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방울. 어떤 감정이 코라를 덮쳤다. 코라는 나뭇조각을 사방으로 튀기며 블레이크의 개집에 도끼날을 내리꽂았던 그때 이후로 요 몇 년은 그 마법에 걸리지 않았다. 코라는 남자들이 나무에 매달려 독수리와 까마귀 밥이 되는 것을 보았다. 여자들은 아홉 가닥 채찍에 살이 벌어져 뼈가 드러나도록 맞았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몸이 장작더미 위에서 타들어갔다. 도망가지 못하게 발이 잘렸고, 도둑질을 하지 못하게 손이 잘렸다. 코라는 그 동안 체스터보다 어린 소녀와 소년이 얻어맞는 것을 보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어떤 감정이 코라의 가슴을 다시 꽉 채웠다. 그 느낌이 코라를 휘어잡았고, 제 안의 노예가 인간의 발목을 붙잡기 전에 그녀는 방패처럼 소년의 몸 위로 엎드렸다.

이 책이 읽기도 전부터 두툼한 띠지 속의 놀라운 문구들이 시선을 사로 잡는다. '단 한 권의 책이 이뤄낸 놀라운 기록'이라는 문구가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듯이 23년 만에 전미도서상과 퓰리처상을 동시에 받았으며, SF 작품들에게만 주어지는 아서 클라크 상에다 오바마가 휴가철 읽은 도서, 올해의 책 선정 등등... 전부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평을 받는 이 작품은 그래서 시작부터 기대감을 한껏 키워주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는 미국의 역사적인 흑인 노예 해방 조직인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 대해 그것이 실제 땅속에 있는 지하철도일 거라고 상상해 왔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자신이 믿고 있었던 그것이 나중에 비유였음을 알고는 약간 화까지 났다고. 그래서 그는 '지하철도가 실제 기차였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으로 이 작품을 구상했고, 그것이 세상에 빛을 보기까지 1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여타의 문학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미국의 1800년대는 노예제에 찬성하는 남부와 노예제에 반대하는 북부로 나뉘어져 대립하던 시기이다. 당시에 남부의 노예들이 북부의 자유 주나 캐나다로 탈출할 수 잇도록 도왔던 비밀조직의 이름이 바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였다.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뉴스였던 미국의 20달러 지폐 인물로 거론되고 있는 흑인 여성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 역시 바로 이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조직원으로 당시 수많은 노예들을 탈출시켰던 장본인이다. 작가는 바로 그 비밀 지하조직을 비유가 아닌 실제로 만들어, 노예 소년 코라가 자유를 찾아 지하철도에 오르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노예제도가 공식 폐지된 이후로 150년이 더 지난 지금, 지나간 과거의 그것이 시대를 역행하며 현재에 이토록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진실은 당신이 보지 않을 때 누군가에 의해 뒤바뀌는 상점 쇼윈도의 진열과 같았다. 그럴싸하고 결코 손에 닿지 않는.

.........훔친 땅에서 일하는 훔친 몸들. 그것은 피로 가는 보일러, 멈추지 않는 엔진이었다. 스티븐스가 설명한 수술로 백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를 훔치기 시작했다고 코라는 생각했다. 당신의 배를 갈라서 피를 뚝뚝 흘리는 미래를 들어내는 것. 누군가의 아기를 뺏어 간다는 건 바로 그런 것-미래를 훔쳐 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 땅에 있는 동안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괴롭히고, 훗날 그들의 후손이 더 나은 삶을 살리라는 희망마저 앗아 가버리는 것이었다.

주인공 코라는 할머니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혀 온 이래로, 농장에서 태어나고 농장을 둘러싼 늪 밖으로는 나가본 적 없는 소녀다. 당연히 그녀에게 농장을 탈출하는 것은 곧 존재의 근본 원칙을 이탈하는 것이었으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열 살이던 해, 엄마 메이블은 그녀를 버리고농장에서 유일하게 탈출한 노예가 된다. 메이블이 사라지자 코라는 버려진 아이가 되었고 비록 어리고 작고 이제는 그녀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할머니 때부터 남겨진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며 살아온다. 그런 그녀에게 북부에서 팔려온 시저라는 청년이 지하철도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탈출하자고 제안을 한다. 당연히 코라는 싫다고 말하지만, 3주 뒤 그녀는 생각을 바꾼다. 자유의 땅 북부로 간다는 것은 제정신은 놓아버려야만 하는 일이었지만, 더 이상 백인 주인이 도망갔다 잡혀 온 흑인들에게 자행하는 일들을 묵인하고 견디지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라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며 새로운 역에 도착할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참상이란, 19세기 미국 남부 노예들의 삶과 인종 우월주의를 보여주는 백인들의 광기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그러나 당시 백인들은 흑인 노예들을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대하고 있었다. 코라가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여정에 더해 도망친 노예들을 쫓는 노예 사냥꾼들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이야기는 더욱 긴박감 넘치게 진행된다. 그렇게 무려 15개월 동안 이어진 코라의 탈출 여정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노예 제도는 피해자인 흑인들 뿐만 아니라 가해자였던 백인들 역시 피폐하게 망가트리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가져야 할 자유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자유라는 것의 가치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마치 현대판 고전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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