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인생
데이나 스피오타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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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나를 믿는다. 그럼으로써 거래 관계에서 신뢰 관계로 옮아간다. 이 부분이 그녀는 좋았고, 전화상에서는 자신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임을 알았다. 그녀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지어내는 것은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감정, 진짜 감정과 진짜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환상인가 아닌가는 그녀에게 중요치 않았다.

영화란 착각 위에 세워진 예술형식이다. 정적인 영상을 빠르게 보여줌으로써 움직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 영화는 실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눈에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도 실제가 아닌 장치를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 영화는 마술과도 같고, 영화 감독이란 위대한 사기꾼, 굉장한 거짓말쟁이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그토록 놀랍고도 아름다운 영화라는 장치의 맨 얼굴을 세 여성의 삶을 통해서 고스란히 보여준다.

1부의 이야기는 인터넷 사이트여성과 영화에 실린, 유명 여성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메도 모리의 에세이로 시작한다.  10대 시절 부모에겐 거짓말을 하고 유명 영화 감독 집에 머물면서 그와 비밀스러운 사랑을 나누었다는 글이다. 이는 그녀가 영화감독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글에 대한 댓글 반응들은 상당히 좋지 않다. 유명인이랑 붙어먹기로 출세한 거 아니냐, 미성년자가 뚱뚱한 노인과의 사랑이라니 역겹다, 등등. 흥미로운 것은 단짝인 캐리에 대해서는 왜 언급이 없냐, 절친이었던 그들이 절교해서 서로 말도 안 한다는 등의 언급이다. 메도는 다큐멘터리 감독, 그녀와 단짝이었던 캐리는 코미디 영화 감독이다. 역시나 '여성과 영화'에 실린 캐리의 에세이는 3부에 등장한다. 2부에서는 메도와 캐리 외에, 목소리 하나로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의 연인이 된 수수께끼의 여인 니콜의 이야기가 더해진다.

 

니콜은 시각 장애인이었다. 선천적인 맹인은 아니었고, 뇌막염으로 죽다 살아나면서 하룻밤 새에 시력을 잃었다. 하지만 서서히 어느 정도는 시력을 회복해 형체와 빛과 색깔은 어느 정도 볼 수 있었지만, 흐릿한 시야 덕분에 지팡이 없이 돌아다니기는 어려웠다. 그녀의 본명은 에이미, 별명은 젤리이지만, 할리우드의 유명 인사들에게는 니콜이다. 그녀는 콜 센터에서 일하다 어느 날 재미로 낯선 이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녀의 첫 번째 '순수한' 통화 경험이었다. 통화 자체가 목적이었고, '이유'는 없었던 통화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배우 지망생인 친구를 통해 유명인 들의 연락처를 몇 개 받아 조사를 하고 배경 지식을 쌓은 뒤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가끔씩만 걸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하고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점차 자신도 이 환상적인 세계의 일부라고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의 삶과 그들의 삶 사이의 거리가 따지고 보면 그렇게 멀지 않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어떻게 생겼냐고? 나는 젤리 도넛처럼 생겼어.

젤리는 일어나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외모와 성격이 다를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면?

나는 이 사람, 이 여자가 아니야. 그리고 사진 속 린도 아니야. 잭은 알 거야, 잭은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창문이야. 나는 소원이야. 나는 속삭임이야. 나는 젤리 도넛이야.

메도는 우연히 할리우드 인사들에게 전화하던 수수께끼의 여자 '니콜'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녀와의 통화는 사적이고 에로틱하기까지 했지만 노골적이진 않았고, 전화로 남자들을 유혹한 게 아니라는 점과 오랜 시간 친분을 쌓고 만나려고 하면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고 사라져버린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니콜을 만나 설득해 그녀의 삶을 영화로 제작하고, 그 영화는 <내부의 교환원>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게 된다. 니콜은 전화를 통해서 자신의 진짜 모습, 됐어야 했지만 되지 못한 모습이 될 수 있어서 좋아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걸 한 번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그녀의 삶을 담은 영화는 수작으로 호평을 받지만, 니콜은 메도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비난한다. 3부에서 캐리는 메도의 삶과 예술에 대해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메도를 동경하면서도 그녀와 전혀 다른 방식의 영화를 연출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 그녀의 삶과, 메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친구로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메도라는 난해한 인물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다.

그리고 시간의 길이- 영화가 지속된 시간, 관객이 견딘 시간-가 기다리고 있는 관객을 설득하여 마음을 돌려놓는다. 그 순간은 한 시간 만에 올 수도 있지만 어쨌든 관객은 계속 본다. 그리고 영화에 마음을 빼앗긴다.

 

이 작품에서 메도와 캐리의 인생은 순차적인 서사로 보여지고 있지 않고, 띄엄띄엄 진행된다. 줄거리 자체가 선형적 구조를 취하고 있지도 않고, 기승전결 식의 클라이막스나 주요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 3친칭 시점과 1인칭 시점을 오가는 형식이다. 거기에 더해 전기적 에세이, 비디오 녹취록, 일기, 인터넷 댓글 등을 활용한 방식은 이야기를 더욱 낯설게 보이게 만든다. 한 마디로 독자 입장에서 읽기에 쉬운 소설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낯선 형식의 소설은 굉장히 매혹적이다. 영화라는 장르 자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아마 더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영화라는 예술에 지대한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메도가 만든 이상한 기록물같은 영화들을 보면서 캐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수정하는 이 모든 행위는 흥미로웠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서란 말인가? 이 영화들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라고 메도의 극단적 방식에 종종 당황스러움을 느끼는 캐리의 시선이야말로 평범한 이들의 그것일 것이다. 메도는 영화를 만들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어디에 다다랐는가는 어떻게 그곳에 다다랐는가 만큼 중요하지 않음을. 힘들게 얻었다면, 힘들게 얻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정리만 하면 됐다. 그 후에는 그냥 내버려둬라'는 식의 사고 방식은 메도의 영화와 삶의 태도에 고스란히 보여진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여성 예술가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자신이 바라보는 나와 남이 바라보는 나 사이에는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 작품의 매력을 느껴보고 싶다면, 조금 여유 있게 천천히 읽어 보기를 권한다. 계속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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