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
J. 라이언 스트라돌 지음, 이경아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계산대의 직원은 설마하니 그녀가 화장실에서 이걸 먹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관없어, 괜찮아. 그녀는 손가락을 집어 넣어 따듯한 녹색 덩어리를 한 움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난생처음이었다. 아마 이 젤리를 먹은 일이 지금껏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 같았다. 그녀는 또 한 움큼 떠서 혀에 짓이기듯 집어넣었다. 믿을 수 없는 맛이었다. 지금껏 무엇을 기다렸단 말인가? 무엇을?

레스토랑 셰프인 라르스는 요리 재료에 관심이 많은 웨이트리스 신시아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들은 딸 에바를 가졌고, 라르스는 생후 몇 달밖에 안 된 딸의 이유식 식단을 짜며 몇 주를 보낸다. 생후 3개월된 아기에게 돼지 항정살로 만든 퓌레를 주고, 4개월된 아기에게 당근 케이크를 먹이겠다는 아빠라니.. 어쩌면 이 때부터 에바의 천부적인 재능이 싹 트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에바에게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던 라르스와 달리 겨우 스물다섯이던 신시아는 집에서 아기만 보는 생이 지겨워죽겠다며 육아 휴직기간도 채우지 않고 복직을 선언한다. 결국 소믈리에를 꿈꾸던 그녀는 자신이 엄마로서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며 자유로운 삶을 찾아 떠나 버린다. 홀로 남겨진 라르스는 지극정성으로 에바를 기르지만, 얼마 안 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숨을 거두고, 에바는 삼촌과 숙모가 부모인줄 알고 자라게 된다.

 

어느덧 10소녀가 된 에바는 남들보다 덩치가 크고 어린데 비해 똑똑하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하곤 했다. 삼촌 부부는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에바의 요리에 대한 재능 같은 부분들까지 헤아려주지는 못했다. 에바는 여덟 살 때 사촌오빠에게 선물 받은 재배 도구로 할라폐뇨를 키우기 시작해, 열한 살을 앞둔 지금은 멕시코 레스토랑의 대표 요리에 들어가는 이국적인 고추들을 공급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에바는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놀라운 미각을 지닌 소녀였다. 유명 레스토랑에 갔다가 음식을 먹어 보고 들어간 재료들을 알아맞히면서 그곳의 셰프가 제안해 주방 인턴으로 일을 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진짜 요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그녀가 셰프의 꿈을 키워나가는 과정이 시작된다. 대부분 요리나 음식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의 경우, 음식 자체에 집중하거나, 주방에서의 생활 등이 리얼하게 그려지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굉장히 독특한 방식과 구성을 취하고 있다. 단지 놀라운 미각을 가진 천재 셰프의 성공기였다면 어느 정도 식상한 부분도 있었을 텐데, 이 작품은 그녀의 고향인 미국 중서부 지역 사람들의 생활 속에 담겨 있는 음식들의 이야기가 메인이라 독특한 구성에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다.

 

에바 토르발은 그녀가 로브 크레이머의 주방에서 처음 보았던 괴상한 풋내기가 더 이상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그녀는 진화를 한 게 분명했다. 두 팔은 나뭇가지처럼 튼튼하고 입술은 안젤리나 졸리처럼 육감적이며 양손은 주방장답게 흉터로 뒤덮였고 두 발은 콘크리트 블록처럼 든든하고 가슴은 풍만하고 그녀의 엉덩이를 주제로 랩의 가사를 쓰면 좋을 것 같은 스물네 살의 에바는 눈이 부실 정도로 당당했다. 그녀는 그저 소녀에서 여자로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뒤에 커다란 느낌표가 달린 여자였다. 강인하든 허약하든 모든 여자의 원류인 까마득히 먼 과거의 원시인의 강인하고 야만적인 여성성이 고스란히 발현한 여자였다.

이 작품은 전체 여덟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에바의 부모 이야기, 두 번째는 에바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고, 나머지 챕터들은 모두 그녀의 주변 인물들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에바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겨우 한 챕터에 불과하다. 따라서 각 챕터마다 해당 챕터의 주요 인물들의 삶과 관련 음식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그 속에서 에바의 모습이 가볍게 스쳐 가기도 하고, 에바와 직접적인 에피소드로 연결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 듣게 되는 한 사람의 인생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특히 초반부 에피소드에서 에바가 살인적으로 매운 칠리 고추들을 재배하면서 매운 음식을 잘 먹게 되어, 어른들도 먹기 힘든 매운 음식 먹기 대회에서 승리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남자아이들을 그 매운 고추를 이용해 혼내주는 모습은 유쾌하기도 했고, 음식을 통해서만 빚어낼 수 있는 이야기라 흥미롭기도 했다. 특히나 말린 대구를 삭혀 만든, 톡 쏘는 냄새의 노르웨이 전통 요리인 루테피스크나, 세상에서 제일 매운 고추로 알려진 칠리 고추인 초콜릿 아바네로, 피망에 식초, 설탕, 과일 펙틴 등을 넣어 만드는 음식인 스위트 페퍼 젤리 등 한국에선 쉽게 접하기 힘든 독특한 요리나 식재료들이 등장해서 미식 여행을 즐기게 해주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요리와 일상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다, 한참 먹방이니 쿡방이니 방송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면서, 바야흐로 대세는 요리하는 남자인 시대이다. 그래서 유명 셰프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까칠하지만 매력적인 남자 셰프들이었는데, 이 작품 속 에바는 천재 여성 셰프로서 그들만큼이나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인물 군상들의 삶 속에서 보이는 과정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라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작품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은 읽는 동안 눈을 즐겁게 하는 요리의 향연이 아니었나 싶다. 낯선 식재료와 이해하기 힘든 레시피도 있었지만, 새로운 음식 문화와 그것을 즐기는 풍경 만으로도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뭐 먹으러 갈까였으니, 정말 음식을 '보는 즐거움'이 최고였던 작품이기도 했다. 요리가 멋진 일이라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여러 가지 감각을 활용하는 거라는데 있는데, 예를 들면 소스가 타면 냄새로 알 수 있고, 생선이 다 구워지면 소리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글로 표현되는 감각적인 부분이 실제로 먹고 보는 것만큼이나 멋진 경험을 하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은 따뜻하고, 위로되고, 유쾌하고, 맛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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