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치콘티니가의 정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3
조르조 바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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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빠." 잔니나가 다시 물었다. "왜 오래된 무덤보다 새로 생긴 무덤을 보면 더 슬픈 거예요?"

... "그건 말이다." 그가 대답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우리와 훨씬 가까우니까,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그 사람들을 훨씬 더 좋아하니까. 봐라, 에트루리아인들은 아주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이야." 그러더니 다시 동화를 들려주듯 말했다. "그러니 마치 한 번도 이 세상에 산 적이 없는 사람들, 영영 죽은 사람들과 같단다."             p.11


핀치콘티니가는 거의 삼만 평 가까이 되는 정원을 소유한 부유한 가문이었다. 정원을 에워싼 끝도 없이 긴 담벼락, 짙은 색 떡갈나무로 만든 손잡이 하나 없는 육중한 대문, 저택 뒤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는 넓은 테니스장까지 가문 대대로 막대한 재산을 이어왔다. 핀치콘티니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교류 없이 성벽 안에서 그들만의 단절된 생활을 했다. 이유는 에르만노 교수와 올가 부인이 아직 젊은 부부일때 여섯 살밖에 안 된 큰아들을 소아마비로 떠나 보냈기 때문이다. 의사도 전혀 손을 쓸 수 없이 별안간 아들이 죽고 말자, 그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올가 부인은 그날 이후로 평생 상복을 입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후로 부부에게 아들 알베르토와 딸 미콜이 태어나지만, 두 아이는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개인교습을 시켰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싶어 했지만, 아들의 죽음 이후로 항상 병균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 학교란 게 끔찍한 병을 퍼뜨릴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가 부인은 첫째 아들 귀도가 죽고 나서 집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에르만노 교수도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니,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두 아이는 고립된 생활을 어떻게 버텼을까. 다행히 알베르토와 미콜은 격리되어 살아가긴 해도 외부 세계와, 평범하게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실낱같은 관계는 유지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통로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서술자인 주인공은 알베르토, 미콜과 또래로 그들과 친구로 시간을 보냈다. 테니스클럽에서 쫓겨났을 때 핀치콘티니가의 정원과 테니스장을 사용했고, 도서관에서 쫓겨났을 때는 에르만노 교수의 허락으로 그의 서재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시대적 배경을 걷어내고 읽는다면 평범한 젊은이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성장기처럼 보인다. 그만큼 조르조 바사니는 이 작품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아버지는 나의 문학적 미래를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뭔가로, 뒤바꿀 수 없는 꿈으로 이야기하시는구나, 나는 생각했다. 마치 당신과 내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되듯. 그리고 이제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 삶에 대해, 우리 각자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던 일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듯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합의에 이르게 될까? 나도 자문했다. 왜 아니겠는가. 히틀러와 스탈린이 손잡을 가능성이 아주 많았다.             p.335


이 작품의 배경은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이다. 특히 인종법이 선포된 해인 1938년부터 이차대전을 전후해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주요 서사이다. 부유한 유대인인 핀치콘티니가를 중심으로, 서술자인 주인공 역시 유대인이었기에 인종차별을 직접적으로 겪었다. 인종법에는 유대인의 시민권을 제한하고, 그들의 책을 금지했으며, 공직과 고등교육에서 제외시키고, 이동을 제한하거나 결혼을 금지시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중심 서사는 청춘의 사랑과 젊은이들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인물이 수용소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는 비극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술사자가 그렇게 사라져 버린 그들의 삶을 기억해 다시 되살려 놓는 것이다. 



이 작품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함께 대표적인 홀로코스트 문학으로 손꼽힌다.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을 소재와 주제로 삼는 문학이기에 나치의 만행을 증언하거나, 생존자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등 거대하고 불합리한 폭력 앞에선 인간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 홀로코스트 문학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요소를 이야기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그저 배경에 두고 서사를 진행하기에 같은 장르의 다른 작품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 작품은 발표하자마자 평단과 대중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고,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거장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의 영화로도 탄생했다. 영화도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과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삶이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이라면, 핀치콘티니가의 묘에서 시작되는 이 작품 역시 그러한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시종일관 이들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운명은 몇 년 후에 수용소에서 사라질 유령이었으니 말이다. 유대인 탄압이 거세지는 가운데,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에서의 일상은 고립마저 안전하게 느껴진다. 폭력적인 외부의 현실로부터 단절되어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유리돔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처럼 아름답지만, 언젠가는 깨어질 위험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삶처럼 말이다. 이렇게 비극적인 시대에도 아름다움이 있었고, 기쁨과 설렘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슬픔이 여운처럼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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