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추억 - 한가람 대본집
한가람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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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 "그러지 말고 내가 먼저 죽으면 언니가 좀 불러줘. 내 구 남친들."

해원 : ". 불러서 뭐하게. 뺨이라도 한 대 치게?"

여름 : "고맙습니다."

해원 : ('' 쳐다보면)

여름 : "이렇게 별거 아닌 나를. 한때라도 빛나게 해준 당신. 감사합니다.

JTBC 드라마페스타 [한여름의 추억] 영상 대본집이 출간되었다. 원래 방송된 드라마는 4회 차의 원작을 2부작 방송용으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대본집이 더 특별한데, 이 책에는 전반부에 2부작 방송용 대본과 스틸 사진이 실려 있고, 후반부에 총 4회로 구성되었던 원작 대본을 함께 실어 놓았다. 무엇보다 4회 차의 대본에는 방송에는 없었던 '세진'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니 우리는 이 대본집을 통해서 원래 방송에서 맛본 그 여운과 함께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공 한여름, 12년차 라디오 작가로 서른일곱이다. 그녀도 서른 이전에는 예쁘고 매력 있었던 보통 여자였지만, 지금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녀와 한때 사랑을 했던 여름의 남자들 네 명. 한여름이 가장 사랑했던 남자 박해준, 팝 칼럼니스트로 이성적이고 칼 같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과거에 여름에게 프로포즈 했지만 능력과 배경이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후 사랑을 믿지 않는다. 라디오 PD인 오제훈은 돌싱으로 이 여자 저 여자와 동시다발 썸을 타는데, 작가들 사이에서도 바람둥이로 유명하다. 한여름과도 썸을 탔었는데, 애매모호한 걸 딱 질색하는 여름과는 지금도 데면데면하게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여름과 대학시절 C.C.였던 김지운, 대기업 연구팀 대리로 활발하고 낙천적인 성격이다. 여름과 연애 시절에 징글징글하게 싸운 기억들 뿐이라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 한다. 여름이 고3 때 만났던 최현진, 그녀의 첫사랑이다.내숭 떠는 여자들은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소개팅에 나오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런 여자들뿐이다.

 

여름과의 연 후 그들 남자들의 현재 각기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지만, 여름과 보낸 시간들은 여전히 그들의 현재 연애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솔직한 여자가 싫다. 불같은 여자가 싫다. 첫사랑을 믿지 않는다. 사랑을 모두 믿지 않는다.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구겨서 버린 편지 속에

두 갈래로 찢긴 사진 속에

평생 열지 않을 상자 속에

서랍의 끝머리와 삭제된 메일함 속에

고함 한 번 지르고 온 바다 속에

그리고 언젠가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

 

 

 

 

 

 

여름 또한 그들 네 명의 남자들을 만나 오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그들 각각이 여름을 완전히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여름은 그 연애들을 통해서 달라지고, 배우고, 성장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어릴 때 잠깐 만났던 선배를 통해선 마음을 감추고 내숭만 떨면 누구도 내 진심을 몰라준다는 걸 배웠고, 스무살 즈음 지겹게 싸워댔던 남자친구한테선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걸 배웠다. 가장 오래 만났던 남자한테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상대의 진심을 짓밟으면 벌을 받는 다는 사실도 깨달았고... 그 외에도 비 오는 날 어떤 음악을 들으면 좋은지, 와인은 어떤 게 좋은 건지, 맥주를 맛있게 마시는 방법은 뭔지 등등을 지난 연애에서 배웠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온 서른 일곱의 여름은 지금, 외롭다. 이제 반짝반짝하던 시절은 지나가 버렸고, 남자들은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다.

 

 

 

여름은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너무 거지 같아서,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던 그 언젠가의 일들이 전부... 꿈같다고. 분명 내 인생에 어떤 시기에는 내가 엄청 빛났었던 것 같은데 단숨에 초라해져버린 것 같다고. 꼭 누가 불을 끄고 가버린 것처럼. 분명 사방이 빛이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여름은 이런 생각도 한다. 내가 죽으면 내 구 남친들이 모두 장례식에 와 줬으면 좋겠다고. 여름과 친한 라디오 작가 선배인 해원은 묻는다. 지나간 남친들을 불러서 뭐하려고 그러냐고. 여름은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는 거다. 빛나고 아팠지만 모두 당신 덕분이라고. 이렇게 별거 아닌 나를, 한때라도 빛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말이다.

 

방송을 보면서 느꼈던 뭉클함과 안쓰러움과 싱그러움과 설레임이 대본을 읽는 내내 페이지 가득 묻어났다. 무엇보다 서른 일곱이라는 나이에 여름이 느끼는 주변의 시선들이 안타까웠는데, 이 책에만 실려 있는 4회로 구성된 대본에서 현재의 그녀에게 새롭게 나타난 존재가 있어 조금은 충족된 느낌도 들었다. 과거의 연인들과의 추억 만으로 여름의 생을 구성하기에는, 최강희라는 배우가 만들어낸 여름이라는 캐릭터가 아까웠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나이 먹고 초라해진 그녀에게 새롭게 찾아온 사랑이라는 존재가 신선했고, 설레였다. 마치 극중 여름처럼 내가 새로운 존재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한가람 작가는 "내가 죽으면 슬프다고 울어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는데 아무도 울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너무 잔인한 설정이 아닌가 싶겠지만, 어쩐지 그게 당연한 현실일 것만 같았다는 거다. 그래서 이 현실적인 연애 이야기는 조금 슬프고,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공감할 부분이 많고, 매 장면이 모두 다 내 얘기 같아서 이해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누구나 한번쯤 쳐다만 봐도 두근 거리고, 잠을 못 이룰 만큼 설레고,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 창피한, 그럼에도 다시 한번 할 수 있다면 내 남은 생에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겠다 싶은 그런 감정들을 겪게 된다. 누구나 연애를 하면서 예쁘고 아름다운 순간만 겪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욱하기도 하고, 비굴해지기도 하고, 못될 때도 있고, 지긋지긋할 때도 있다. 그러니 나도 한때 한여름이었고, 당신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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