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행복 톤 텔레헨의 어른을 위한 철학 동화
톤 텔레헨 지음, 김고둥 그림, 유동익 옮김 / arte(아르테)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슴도치는 동물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길 원하지 않았고 동물들이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

고슴도치는 덤불이 때때로 가시에 달라붙듯이 동물들이 가시에 달라붙을까 봐 두려웠다.

그중 최악의 경우는 그러한 일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생하는 것이다.              p.93


톤 텔레헨의 어른을 위한 철학동화 시리즈 신작이다. 그는 작은 숲 속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해 일상의 고민들을 하고 있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들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본다. <고슴도치의 소원>, <코끼리의 마음>, <다람쥐의 위로>등의 작품을 읽어 봤었는데, 이번에 나온 것은 <고슴도치의 소원>에 이은 후속작이다. 전작들을 읽으면서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랬어.' 라고. 토닥토닥 위로해주고 싶은 기분도 들고, 안쓰러워 보듬어 주고 싶은 기분도 들고, 다들 그런거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고슴도치의 소원>에서는 혼자 사는 외로운 고슴도치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기 위해 편지를 써놓고는 계속 고민을 했었다. 누군가에게 한 발 다가가기가 너무도 두렵고, 어렵기만 했다. 소심한 고슴도치에 이어 <코끼리의 마음>에서는 대책 없이 무모한 코끼리가 등장했다. 상처받고 놀림당하고 결국엔 후회하더라도, 그저 나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말하는 이상한 코끼리의 끊임없는 도전에 이어 <잘 지내니>, <잘 다녀와>에서는 언젠가 숲속 일상을 떠나볼 생각을 품고 있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다람쥐의 위로>에서는 다람쥐와 숲속 동물 친구들이 각자의 걱정거리를 안고 고민하는 모습이 그려졌었다. 




고슴도치는 한숨을 쉬며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마. 그게 최고야. 불필요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고, 부수적이지도 않고, 어떤 것도 아닌 것.

고슴도치는 나무들 사이로 반짝이는 강물을 보았다. 내가 갈 곳은 저기야, 고슴도치는 생각했다.            p.171


이번 작품에서 고슴도치는 자신의 가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동물들에게 팔려고 내놓기도 하고, 늘 생각과 상상을 너무 많이 한다는 생각에 생각하기를 금지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생일에 무리는 싫고 한 마리만 초대하고 싶어 고민한다. 혼자 사는 고슴도치는 외롭지만 막상 방문을 받는 건 부담스럽다. 누군가를 초대하려 해도 거절당할까 두렵고, 혼자 있는 건 심심하지만, 함께 있는 건 또 피곤하다. 뾰족뾰족 가시 때문에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동물로 상징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너무도 천연덕스럽고, 진지하게 그려지고 있어 아이도, 어른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고슴도치는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우유부단하며,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매사에 자신이 없다. 하지만 누구도 완벽해질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도 충분한, 굳이 행복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 



우리가 뭔가를 하든, 하지 않든 인생은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어도, 반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도, 오늘이 가면 내일은 오게 마련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새로운 길이 두려워 망설이면서 늘 안전한 길로만 가거나, 넘어지고 실패하면서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도전해 보거나. 중요한 것은 스스로 정말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에 있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흘러가 버린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이니 말이다. 


누구나 가끔은 혼자이고 싶지만, 또 절대 혼자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먼저 다가가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 내게 다가와 손 내밀어주기를 바라기도 하고, 혹시 내가 하는 행동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톤 텔레헨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겪어 봤을 법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누구나 일상에서 겪을 법한 사소한 순간들과 작은 마음들에 귀를 기울여주는 이야기라서 더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삶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고민해봤을 법한, 철학적이며 보편적인 질문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고민해나가는 귀여운 동물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사랑스러운 일러스트들이 함께 서사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간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일 아침 나는 텃밭에 간다 - 판다 할부지 강철원의 다정한 식물 수업
강철원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완두콩을 키우면서 귀엽고 올챙이같이 생긴 꽃을 처음으로 보았다. 콩을 반쪽으로 나눈 듯 양쪽으로 갈라지며 피어나는 하얀 꽃. 내가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두콩꽃도 함께 고개를 갸웃갸웃 하며 나를 보는 듯했다. 그런 앙증맞은 꽃이 지고 나면 콩꼬투리에서 열매들이 차오르는데, 점점 통통해지는 꼬투리를 보니 반가웠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는 완두콩! 그들의 폭풍 성장은 루이, 후이 쌍둥이 판다의 성장처럼 기특하고 감동적이었다.          p.86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자신만의 작은 텃밭을 하나 일구고 싶다는 로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고 귀농과 귀촌을 할 수도 없고, 도심에서 전원생활을 꿈꿀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나 역시 오랜 시간 식집사로 식물들을 돌보고 나니 텃밭에 대한 로망이 조금씩 생기고 있던 참이다. 내가 수확해서 먹는 채소의 맛이 궁금했고, 씨앗부터 열매를 수확하는 과정은 얼마나 힐링이 될까 기대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살면서 텃밭이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이번에 그런 로망을 해소시켜줄만한 책을 만났다.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바오패밀리를 돌보며 덩달아 우리에게 친근해진 에버랜드의 베테랑 주키퍼 강철원이 텃밭 농부로 변신했다. 동물들을 이해하기 위해 동물학과 동물번식학을, 그들에게 최적화된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 조경학을 공부했을 정도로 매사에 진심인 그라 텃밭일기도 수준급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옥수수를 심어서 수확하고, 가난한 시절 배를 채워 주던 찐 감자의 기억으로 씨감자를 심고, 쌈채소를 좋아해 들깨도 식재한다. 들깨를 수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깻잎을 먹기 위해서 말이다. 각각의 에피소드 뒤에는 남바할의 농사 팁이라고 해서 실제 농사를 할 때의 경험을 담은 노하우를 수록했다.  들깨를 심을 때는 두 포기씩 함께 심어야 한다는 것, 옥수수는 햇볕을 차단해 다른 작물들이 자라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입지 선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 부추는 겨울에 퇴비를 두툼하게 덮어 줘야 봄에 더 튼튼하고 향 좋게 자란다는 것 등등 실제로 텃밭을 가꾸게 되면 도움이 될만한 정보들로 가득하다. 




누가 봐 주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꿋꿋이 살아가는 텃밭 생명들. 그들을 돌보는 건 인간이 아니라 해와 바람과 흙과 물이다. 자연의 생명체들은 모두 그 돌봄과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그렇다면 자연 속 일부인 나는 어떤가? 햇살과 땅의 기운과 바람의 돌봄에 감사하고 있는지, 주어진 삶에 성실히 임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저 거름을 내고, 밭을 갈아 흙을 뒤섞으며, 식물들에게 농부의 발소리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나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면, 나는 매일 텃밭을 찾을 것이다.               p.250


살면서 되도록 입에 올리지 않는 단어가 '실패'와 '포기'라는 저자에게도 쉽게 통하지 않는 것이 텃밭이다. 수확해 보관해 두었던 아주까리 씨앗을 김고 기대를 품고 기다렸는데, 한 달이 지나도 싹이 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종묘상 사장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더니 씨앗을 보관하는 과정에서 발아에 필요한 에너지를 소실한 것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씨 뿌리고 물 주변 다 잘 자랄 것 같지만, 식물은 사람 못지않게 예민하고, 세심한 돌봄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그 일을 통해 배우게 된다. 그리고 동물원의 동물들도, 텃밭의 식물들도 진심과 정성으로 돌봐야 탈 없이 건강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애정을 듬뿍 쏟아도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았던 딸기 재배에 대한 이야기, 아이바오와 푸바오가 엄청나게 좋아했던 당근에 대한 사연, 부이, 후이 쌍둥이 판다의 성장처럼 기특하고 감동적이었던 완두콩의 폭풍 성장기, 각자의 역할을 하는 쪽파와 대파 에피소드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 텃밭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어, 수확한 채소로 만들어 먹는 음식들에 대한 팁도 배울 수 있다. 텃밭 레시피는 소박하고 건강한 식탁을 채워주는 남바할 여사의 노하우이다. 


텃밭의 사계절 풍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책이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아름다운 세밀화와 사진이 풍부하게 담겨 있어 더 생생하게 텃밭과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 더 좋았다. 텃밭 농부로서의 삶이 만만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렇게 텃밭을 가꾸며 살아보고 싶다. 나만의 텃밭을 꿈꿔 본 적이 있거나, 식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혼자 탑에서 농사 : 미션 1 황폐한 땅에서 살아남기 - 생존 과학 학습만화
조영선 지음, 이정태 그림, 네이버웹툰.이억주 감수 / 다산어린이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네이버 웹툰 <나 혼자 탑에서 농사>가 생존 과학 학습만화로 탄생했다. 어느 날 갑자기 도시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남아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 주요 내용인데, 힐링 판타지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번에 나온 책은 그 원작을 바탕으로 초등 필수 과학 지식을 함께 담아, 그 세계관을 살리면서도 학습 만화로서의 장점도 강화했다. 




어느 날, 서울 한복판에 갑자기 99층의 검은 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누가 탑을 만든 것인지, 왜 도시에 나타난 것인지, 어떻게 이 엄청난 높이의 건축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세워진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탑에 오르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검은 탑에 입장하는 티켓은 장당 2억이라는 비싼 금액이었고, 주인공 세준에게는 그림의 떡 같은 존재였다. 


학자금 대출을 갚으며 하루하루 힘들게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던 세준에게, 어느 날 이상한 구멍이 나타난다. 바로 검은 탑의 출입구였다. 입구로 들어서자 예상과는 달리 아무것도 없는 거대한 구덩이에 떨어지고 만다. 아무도 없었고, 자신이 가진 식량으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세준은 자신이 가진 식량을 모두 심어 살아남기 위한 농사를 시작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검은 탑 최고의 '탑 농부'가 된 세준과 동물 친구들이 새로운 열매를 수확하면서 시작된다. 처음 시도해 보는 접붙이기 기술을 통해 열린 열매는 빨간색으로 너무나 예뻤다. 그런데 그 맛있는 열매를 먹자마자 세준은 어린아이가 되어 버리고 마는데, 그 와중에 기억까지 잃어버린다.


난 누군데 여기 있는 거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


세준과 함께 농사를 지었던 동물 친구들 또한 전부 기억하지 못하자, 토끼들과 동물 동료들도 모두 당황하는데... 과연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세준은 다시 농사를 짓고 탑 농부가 되어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렇게 동료들과 다시 농사를 짓게 되는 과정을 통해 씨앗을 어떻게 채종하고, 심어야 하는지,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인체, 영양, 동물, 식물 등 초등 과학 교과 연계 지식이 가득하고, 귀여운 동물과 충직한 몬스터가 등장하는 협동 농사 미션이 만화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기 때문에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만화 에피소드 속에 과학 지식을 배울 수 있는 TIP이 수록되어 있고, 탑에서 과학 궁금증 해결이라는 코너를 통해 초등 필수 통합 과학 상식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무지개는 어떻게 생길까? 똥을 약으로 쓸 수 있을까? 동물들이 땀을 흘리지 않는 이유는? 식물은 햇빛과 물로만 자랄까? 등 일상 속에서 쉽게 호기심을 가질만한 질문들이 가득해 다양한 과학 지식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특히나 자극적인 콘텐츠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수확의 과정을 보여주며 농사의 가치, 협동과 노력의 중요성, 생명의 소중함 등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게 해줘 더욱 유익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3
조르조 바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빠." 잔니나가 다시 물었다. "왜 오래된 무덤보다 새로 생긴 무덤을 보면 더 슬픈 거예요?"

... "그건 말이다." 그가 대답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우리와 훨씬 가까우니까,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그 사람들을 훨씬 더 좋아하니까. 봐라, 에트루리아인들은 아주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이야." 그러더니 다시 동화를 들려주듯 말했다. "그러니 마치 한 번도 이 세상에 산 적이 없는 사람들, 영영 죽은 사람들과 같단다."             p.11


핀치콘티니가는 거의 삼만 평 가까이 되는 정원을 소유한 부유한 가문이었다. 정원을 에워싼 끝도 없이 긴 담벼락, 짙은 색 떡갈나무로 만든 손잡이 하나 없는 육중한 대문, 저택 뒤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는 넓은 테니스장까지 가문 대대로 막대한 재산을 이어왔다. 핀치콘티니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교류 없이 성벽 안에서 그들만의 단절된 생활을 했다. 이유는 에르만노 교수와 올가 부인이 아직 젊은 부부일때 여섯 살밖에 안 된 큰아들을 소아마비로 떠나 보냈기 때문이다. 의사도 전혀 손을 쓸 수 없이 별안간 아들이 죽고 말자, 그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올가 부인은 그날 이후로 평생 상복을 입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후로 부부에게 아들 알베르토와 딸 미콜이 태어나지만, 두 아이는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개인교습을 시켰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싶어 했지만, 아들의 죽음 이후로 항상 병균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 학교란 게 끔찍한 병을 퍼뜨릴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가 부인은 첫째 아들 귀도가 죽고 나서 집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에르만노 교수도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니,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두 아이는 고립된 생활을 어떻게 버텼을까. 다행히 알베르토와 미콜은 격리되어 살아가긴 해도 외부 세계와, 평범하게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실낱같은 관계는 유지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통로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서술자인 주인공은 알베르토, 미콜과 또래로 그들과 친구로 시간을 보냈다. 테니스클럽에서 쫓겨났을 때 핀치콘티니가의 정원과 테니스장을 사용했고, 도서관에서 쫓겨났을 때는 에르만노 교수의 허락으로 그의 서재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시대적 배경을 걷어내고 읽는다면 평범한 젊은이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성장기처럼 보인다. 그만큼 조르조 바사니는 이 작품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아버지는 나의 문학적 미래를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뭔가로, 뒤바꿀 수 없는 꿈으로 이야기하시는구나, 나는 생각했다. 마치 당신과 내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되듯. 그리고 이제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 삶에 대해, 우리 각자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던 일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듯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합의에 이르게 될까? 나도 자문했다. 왜 아니겠는가. 히틀러와 스탈린이 손잡을 가능성이 아주 많았다.             p.335


이 작품의 배경은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이다. 특히 인종법이 선포된 해인 1938년부터 이차대전을 전후해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주요 서사이다. 부유한 유대인인 핀치콘티니가를 중심으로, 서술자인 주인공 역시 유대인이었기에 인종차별을 직접적으로 겪었다. 인종법에는 유대인의 시민권을 제한하고, 그들의 책을 금지했으며, 공직과 고등교육에서 제외시키고, 이동을 제한하거나 결혼을 금지시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중심 서사는 청춘의 사랑과 젊은이들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인물이 수용소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는 비극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술사자가 그렇게 사라져 버린 그들의 삶을 기억해 다시 되살려 놓는 것이다. 



이 작품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함께 대표적인 홀로코스트 문학으로 손꼽힌다.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을 소재와 주제로 삼는 문학이기에 나치의 만행을 증언하거나, 생존자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등 거대하고 불합리한 폭력 앞에선 인간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 홀로코스트 문학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요소를 이야기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그저 배경에 두고 서사를 진행하기에 같은 장르의 다른 작품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 작품은 발표하자마자 평단과 대중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고,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거장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의 영화로도 탄생했다. 영화도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과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삶이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이라면, 핀치콘티니가의 묘에서 시작되는 이 작품 역시 그러한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시종일관 이들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운명은 몇 년 후에 수용소에서 사라질 유령이었으니 말이다. 유대인 탄압이 거세지는 가운데,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에서의 일상은 고립마저 안전하게 느껴진다. 폭력적인 외부의 현실로부터 단절되어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유리돔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처럼 아름답지만, 언젠가는 깨어질 위험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삶처럼 말이다. 이렇게 비극적인 시대에도 아름다움이 있었고, 기쁨과 설렘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슬픔이 여운처럼 남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3
조르조 바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과거를 현재로 데려오는 아름다운 기억의 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