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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북다 / 2026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떠났다. 가까운 곳에서 저 먼 곳까지 커다란 검은 점들이 뜨거운 햇볕 아래 먼지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셴 할아버지는 자기 집 밭머리에 섰다. 공허한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음속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는 온몸을 떨면서 마을을 통틀어, 산맥 전체를 통틀어 일흔두 살 노인 하나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은 한없이 공허해졌다. 죽음 같은 적막과 황량함이 깊은 가을처럼 그의 온몸 위로 내려앉았다. p.21
옌롄커의 대표작 <연월일>이 새롭게 양장본으로 나왔다. 이 작품은 옌롄커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이자, “영감을 얻어 쓴 유일한 소설”이기도 하다. 기존에 국내 출간 당시에는 다른 중단편 소설과 묶어서 나왔으나, 이번 개정판에서는 작품을 온전히 만날 수 있도록 한 권의 단행본으로 선보인다. 이 작품은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중국 농촌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그 속에서 살아 남고자 악전고투하는 한 노인과 눈먼 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천고 이래 최악의 가뭄이 덮친 그해 세상 전체가 온통 말라 죽은 빛깔이었고 농가들은 세월 속에서 기다림에 지쳐갔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지독한 가뭄을 피해 떠나기 시작했고,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는 남았다. 자신의 나이 일흔둘이라 사흘쯤 걷다가 지칠 거라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마을에서 죽고 싶다고 말이다. 그렇게 모두들 떠나고 척박한 땅에 하나 남은 옥수수 이삭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사실 개가 눈이 멀게 된 것에는 사연이 있었다. 어느 해든 간에 극심한 가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은 마을 어귀에 제단을 설치하고 공양물 세 접시와 용왕의 형상으로 그려 넣은 물 항아리 두 개를 올려놓는다.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고, 개 한 마리를 두 항아리 사이에 묶어놓고 머리가 하늘을 향하게 한다. 보통은 길면 이레, 짧으면 사흘 만에 해는 개의 울부짖음에 질려 물러가고 바람이 불면서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 이어지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개가 보름을 울부짖었지만 해가 여전히 작열했던 것이다. 그렇게 열엿새째 되던 날 셴 할아버지가 물을 다 마셔버리고, 목에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 개를 발견하고 풀어준다. 그리고 개의 두 눈동자가 작열하는 해에 말라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개를 거둬들이기로 마음먹고, 그때부터 마을에 홀로 남은 지금까지 함께 했던 것이다. 햇빛은 그칠 줄 모르는데 우물물이 말라가고 있었고, 그나마 있던 양식도 떨어질 날이 곧 오고야 말 것이다. 과연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는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장님아,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해. 누가 살든지 먼저 죽는 쪽이 이 구덩이에 묻히는 거야, 알았지? ... 죽고 사는 건 운명에 맡기자꾸나. 내가 이 동전을 하늘에 던지마. 동전이 땅에 떨어졌을 때 글자가 있는 거친 면이 나오면 네가 나를 이 무덤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고 그림이 있는 면이 나오면 내가 널 이 무덤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는 걸로 하자꾸나.” p.165
옌롄커는 집필하는 작품마다 판매나 홍보가 금지되면서도 중국 평단과 대중은 물론, 세계 문학계의 뜨거운 호응을 얻어온 문제적 작가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사서>, <딩씨 마을의 꿈>들은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옌롄커는 가혹한 현실에서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을 섬세한 필치와 회화적인 시어로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단한 삶의 굴레 앞에선 인간들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어느 순간 초현실적인 상상력이 결합되어 거대한 서사가 완성된다. 시처럼 아름답고 감각적인 묘사, 그리고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만남은 끝내 먹먹한 감동을 남긴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단순한 생존을 넘어 인간다움의 본질을 묻는 이 작품은 가슴 먹먹한 여운을 남겨 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연이 만들어낸 재난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은 허먼 멜빌의 <모비 딕>,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와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두 고전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보여주는 느낌이라면, 옌롄커의 작품에서는 인간과 자연과의 투쟁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센 할아버지는 죽으면 죽는 것, 사는 날까지 살아보겠다는 식으로 버텼고, 결국은 죽고 사는 건 운명에 맡기겠다는 식의 태도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연못가에서 하룻밤을 꼬박 늑대 무리와 대치하던 장면과 죽고 사는 건 운명에 맡기자고 눈먼 개에게 말하며 동전을 던지는 장면은 특히나 감동적이었다. '생명의 고갈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