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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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라 페인이 우리에게 평가 없이 빈 종이와 마주하라고 말했던 그날, 그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임을. 단순한 생각 같지만,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녀가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생각한다. 늘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얕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 자신을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를.

 

오래 전에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소설을 읽으며 퉁명스럽고 무뚝뚝하지만,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여인 올리브에게 한 눈에 반했던 기억이 난다. 삶이란 수많은 순간들과 더 많은 관계들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삶은 선물이라는 걸, 그리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을 아는 거라고 말해주는 뭉클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첫번째 장편이었던 <에이미와 이저벨>을 거쳐, 이번에 만나게 되는 작품 <내이름은 루시 바턴>은 그 동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우선 전작들에 비해 분량이 굉장히 얇은 편이고, 삼인칭이 아니라 일인칭 시점의 글이다. 게다가 마치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작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극중 화자는 오래 전에 자신이 구 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어지는 며칠 동안 어머니의 딸의 대화들은, 현재의 생각들과 과거의 기억들을 오가며 이어지는데,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기억의 조각들이 툭툭 던져 있는 듯한 구성이라 일반적인 소설의 서사를 기대했다면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의 구성 방식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글을 쓰는 방식과 같다는 점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형적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떠오른 장면들을수집해짤막하게 글로 옮긴 뒤 커다란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각 장면들의 연결성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그러니 사실은 조금 낯선 그녀의 이 작품이야말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라는 작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셈이다. 루시 바턴이라는 허구의 인물이 내는 목소리를 통해서 실제 작가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굉장히 매혹적이다.

 

시간은 늘 충분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내가 결혼생활에 안주하면 또다른 책,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책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일리노이 주 앰개시-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 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루시 바턴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건 맹장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는데, 갑작스럽게 열이 나기 시작했고, 음식을 넘길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난다. 병원의 어느 누구도 원인을 알 수 없었고, 그렇게 그녀는 오랜 시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남편은 집안일로, 직장일로 바빠서 병원에 올 시간을 잘 내지 못했지만, 사실 병실의 풍경들을 견딜 수 없어 하기도 했다. 어린 아이들과 남편을 그리워하며 외롭게 지내던 어느 날, 그녀가 입원한 지 삼 주쯤 지났을 무렵 오래 연락을 끊고 지냈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오랜 만에 듣는 애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그녀는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그렇게 엄마가 자신을 간병해줬던 닷새를 회상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엄마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고향 사람들의 사연 속에 루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그 시절의 추위와 배고픔과 외로움, 고향을 떠나고 싶어했던 마음과 동경했던 뉴욕에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자신의 인생들에 대해 돌아본다. 극중 화자인 ''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돌아보면서 자신이 소설을 쓰게 된 이유와 경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루시 바턴의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는 자신의 것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한 고찰과 소설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그리고 소설을 쓰는 일 자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러니 이 작품은 허구의 인물인 루시 바턴의 이야기인 동시에 작가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야기인 셈이다. 책이 그녀의 외로움을 덜어 주었고,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자신도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부터, 그녀가 글을 써나가고 작가가 되어 가는 과정의 편린들이 담백하게 그려진다.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만들어지는 이 작품은 전작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모든 생은 선물과도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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