘쯤 걷다가 지칠 거라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마을에서 죽고 싶다고 말이다. 그렇게 모두들 떠나고 척박한 땅에 하나 남은 옥수수 이삭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사실 개가 눈이 멀게 된 것에는 사연이 있었다. 어느 해든 간에 극심한 가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은 마을 어귀에 제단을 설치하고 공양물 세 접시와 용왕의 형상으로 그려 넣은 물 항아리 두 개를 올려놓는다.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고, 개 한 마리를 두 항아리 사이에 묶어놓고 머리가 하늘을 향하게 한다. 보통은 길면 이레, 짧으면 사흘 만에 해는 개의 울부짖음에 질려 물러가고 바람이 불면서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 이어지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개가 보름을 울부짖었지만 해가 여전히 작열했던 것이다. 그렇게 열엿새째 되던 날 셴 할아버지가 물을 다 마셔버리고, 목에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 개를 발견하고 풀어준다. 그리고 개의 두 눈동자가 작열하는 해에 말라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개를 거둬들이기로 마음먹고, 그때부터 마을에 홀로 남은 지금까지 함께 했던 것이다. 햇빛은 그칠 줄 모르는데 우물물이 말라가고 있었고, 그나마 있던 양식도 떨어질 날이 곧 오고야 말 것이다. 과연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는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장님아,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해. 누가 살든지 먼저 죽는 쪽이 이 구덩이에 묻히는 거야, 알았지? ... 죽고 사는 건 운명에 맡기자꾸나. 내가 이 동전을 하늘에 던지마. 동전이 땅에 떨어졌을 때 글자가 있는 거친 면이 나오면 네가 나를 이 무덤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고 그림이 있는 면이 나오면 내가 널 이 무덤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는 걸로 하자꾸나.”                   p.165


옌롄커는 집필하는 작품마다 판매나 홍보가 금지되면서도 중국 평단과 대중은 물론, 세계 문학계의 뜨거운 호응을 얻어온 문제적 작가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사서>, <딩씨 마을의 꿈>들은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옌롄커는 가혹한 현실에서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을 섬세한 필치와 회화적인 시어로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단한 삶의 굴레 앞에선 인간들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어느 순간 초현실적인 상상력이 결합되어 거대한 서사가 완성된다. 시처럼 아름답고 감각적인 묘사, 그리고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만남은 끝내 먹먹한 감동을 남긴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단순한 생존을 넘어 인간다움의 본질을 묻는 이 작품은 가슴 먹먹한 여운을 남겨 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연이 만들어낸 재난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은 허먼 멜빌의 <모비 딕>,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와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두 고전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보여주는 느낌이라면, 옌롄커의 작품에서는 인간과 자연과의 투쟁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센 할아버지는 죽으면 죽는 것, 사는 날까지 살아보겠다는 식으로 버텼고, 결국은 죽고 사는 건 운명에 맡기겠다는 식의 태도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연못가에서 하룻밤을 꼬박 늑대 무리와 대치하던 장면과 죽고 사는 건 운명에 맡기자고 눈먼 개에게 말하며 동전을 던지는 장면은 특히나 감동적이었다. '생명의 고갈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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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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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의 위대함은 ‘발견’보다 방법의 혁명에 있었다. 그는 권위자의 글이 아닌 자연의 증거를 따랐고, 추론보다 실험을, 사색보다 계산을 선택했다. 그의 연구는 데카르트, 갈릴레오, 뉴턴으로 이어지는 근대 과학의 기초 위에 놓였다. 하비는 생리학의 토대를 바꿔놓은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책이 아니라, 자연을 해부했다.” 그의 가설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가설에서 출발한 추론은 훌륭한 실험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과학이 발전하는 방식이자, 하비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이다.                  p.53


우리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있을까? 의학의 진보는 천재의 섬광이 아니라, 평범한 관찰을 끝까지 설명하려는 끈질긴 사고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비타민'이라는 말을 너무도 익숙하게 사용하지만, 인류가 이 물질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불과 100년 전이다. 비타민의 발견은 왜 어떤 병은 무언가가 들어와서가 아니라 무언가가 부족해서 생기는 걸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의과학사적 성과와 의미가 큰 혁명의 순간의 출발점에는 하나의 과학적 질문이 있었다. 이 책은 그렇게 과학과 의학의 위대한 발상과 눈부신 성취들을 담았다.


인체를 복부, 흉부, 두부 순으로 해부하는 절차를 제시하며, 해부의 순서와 방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유럽 최초의 해부 실습 교재 <인체 해부학>은 르네상스의 예술가와 과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예술가이자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이 책을 참고해 자신의 인체 연구를 체계화했다고 하니 말이다. 16세기 중엽에는 젊은 해부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해부를 다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과학적 관찰의 행위로 되돌린 인물이다. 혈액의 순환 이론을 통해 생리학의 토대를 바꿔 놓은 윌리엄 하비, 생명을 수학으로 해석했던 데카르트, 17세기 초에 열을 재는 도구로 만들어진 온도계 등 의학사에서 중요한 발견과 발명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생명의 신비와 의학의 난제를 밝히는 경이로운 과정들이 있었기에, 현대 의학의 덕을 우리가 보고 있는 거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한 학생이 발견한 작은 섬, 전쟁을 겪은 의사의 새벽 메모, 그리고 허름한 실험실에서 뚝심 있게 밀어붙인 아이디어. 의과학의 전환은 종종 더 많은 데이터가 아니라 문제를 다시 배치하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인슐린은 당뇨병을 정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도 다르게 배치하면 풀릴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의학의 역사는 종종 한 순간의 기적으로 기억된다. 침대에 누워 있던 환자가 다시 일어서는 장면, 불치로 여겨졌던 병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은 순간. 그 장면이 시작되기 전에 작은 기적의 씨앗은 언제나 훨씬 앞쪽에 있다.                     p.333~334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았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었다. 수없이 봐온 그림인데도, 그림 속 패턴들이 적혈구의 전형적인 형태와 닮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기 때문이다. 황금빛 장식 사이로 작은 붉은 원형들이 반복해 나타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원형들은 중심이 옅고 가장자리가 진한 도넛 모양을 하고 있다. 그것을 클림트가 활동하던 시기에 출판된 백과사전에 실린 혈액의 컬러 도판과 비교해보면, 매우 그럴듯한데 덕분에 20세기 초 빈에서는 예술과 의학이 긴밀히 교류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클림트의 그림에 숨겨진 생물학적 도상, 이른바 ‘클림트 코드’를 해석한 저자의 연구는 세계 3대 의학저널인 《JAMA》에 소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 교양서 《클림트를 해부하다》를 펴내기도 했다고 하니 찾아서 읽어 봐야겠다.


이 책이 특히나 흥미로웠던 것은 150여 장의 도판 등 다채로운 시각 자료들이었다. 최고의 명화부터 잡지 표지와 삽화, 사진과 냅킨에 그린 스케치까지 수록해 이미지로 의과학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준다. 베살리우스가 기획한 근육편 삽화, 하비의 혈액순환 도해, 레이우엔훅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미세 생명체의 스케치, 런던 콜레라 환자 분포 지도, 뇌와 인체의 관계를 다룬 호문쿨루스 모형, ‘구원자’ 페니실린을 담은 전쟁 포스터, 왓슨과 크릭이 세운 DNA 이중나선 모형 등 굉장히 자료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좋았다. 그리고 단순히 의학사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의과학자들의 질문과 사고 과정에 주목해 수많은 혁신의 순간들 뒤에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풀어내고 있어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결과보다 질문에, 정답보다 그에 이르는 경로를 추적하고 있어 발견과 발명에 이르게 한 사고 과정, 아이디어의 씨앗, 연구자의 태도까지 함께 만날 수 있었다. 의학은 어렵고 차갑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학사를 색다른 방식으로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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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 간 호모 사피엔스 - 다행성 문명에서 살아갈 새로운 인류에 대한 지적 탐사
조황희.곽지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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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SF 영화를 통해 접하는 우주는 종종 낭만적인 모험의 무대이거나 무한한 기회가 잠든 공간으로 묘사되곤 한다. 창밖으로 푸른 지구가 보이고 은하수가 흐르는 그곳은 시각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지만, 물리학과 의생명공학의 냉철한 시각으로 바라본 우주는 본질적으로 가혹한 죽음의 공간에 불과하다. 인간이라는 종은 수천년 동안 지구라는 거대하고 완벽한 생명유지장치에 최적화되어 진화해 왔기 대문이다. 대기권이라는 보호막을 벗어나는 순간, 인류는 상상 이상으로 가혹한 물리적 장벽과 마주한다.               p.55


아주 먼 옛날부터 인류에게 우주란 낭만적인 모험과 끝없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두꺼운 대기층과 강력한 자기장이라는 이중 보호막을 통해 안전했던 지구를 벗어나는 순간, 인류는 상상 이상으로 가혹한 물리적 장벽과 마주하게 된다. 기압이 존재하지 않는 진공, 영화 100도씨와 영상 120도씨를 오가는 극단적인 온도 차, DNA를 파괴하는 우주방사선, 그리고 신체의 생리적 균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미세중력때문이다. 특히 우주방사선은 온몸의 건강한 세포를 무차별적으로 노출시키는 광범위한 포화나 마찬가지라고 하니, 생명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 존재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가 지구의 중력을 뿌리치고 미지의 우주 공간으로 나아간 지 어느새 반세기가 넘었다. 사실 인류가 지구라는 중력의 요람을 벗어나 광활한 우주로 나아가는 여정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 인간의 상상력이 과학적 실체로 거듭나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기도 했다. 인류가 중력이라는 사슬을 끊고 미지의 궤도를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한 이래, 우주 개발은 늘 경이로운 과학적 성취인 동시에 막대한 자원 투입에 따른 효용성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우주 탐사의 여정에서 잉태된 수많은 기술 유산은 오늘날 정밀 의료장비부터 고성능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어 일상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 책은 공상과학 콘텐츠의 막연한 구상이 아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우주 개발의 미래를 담고 있어 흥미로웠다. 국가우주정책연구센터 초대 센터장을 지낸 조황희 박사와 우주생리학·우주의학을 연구하는 생리학자 곽지연 교수가 우주 개발의 현실성과 우주에서의 생존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류의 우주 거주 역사는 '잠깐의 방문'에서 '장기간의 상주'로, 나아가 '다행성 종'을 향한 거대한 진화의 길을 걷고 있다. 1960년대 초창기의 달 탐사선들이 단 몇 시간 동안 발자국 내지는 깃발 정도에 불과한 짧은 기록만을 남기고 돌아왔다면, 이후 스카이랩과 국제우주정거장 운영을 통해 폐쇄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술적 역량을 꾸준히 축적해 왔다. 이제 인류는 이러한 경험을 자양분 삼아 달 궤도의 '루나 게이트웨이'와 달 표면의 영구기지를 구축함으로써, 화성과 그 너머의 심우주를 향한 역사상 가장 장대한 항해를 시작하려 한다.                  p.364~365


20세기 중반까지 우주는 인류에게 단지 신화의 영역이거나 천문학적 탐구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주는 단순한 탐험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도달 가능한 공간, 인간이 거주 가능한 공간까지 확장되어 가고 있다. 우주개발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고, 지구를 넘어 달과 화성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가 차원을 넘어 민간이 우주를 향할 정도로 기술이 고도화된 시대가 된 것이다. 1960년대 초창기의 달 탐사선들이 단 몇 시간 동안 발자국 내지는 깃발 정도에 불과한 짧은 기록만을 남기고 돌아왔다면, 이후 스카이랩과 국제우주정거장 운영을 통해 폐쇄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술적 역량을 꾸준히 축적해 왔다. 이제 우주는 미지의 탐사지를 넘어 인류에게 필수적인 자원을 공급하는 에너지 기지이자 거대한 서비스 플랫폼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이 책은 우주로 간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호모 스페이시언스'라는 단어를 제시한다. 기술적으로 진보한 인간에서 한 단계 도약한 새로운 인류라는 뜻으로, 지구에서 터ㅐ어나서 자라는 지금의 인류와 다르게 우주에서 태어나고 자랄 새로운 인류를 말한다. 언젠가 정말 화성에도 인간이 거주하게 된다면, 혹은 다른 외계 행성에서 인류가 생활하게 된다면 가능한 세계 속에서 말이다. 우주 개발의 궁극적인 목적이 정교한 기계를 행성의 궤도에 올리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로켓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간이 우주에서 생존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설레는 일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우주 개발의 히스토리와 미래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실제 '우주에서 생존하는 법'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더 와닿았다. 우주선에서는 인간이 장기간 거주해야 하는 초소형 생태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먹고 숨 쉬는 기본적인 행위조차 거대한 공학적 과제가 된다는 것, 우주비행사 양성 과정은 철저히 데이터와 매뉴얼, 기계적 제어에 의해 통제되는 냉철한 과학의 영역이라는 것 등 매우 전문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풀어내고 있어 좋았다. 인류는 정말 지구를 떠나 달과 화성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상상해 본 적이 있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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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피의 계산에 대하여 2
솔베이 발레 지음, 손화수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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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해를 따라잡고 있다. 나는 1월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들을 찾아낸다. 내가 알고 있는 1월. 클레롱의 1월, 벨기에의 1월, 유럽 한가운데의 1월. 내게는 많은 눈이 필요하지 않다. 한 번은 가벼운 눈발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것을 얻었다. 나는 상점들에서 1월을 찾고, 1월의 음식들을 찾는다. 나는 수프를 먹거나 사과와 계피를 넣은 차를 마신다... 계절에 대한 수첩이 나의 사용 설명서가 되고, 나의 여행 동반자이자 안내서가 되며,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이 곧 나의 미래라는 생각을 한다.                     p.124


타라는 11월 18일이라는 시간에 갇혀 있다. 매일 아침 같은 날짜가 반복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전작에서 122번째 11월 18일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던 타라는, 어느 새 11월 18일이라는 하루를 365개를 모았다. 벌써 1년이 지난 것이다. 같은 가을의 날들을 한데 쌓아 올린다고 해서 그것이 한 해가 될 수는 없는데, 다른 날로 이어지는 통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출구는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남편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는 처음이자 유일한 날이지만, 타라에게만 똑같은 날들이 반복의 순환 속에 놓여진 것일까. 왜 시간의 균열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까. 1권에서 하루의 작동 방식을 조사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불규칙함 속에서 하루가 되돌아오는 시점을 찾으려 애썼던 타라는, 2권에서 대단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준다. 새로운 계절이 오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페리를 타고 눈이 있는 북쪽으로 겨울로 향해 간다. 1월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들을 찾아내고, 계속 북쪽으로 나아가며 2월의 추위를 향해 간다. 그리고 계절의 수첩을 정보들로 채운다. 겨울 음식을 먹고 겨울옷을 사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닌다. 그리고 봄의 징후를 찾아 돌아다니고, 봄을 향한 갈망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늦여름의 도시들을 찾아 나서고, 가을의 거리들을 생각하며 계절의 조각들을 수집하며 새로운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사실 1권을 읽을 때만 해도 당장 2권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 신기했다. 무려 7부작으로 구성된 작품인데, 대체 별다른 사건도 벌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루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7권이나 되는 책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 도착해 이미 커피를 주문해두었다. 우리는 9시에 창가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할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로마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결국은 그 이야기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가방을 든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헨리 데일,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몰랐던 것은 그 밖에도 많았다. 예를 들어 그 역시 11월의 어느 하루, 18일에 갇혀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나는 시계를 본다. 곧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가 약속 장소에 나타날 것인지.              p.282~283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는 7부작이며 현재 5부까지 출간되었고, 1부가 2025년 국제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 국내에 출간된 것은 소설 연작의 서막을 여는 첫 두 권이다. 전부터 궁금했던 솔베이 발레의 작품을 드디어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다. 솔베이 발레는 1990년대 덴마크 문학의 걸작 《법에 따르면》의 작가로 이 작품으로 30여 년 만에 세계문학계로의 복귀를 알렸다. “사변소설(SF) 장르에 있어서 시의적절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22년 북유럽의회문학상(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타임루프' 소재로 유명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 개봉하기 6년 전인 1987년에 처음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소재는 유사해보여도 막상 작품을 읽어 보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쓰인 거라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이번에 전체 7부작의 두 번째 이야기를 읽었다. 같은 시간을 계속 반복해 겪게 되는 '타임루프'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하면 일정한 패턴의 서사가 있게 마련인데, 솔베이 발레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내고 있다. 다양한 길이의 일기 형식으로 쓰였는데, #368에서 시작해 #1144까지... 거의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반복되는 11월 18월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최면에 걸린 듯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와 삶에 대한 사유를 철학적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어떻게 타임루프에서 벗어나느냐보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일까에 대한 탐구가 더 밀도있게 펼쳐진다는 점이 이 작품만의 매력이다. 표지 이미지처럼 나선형으로 된 회오리에 점점 더 휘말리는 느낌으로 서서히 이야기 속으로 잠식되는 기분일 것이다. 각권의 분량이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밀도 있는 이야기라 천천히, 깊이있게 읽어야 했다. 그렇게 그저 감탄하며 홀린듯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2권의 결말 또한 매우 충격적이다.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해서 독자들을 안달하게 하는 멋진 엔딩이었다. 자, 그래서 세 번째 이야기는 언제 나오나요?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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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바꾼 지구의 역사 - 식물과 동물, 그리고 진화의 위대한 로맨스
라일리 블랙 지음, 조정남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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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 세상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우연들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자연을 좀 더 직관적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반드시 존재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과거의 대멸종과 끊임없이 일어나는 새로운 생명체들이 진화한 결과 이 세상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간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집 앞마당의 민트나무들이 왜 존재하는지, 그 근본적인 이야기들이 실은 아주 얇은 시간의 단면 속에 있다.                p.22


바람에 살랑대는 고사리와 소철 밭이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아득히 높은 침엽수가 빽빽이 솟아난 울창한 숲에서 아파토사우루스가 몇 시간째 풀을 뜯고 있다. 20미터 길이에, 20톤이나 되는 무게가 나가는 공룡의 뼈와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을 섭취해야 한다. 한낮의 열기를 잊은 공기는 시원하며, 식사를 방해할 알로사우르스도 주변에 없어 완벽하다. 목이 길고 몸이 단단한 거대 초식동물인 아파토사우루스는 그렇게 연필처럼 한 줄로 가지런한 이빨들로 쥐라기 식물을 크게 한입 베어문다. 쥐라기 후기는 따뜻하고 습했다. 연 평균 기온이 20도 정도로 매우 따뜻했다. 수백만 년 동안 세상은 끝나지 않는 여름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아파토사우르스를 비롯한 다른 초식공룡들의 촉촉하고 아삭아삭한 주식이 되어준 식물들이 풍부했던 이유도 이런 환경 덕분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라일리 블랙은 고생물학자이자 과학 저술가로 원래 티라노사우르스 렉스를 찾아다니는 일을 했다. 인내심의 한계를 매일 시험하는 화석 찾기 작업을 통해 그저 탐사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수십억 년의 지질학 역사와 식물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식물을 동물 세계의 조용한 배경쯤으로 여기지만, 사실 지구에서 식물의 역사를 떼어놓고는 우리 행성의 생명체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식물도 인간처럼 살아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마음과 감정이 없기에 생명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처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식물은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시간에 따라 성장하고, 생식세포들을 바람에 날려 이동시킬 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서로 소통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가장 놀라운 재주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우리 삶에 너무나 중요해서 우리가 그들의 삶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구와 생명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 존재가 바로 식물이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공룡과 포유류, 인간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역사 한가운데에 있었던 식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식물은 놀라울 만큼 민감한 존재다. 그래야만 했다. 팽나무 같은 나무는 평생 부리를 내린 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기에, 굶주린 초식 동물을 피하거나 힘으로 쫓아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식물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공격자를 몰아내지는 못하더라도, 수많은 입이 남긴 상처를 재빨리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진화시켜왔다. 진동을 감지하는 능력도 그중 하나다. 다른 나무들이 화학 신호를 통해 초식동물이 다가왔음을 서로 알리듯이, 진동 역시 나무에게 경고 신호가 될 수 있다.               p.183


공룡이나 다른 거대 동물들은 종종 시간을 통찰하게 한다. 이 생명체들은 너무나 거대하고 특이해서 도대체 언제 지구에 살았고 왜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생물종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면 어떻게 생겼을지, 그리고 어떤 일상생활을 누렸는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식물은 우리의 고생물학적 상상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현장에서 발굴작업을 하는 학자들도 대부분 공룡이나 다른 고대 동물들에 관심이 많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늘 그들의 진짜 모습과 일상생활이 궁금했고, 그것을 상상하려면 그 장면 안에 반드시 식물으 들어와야 했다. 식물들과 그 서식지들을 이해하면 지질시대를 관통하는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고, 자연과의 관계에도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과학책을 많이 읽는 편이라 생명과 지구의 역사, 진화의 단계, 12억년의 연대기를 다룬 수많은 책들을 만나왔다. 그럼에도 이 책은 굉장히 신선한 방식으로 쓰였기에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지구의 역사를 식물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책이기에, 우리가 그 동안 읽어온 수많은 인류와 지구의 역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장은 12억 년 전 캐나다 북극 지역에서 시작해 뉴멕시코, 유타, 콜롬비아, 남대서양, 네브라스카 등을 시대별로 거쳐 1만 5,000년 전 뉴욕주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식물과 지구의 서사로 함께 그려낸다.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당시의 시대적 풍경들을 상상력으로 풀어내고 있어 딱딱한 과학책이 아니라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책이기도 했다. 각 장이 해당 시대를 보여주는 소설처럼 시작되기 때문에 과학이 어렵게 느껴졌던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장은 모기 한마리가 주인공이고, 어떤 장은 작은 식물이, 또 어떤 장에선 공룡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진화는 동물의 역사였지만, 이 책은 그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진정한 주역이 식물이었다고 말한다. 지구의 역사를 가장 작은 존재였던 식물을 통해 읽어 내려간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각 시기별로 과거 생태계를 생생한 묘사로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마치 눈 앞에 보이는 듯한, 직접 관찰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 경이로운 지구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만나보고 싶다면, 쉽고 재미있게 진화를 다룬 과학책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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