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교유서가 어제의책
퀜틴 스키너 지음, 조승래 옮김 / 교유서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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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왜 이러한 자유론의 초기 경향을 발굴해내는 작업이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내 생각에 그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는 소중한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자유를 좀더 민주적으로 이해하여 자유와 평등, 자유와 민주주의를 최근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허용하는 것보다 더 밀접하게 한 묶음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p.27


교유서가의 '어제의 책' 시리즈는 절판된 비운의 책을 찾아 다시 선보이는 아주 특별한 기획으로 훌륭한 책들을 다시 독자들 곁으로 데려와 주었다. 이번에 나온 것은 지성사학계의 거장 퀜틴 스키너의 고전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이다. 오랫동안 절판되어 독자들의 재출간 요청이 끊이지 않았던 책이기도 하다. 


자유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지금, 다시 읽어볼 기회가 생겨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이번에 재출간된 버전은 역자인 조승래 교수의 서문과 해설 <노예의 자유를 넘어서>와 보론 <로크의 자유론>을 추가한 버전이기 때문에 책의 본문 내용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17세기 중반 혁명기의 잉글랜드 왕정의 비판자들이 동료 시민들의 자유를 보존하고 고양하려고 했을 때, 그들이 말했던 자유는 자유주의적 자유가 아니었다. 자유는 단지 강제적 간섭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지배와 종속의 배경이 되는 조건에 의해서도 상실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퀜틴 스키너는 이러한 자유론의 초기 경향을 발굴해내는 작업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는 소중한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내가 주장한 것처럼, 근대에 들어와 서양에서는 이러한 첫번째 입장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두번째 입장은 대체로 접어두고 있었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데에는 명백하게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그것이 선택의 문제였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려 하였다. 우리의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이었는가? 내가 발굴한 신로마적 자유를 반추하면서 독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 답해보기를 바란다.               p.155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비롯해서 19세기의 자유론이다. 하지만 이 책은 17세기 잉글랜드 혁명을 전후로 한 잉글랜드 지식인들의 자유에 대한 담론을 분석한다. 저자는 신로마적 이론이 처음 어떤 지적, 정치적 맥락 안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알아보고, 그 이론 자체의 구조와 전제들을 탐구한다. 그는 '자유'에 대해서 개인이든 국가든 자율적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며 다른 사람의 의지나 권력에 귀속되지 않은 상태, 즉 종속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에 비해 오늘날에는 '자유'를 단순히 물리적, 강압적 제약이 없는 상태로 정의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두 가지 자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자가 1997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했던 강연에서 시작되었던 책이 신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여전히 시의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자유주의적 자유 개념 이전에 존재했던 공화주의적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책을 읽으며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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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 교유서가 시집 5
송하얀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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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가 그랬을 리 없는데 네가 운다. 소주병을 쌓아두고 술집 구석에서. 너를 내 무릎에 눕히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혼자라고. 고아라고. 너의 머리를 쓰다듬지 않고 눈물을 닦아주지 않는다. 너는 테이블을 엎고 벽을 친다. 네 상처에 약을 발라주지 않는다. 나는 반대쪽 구석 테이블에 앉아 술만 마신다. 아무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 '마주침' 중에서, p.35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이다. 소후에 시인의 <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 원성은 시인의 <비극의 재료>, 리사 시인의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기혁 시인의 <소설책>에 이어 송하얀 시인의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가 나왔다. 교유서가의 시집이 특별한 것은 표지 빛깔에 맞는 컬러로 내지에 그라데이션을 줬다는 점이다. 심플한 표지 이미지도 마음에 들고, 페이지를 펼치면 만날 수 있는 은은한 색감도 너무 예쁘다.




이번에 만난 것은 송하얀 시인의 첫 시집이라고 하는데, 수록된 41편의 시들이 대부분 산문시 형식으로 쓰였다. 여성들이 사회에서 겪는 차별과 억압 들에 대해 그리고 있어서인지 굉장히 어둡고, 무겁다. 개인적으로는 그 동안 읽어 왔던 시집들에 비해 다소 어렵게 느껴졌는데, 다행히 '교환독서'라는 형식으로 읽게 되어 어려운 부분들에 공감하고, 그려진 현실에 대해 함께 분노하며 읽었다. 


서두에 쓰인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고통은 문장의 윤곽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시적인 언어들 아래 지독하게 솔직한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줄기 빛이 있고, 눈빛이 마주치고, 웃으며 꿈꿀 수 있는 희망이 희미하게 담겨 있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저 멀리 빛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현실 속에서도 '빛나는 것들은 여전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절교를 선언한 한 사람/너는 화를 내고 나를 붙들고 흔들어댄다.//같이 마시던 술이 몸안에서 출렁인다./예전의 내가 나에게서 떨어져나갈 듯/내 어깨 끝에 매달려 있다.//내 어깨에 닿은 너의 손은 아직 따뜻하다./어떤 사람 그런 사람 그때 걔/한때의 우리는 우리를 우리라 부르지 못할 것 같다.//사람에게 토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만//                 - '웃는 사람' 중에서, p.80


전반적으로 어둡고, 묵직한 분위기이지만, 그 중에서도 '오버타임'이라는 시는 시각적으로도 눈앞에 그려지는 듯해 오싹한 기분으로 읽었다. 시작부터 엘리베이터 바닥에 핏물이 고여 있고, 집에 들어가기 위해 수북하게 쌓인 손목들을 치워야 한다는 문장이 서두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잘린 손목들을 밟고 가야 하는 이유, 남은 손들이 문을 두드리고 욕설을 퍼부어도 문을 닫아버리고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현실이 두 페이지 안에 차곡차곡 담겨 있어 무섭고, 슬픈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는 지금도 어디선가 어떤 '일'을 겪고 힘들어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되길, 스스로를 살리는 일이 가장 고귀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길 간절히 바라며 읽었다. 




인상적인 시들이 많았지만,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엄마의 독서법'이라는 시였다. 이 시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엄마라는 존재가 우리가 익히 상상하는 모성의 상징이 아니라 상처와 욕망으로 얼룩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더는 읽지 않는 책들이 쌓여 있다는 것은 엄마가 이루지 못한 꿈과 미래일 것이고, 책 사이에서 면도날을 꺼내 스스로를 베는 행위는 고단한 현실 속에서 이상을 꿈꾸기 위해서 치뤄야 하는 대가같은 게 아닐까. 그런 엄마를 자는 척하며 몰래 지켜보는 내가 만드는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본다. 


이 시집은 후반부에 수록된 해설도 아주 좋았는데, 평론가님의 문장도 마치 시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시는 그 불가능성 속에서도 남은 온기를 찾으려는 간절한 시도다. 그것이야말로 송하얀의 시가 품은 가장 윤리적인 감각에 해당한다"는 문장에 특히 공감하며 밑줄을 그었다. 시집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다. 오독의 자유가 보장된 장르이지만, 생각이 많아질수록 더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그럼에도 시를 읽는 시간이, 문장과 문장 사이 여백에서 상상하는 시간이 참 좋다. 자, "말하지 못하는 자의 말, 들리지 않는 자의 숨, 사라진 자의 흔적을 품으려는 몸짓"이 궁금하다면, 이 시집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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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성 도시, 피토폴리스 - 회색 콘크리트를 덮는 초록 혁명
스테파노 만쿠소 지음, 김현주 옮김 / 김영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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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간단히 말해, 식물과 우리의 관계는 결코 단순한 음식이나 에너지 의존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어떻게 정의하든 매우 긴밀한 관계 속에서 식물의 작용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매우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시를 건설하거나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는 데에서도 우리보다 먼저 숲을 거처로 삼아 살았던 그 2만 세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p.11


<식물 혁명>,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 등의 작품으로 만났던 세계적인 식물신경생물학자 스테파노 만쿠소의 신작이다. '회색 콘크리트를 덮는 초록 혁명'이라는 부제와 근사한 표지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반투명한 겉표지는 식물의 잎맥을 확대한 것 같은 이미지이고, 속표지는 도시의 구획별로 보여주는 지도의 이미지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화해 불가능해 보이는 도시와 자연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이니 그야말로 찰떡 표지인 셈이다.


저자는 도시 면적의 상당 부분을 식물에 할당해야 한다고 말한다.동물의 생명은 식물의 생명에 달렸고, 식물이 없다면 어떠한 동물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식물은 먹이사슬의 기초를 이루고 우리가 들이마시는 산소를 생산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식물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석유와 석탄 등 화석 에너지는 식물 화석에서 비롯되었으며, 의약품의 주성분과 섬유 직무르 건축 자재 대부분의 출처가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 우리의 도시가 위기에 처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도시를 '동물'처럼 설계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도시를 확산된 유기체이자 다른 생명체와 공동체를 이루는 존재로 상상하는 것, 즉 식물처럼 건설된 식물성 도시로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지구온난화와의 전쟁에서 이러한 냉각 효과만으로도 나무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아군이다. 하지만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이것만이 아니다. 사실상 너무 덕분에 건물이 냉각되어 에너지 소비량이 감소되고, 더불어 에어컨 수요가 줄어든다. 그리고 에너지 수요를 줄임으로써 에너지 사용으로 발생된 대기오염 물질과 온실가스 배출을 감소시킬 뿐 아니라, 대기오염 물질을 직접적으로 제거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대기의 질을 개선시킨다.                 p.179


길을 걷다가 깨진 보도블록이나 갈라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틈새, 건물 벽돌 사이에서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서 자라는 틈새 식물들은 누군가 심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게 된 것이다.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식물들이 계속 틈새를 선택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은 그들에게 최선의 삶의 형태였던 것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도시에 사는 종 대부분이 빠른 속도로 새로운 도시 환경에 자신들의 몸과 습성을 적응시키고 있다. 도시 생물이 겪는 변화의 대부분이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재앙에 저항하는 능력에서 비롯된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다. 왜 인간은 이 지구상에 더불어 살고 있는 인간 아닌 존재들, 식물을 포함한 모든 비인간 존재에 대해 신경쓰지 않게 된 것일까. 인간이 만들어낸 도시 환경을 우리와 공유하고 있는 모든 동물과 식물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지구의 생명 주기와 비교해보면, 단 몇 년 만에 인류는 역사를 바꿀 정도의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최근 1만 년 동안 우리 인간의 진화와 활동은 식물이 지구를 식민지화한 것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지구의 에너지 대사를 변화시켰다. 생태계를 지나치게 훼손하면 안된다는 것을 누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경제 성장을 늦추지 않고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제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지구가 임계점에 가까워지기 전에 공공재의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범세계적인 관리 형태를 고안하여 혁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현대 우리의 도시가 왜 멸종 위기에 처했는지 그 배경을 짚어보고, 식물의 지혜를 도시공학에 접목해 불확실한 기후 재앙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아스팔트로 덮인 도로 일부를 걷어내 나무로 채우고, 도시 면적의 상당 부분을 식물에 할당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식물성 도시(Phytopolis)’로의 전환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해나간다면, 회색 콘크리트를 덮는 초록 혁명도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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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쿠킹 다이어리 - 언제나 꺼내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영화 한 그릇
오토나쿨.박지완 지음 / 유선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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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낫토의 촉감이 떠오른다. 발효된 콩에서 나온 미끈한 실에 가득한 차가움은 사실 일반적인 좋은 맛에는 포함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맛이냐고 물어도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냥 한번 먹어보라고 할 뿐. 마찬가지로 <녹차의 맛>을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줄거리를 설명하기 어려우니 직접 보고 느껴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일본 어디엔가 살아가고 있을 그 가족의 안녕을 바라게 되는 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61~62


<리틀 포레스트>, <줄리&줄리아>, <바베트의 만찬>, <카모메 식당> 등 영화를 보고 나서 유독 음식이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 영화 속 음식에는 인물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며, 혹은 그 음식을 먹으며 용기를 받고, 위로를 받고, 하루를 견뎌낼 힘을 얻는다. 이 책은 그렇게 영화와 요리를 사랑하는 두 여자가 한 편의 영화에서 출발해 한 그릇의 요리로 완성한 기록이다. <재생의 부엌>과 <도쿄 일인 생활>을 쓴 작가 오토나쿨과 영화 <내가 죽던 날>의 감독 박지완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직접 요리도 하며 일기처럼 글을 썼다. 


<걸어도 걸어도>의 일본식 냉소면, <호텔 슈발리에>의 피넛버터 쿠키, <녹차의 맛>의 연두부 낫토, <리플리>의 프리타타,  <해피 투게더>의 광동식 닭고기 덮밥 등 요리를 통해 영화를 추억할 수 있어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달콤한 인생>의 주인공 선우가 자신이 일하는 스카이라운지에서 영업을 마치며 에스프레소 한 잔과 함께 초콜릿 케이크를 한 입 먹는 장면에서 시작해, 김지운 감독님께 들었던 시나리오 강좌 수업이 끝나고 처음 마셔보았던 에스프레소의 추억도 흥미로웠고 <호텔 슈발리에>를 스무번은 봤다는 공통점으로 만난  그녀에게 만들어줬던 피넛버터 쿠키에 대한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어 누구나 집에서 만들어볼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고독이 두려운 사람들을 위한 고독한 멘치카츠, 지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삼계탕, 어느 여름날의 잊히지 않는 콩나물 냉국 등 어렵거나 복잡한 레시피가 없어 한번쯤 시도해보고 싶어졌다. 




냉장고에서 맥주와 잔을 꺼내 화려한 포테토 사라다 옆에 둔다. 이걸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부스팅 된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젓가락으로 먼저 토핑을 올리지 않은 포테토 사라다를 입에 넣는다. 재료들이 조화롭게 존재감을 뽐내며 부드럽고 상큼하고 아삭하고 고소하고, 혼자 다 한다. 여기에 다시 맥주 한 모금으로 입안을 비우고 다시 토핑을 곁들여 한 입. 베이컨 크럼블과 양파 플레이크의 부서지는 소리와 그 풍미가 먼저 느껴지면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p.212~213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운 순간들을 맞이할 때, 바닥까지 추락한 듯한 절망적인 기분이 들 때, 너무 피곤해서 몸도 마음도 내 것 같이 느껴지지 않을 때 말이다. 그럴 때 가장 즉각적인 처방전으로 맛있는 음식만한 게 없다. 다시 힘을 내볼수 있도록 속을 달래주고, 마음을 토닥여주니 말이다. 추운 겨울날 먹는 따끈한 어묵탕, 뭐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게하는 달콤한 케이크, 속에 맺힌 화를 다 없애줄 것 같은 매콤한 낙지볶음 등 음식만이 줄 수 있는 힘이다. 돌아보면 삶의 중요한 모든 순간에 음식이 함께 했다. 영화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장면에서 음식이 등장하는 경우가 꽤 많다. 그 영화 속 한 장면이 남긴 감정을 고스란히 재현해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 음식을 요리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참 편안하고도, 따스한 기분이 들어 너무 좋았다. 


좋은 영화를 보고 길을 나서면 언제나 그 여운에 마음 한구석이 싱숭생숭해진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리며 가볍게 요리를 해보면 어떨까. '그 영화에 담긴 이야기들이 공기처럼 흘러나와 내 삶에 스며'드는 마법같은 순간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영화와 요리가 그저 하나의 취미를 넘어 우리 삶의 큰 위안과 기분 좋은 의욕으로 바뀌는 순간들을 담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누구나 각자 좋아하는 영화 속 음식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달걀말이, <봄날은 간다>의 라면, <줄리&줄리아>에 등장하는 뵈프 부르기뇽 같은 음식들 말이다. 좋은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을 떠올려 봐도 좋고, 직접 만든 소박한 음식을 통해 우리의 매일을 지탱하는 순간의 소중함 발견하는 계기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대충 먹어도 살 수 있고, 영화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좋은 음식과 영화는 삶을 한층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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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장례식에 초대받았다
헬렌 듀런트 지음, 황성연 옮김 / 서사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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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무덤 가까이 다가가 관이 땅속으로 영원히 묻히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것은 큰 실수였다.

오늘 내가 이곳에 초대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장례식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새하얀 관 위, 황금색 명패에 큰 글씨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앨리스 앤더슨'

바로 나다.                  p.17


익명의 이메일로 장례식 초대장이 도착한다. 보낸 사람에 대한 단서도, 고인의 이름도 없는 수상한 이메일이었다. 사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도나가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한 건 고인이 내게 무언가를 남겼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삼 년 동안 사람들을 피해 숨죽이며 살아온 도나에게는 돈이 한푼도 없었고, 고인이 남긴 것이 돈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장례식은 호화로운 부촌에서 진행되었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도나는 그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으며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려는데, 새하얀 관 위에 쓰여진 이름을 발견한다. 그건 자신의 이름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동안 조심히 살아왔고, 과거의 삶과 이어질 만한 연결 고리는 모두 끊어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이상한 일은 그 뒤로도 계속된다. 장례식이 끝나고 이어질 조촐한 장례식이 앨리스가 살던 집에서 열린다며, 앨리스의 고용주이자 장례식을 주관한 남자 맥스가 도나를 초대한 것이다. 그에게 앨리스가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과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나는 그 집으로 향한다. 호화로운 집에서 벌어지는 다과회에서 도나는 갑작스럽게 앨리스가 하던 일을 이어서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저 잠깐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일자리를 제안받은 것이다. 앨리스는 맥스의 비서로 그의 사업 전반에 관련된 일을 처리했었고, 당장 그의 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궁금한 일이 계속 쌓이고 있었기에, 도나는 그 제안을 덜컬 수락해버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곳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한나의 것일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한나는 죽은 걸까. 눈물이 터지고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머리를 다친 채 하룻밤을 돼지우리에서 보냈고 이제 막 알게 된 사촌이 살해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한나를 찾아서 이 집을 떠나는 게 상책이다. 나는 옷소매로 입을 닦고 몸을 숙여 자세히 봤다. 틀림없이 사람 손이다.                     p.315~316


도나가 맥스의 저택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의문투성이다. 도나는 그곳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말을 특히 조심하려고 애쓴다. 이야기는 단순하게, 과거는 최대한 짧게, 실수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버틴다. 그러면서도 앨리스에 대해서, 자신의 과거와의 접점에 대해서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도나는 삼년 전에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고,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상환 일자를 맞추지 못했다. 이자가 붙으면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 된 탓에 이름을 바꾸고 숨어 지냈던 것이다. 지금은 도나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점차 자신의 과거와 앨리스라는 이름을 사용한 여성에 대해서 알게 된다. 과연 도나는 진실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까.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숨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전개로 시작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한 호흡으로 달려간다. 초반부는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될 만큼 이상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어느 정도는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어리둥절한 채 속수무책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니 말이다. 그런 상태로 이야기에 끌려가다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되니 그야말로 도파민 터지는 심리 스릴러의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헬렌 듀런트는 10년간 영국 범죄소설의 최전선을 지켜왔다. 이 작품 역시 굿리즈 누적 평점 11만 건 이상, 평점 4점 이상 기록한 히트작이다. 지루할 틈없는 페이지터너를 찾고 있다면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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