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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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허구의 세계가, 비록 실제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걸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현실과 그것은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삶에의 비유가 삶이 남긴 혼란보다 더 근사하게 되는 그것. 나는 제시 버튼의 전작을 읽고 그런 경험을 했었다. <미니어처리스트>는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과 행간 사이에 숨겨진 비밀들이 페이지마다 넘쳐 흐르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우아한 기품과 매혹적인 미스터리들과 함께 어우러져 한 여성의 삶을 단단하게 구축해나가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이번에 만난 두 번째 작품 <뮤즈>에서는 1960년대 영국과 1930년대 에스파냐를 오가며 여성 예술가가 '뮤즈'라는 허울 아래 연인, 모델, 영감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어두운 시대를 그려내고 있다. 차별과 억압 이전, '예술가'로서 여성들이 지녔던 진짜 욕망은 제시 버튼의 글을 통해서 눈부시게 그려진다.

 

 

누구나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배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인생의 여정을 바꾸어놓는 여러 순간을 마주하는 것은 순전히 행운에 좌우된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 누구도 추천서를 써주거나 비밀을 털어놓는 상대로 골라주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가 내게 준 가르침이다. 운이 좋으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패를 제대로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행운이 찾아왔던 날은 무척이나 더웠다. 나는 구두 매장에서 유니폼 블라우스 겨드랑이가 젖은 채로 일하고 있었다.

1967, 영국 런던. 영국의 식민지였던 트리니나드 토바고 출신 흑인 여성 오델은 절친한 친구 신스와 함께 구두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영국으로 건너온 이후 5년 동안 온갖 회사에 지원했고 아무데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오게 되고, 오델은 스켈턴 미술관의 타이피스트로 일하게 된다. 작가 지망생인 오델은 그곳에서 일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상관인 마저리 퀵의 도움으로 소설을 발표하게 되기도 한다. 신스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로리와 가까워져 데이트를 하게 되고, 그는 어머니 유품인 그림을 미술관에 가져와 보여준다. 그 그림은 요절한 천재작가 이상 로블레스의 미발표 유작인 걸로 확인되고, 화단은 떠들썩해지지만 오델은 마저리 퀵의 태도에서 어딘지 그 그림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1936,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열여덞 소녀 올리브는 화가를 꿈꾸며 미술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지만, 차마 부모님에게 보여주진 못한다. 당시만 해도 화가는 당연히 남자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시대였기에, 올리브 자신조차 그렇게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림을 거래하는 갤러리를 운영했고, 아름다운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다. 그들은 런던을 떠나 에스파냐 남부 시골로 막 이사를 온 참이었고, 그곳에서 집안 일을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테레사와 이삭 남매를 만나게 된다. 가정부로 일하게 된 테레사와 친구처럼 가까워진 올리브는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고, 테레사는 그녀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본다. 올리브는 이삭과 사랑에 빠지면서 점점 더 그림에 몰입하게 되고, 그녀의 재능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테레사가 그림을 바꿔치기한 덕분에 올리브의 그림은 이삭이 그린 것처럼 되어 버린다. 하지만 올리브는 어차피 여자인 자신의 이름으로 그림을 발표할 수 없을 거라고, 이삭의 이름으로 그림을 팔게 되는 상황을 스스로 허용한다.

 

"모든 건 무너져요. 조금씩 변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죠. 그러다 알게 돼요. 발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다리가 부러졌다는 걸. 그런데 그건 내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던 일이에요, 오델. 타인의 마음속에서, 혹은 당신이 만나지 못할 신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거죠. 그러다 어느 날, 돌 하나를 던지면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 돌이 힘 있는 얼간이의 차 창문에 맞아요. 그러면 그가 복수를 하려고 나서거나 자기 여자한테 멋지게 보이려고 들죠.  아니면 보병들이 움직이고, 다음 날 당신의 마을은 불에 타버릴 수도 있어요. 어리석음 때문에, 섹스 때문에, 당신 침대에는 관이 놓여 있어요."

현재와 과거가 하나의 그림으로 연결되어 미스터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각 시간대 속의 여성 캐릭터들 자체가 너무도 매혹적인 작품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오델, 그녀는 로리의 사랑 고백이 어색했고, 불편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반면 사랑이라는 감정에 거침이 없는 올리브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삭에게 드러내어 표현하고, 그를 향한 욕망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듯한 기분마저 느낀다. 테레사와 올리브의 관계는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의 아가씨와 하녀의 그것처럼 비밀스럽고, 친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전혀 다른 색깔과 분위기로 이야기는 진행되지만 말이다. 화려한 외모로 어디서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지만 그럼에도 불행하고, 공허한 올리브의 엄마 세라는 사랑의 외로움을 알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제시 버튼은 전작인 <미니어처리스트>에서도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를 구축해 섬세하고, 미묘한 여성 심리를 그려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훨씬 더 다양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그들만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아티스트와 뮤즈가 등장하면, 우리는 당연하게 아티스트는 남자, 뮤즈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제시 버튼은 바로 그 편견을 뒤집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작품에는 남성의 도움 없이 여성이 다른 여성의 뮤즈가 되어주고,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예술 작품의 영감이 되어 그림이 탄생하는 모습도 등장한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작품을 통해 대상화하고 소비하며, 여성 예술가를 주변화 해온 미술의 역사에 대한 반격'이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미술사를 배경으로 우리가 그 동안 숱하게 보아온 여타의 다른 작품과는 뚜렷하게 다른 점을 보여주어 특별한 이야기가 탄생했다. 여성 화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시대를 대변하고 있는 미술상 아버지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올리브의 모습은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통쾌하게 멋지다. '여자들은 할 수가 없어요. 여자들에겐 비전이 없어요. 내가 알기론 눈도 있고, 손도 있고, 심장도 있고, 영혼도 있지만. 나는 기회도 얻기 전에 실패했어요.'라는 극중 올리브의 외침이 오래도록 가슴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이야말로 단연 가장 페미니즘적인 소설이 아닐까라는 리뷰가 굉장히 와 닿았으니 말이다. 모든 여자들에게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제시 버튼은 여성의 삶을 그리고, 내면을 그려내는 데 정말 탁월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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