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프라우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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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보고 사랑에 빠진다는 게 가능할까? 안나는 단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심히 떨어진 눈길의 명령에 따라, 안나는 모든 신화가 정점에 이른 이 사건의 증인이자, 피해자, 노예가 되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그전까지의 모든 순간이, 중요했던 때와 중요하게 보이기만 했던 모든 때가 합쳐져 이 강렬한 순간의 총합, 단 한 순간이 되었다. 심장 한 번이 뛰는 짧고 날카로운 찰나에, 그녀는 이제까지 했던 말, 했던 일 중 그 무엇도, 앞으로 하게 될 말, 하게 될 일 중 그 무엇도 이 비극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안나는 프리크에서 뭄프로 가는 기차 창문을 내다보았다.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스위스인 남자와 결혼한 미국인 아내는 삶이 지루하고, 9년을 살았지만 스위스라는 나라가 불만스럽고, 외국어의 벽은 여전히 높게만 느껴지고, 무뚝뚝한 남편의 애정은 외롭기만 하다. 그러다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간 어학원에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스스로의 욕망에 고스란히 몸을 맡기면서 점점 파국으로 치달아가게 된다. 하지만 사실,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은 부질없다. 줄거리가 함축할 수 있는 건은 단지 줄거리일 뿐이니까. 사실 결혼한 여자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어디서 한번쯤 들어봤음 직한 스토리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한번쯤 들어봤음 직한 이야기'를 벗어날 수 있는 까닭은 그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불륜 외에도,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끊임없이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은 영어와 독일어 단어를 이용한 세련된 언어유희로 그려지고, 날카롭고 예리한 문장으로 진행되는 정신분석 상담 내용들은 놀라운 심리학적 통찰을 보여준다.

은행에서 일하는 남편 브루노를 따라 미국에서 스위스로 온 지 9년이 된 안나는 매우 수동적이고 비사교적인 인물이다. 그녀에게는 여덟 살 빅터, 여섯 살 찰스와 아기인 막내딸 폴리 진이 있다. 낯선 타국에서 자신의 운명에 좌절하고 비참해하는 그녀에게 브루노는 정신과 의사를 만나도록 권유했고, 그녀는 현재 메설리 박사에게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고 있다. 메설리 박사는 그녀에게 독일어 수업을 들어보라고 했고, 어학원에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스코틀랜드인으로 그녀처럼 외국인 체류자였고, 어학생이었다. 안나에게는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없었지만, 그나마 자신처럼 각자의 남편을 따라 스위스로 이사를 온 이디스와 메리와 가깝게 지내는 편이었다. 그녀는 운전을 하지 못해 스위스의 정확한 열차 시간표에 일상을 맞추고, 아이는 자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을 두고 끊임없이 낯선 남자들을 만나 바람을 피운다. 스토리만 보자면 티비만 틀면 만날 수 있는 막장 드라마의 소재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스위스 버전 사랑과 전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교차 진행되는 현재와 과거, 외국어를 통한 언어적인 분석을 부서질 것 같은 내면 묘사로 그려내는 솜씨는 굉장히 신선했고,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박사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주장을 밀고 나갔다. "안나는 불행한가요? 좋아요. 이따금 슬퍼할 이유가 있겠죠. 스위스 관습은 아직도 익히지 못했죠. 안나의 결혼 생활은 힘들고 -모든 결혼 생활은 힘들어요, 안나, 아무리 좋은 결혼이라도 - 그리고 안나는 친구도 거의 없고 여가도 없어요. 아이들은 아직 어리죠. 손이 많이 가죠. 이 모든 게 힘들겠죠. 하지만," 메설리 박사는 말을 이었다. "안나가 자신의 슬픔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놓은 모든 이유만큼, 안나는 단순히 비참한 상태를 연상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런 목적도 수행하지 않는 핑계를 대고 있는 거예요. <난 까다로운 스위스인들을 바꿀 수 없어.> 안나는 징징대죠. <브루노가 좀 더 관심을 갖게 할 도리가 없어.> 안나, 단순히 남편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탁해 봤나요? <난 너무 내성적이라 친구가 없어.> <애들 돌보는 데만도 기력이 전부 소모돼.> 인생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죠? 그게 바로 가장 큰 핑계예요.? 안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현대판 안나 카레니나'로 독자와 평론가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니 여기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볼 수밖에 없겠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하우스프라우'의 첫 문장은 이렇다. "안나는 좋은 아내였다, 대체로." 섹스 냄새를 풍기며 집에 돌아와 손자를 돌봐준 시어머니에게 저는 샤워부터 할게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에게, 좋은 아내라니. 이야기는 시작부터 바람난 아내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지만, 작가는 첫 문장을 '대체로' 좋은 아내인 여자를 소개한 것이다. 대체로, 요점만 말해서, 일반적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자면, 일상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말과도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만고만하게 행복하게 보이더라도, 사실 각자의 방식으로 어려운 점도, 불행한 부분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는 거다. 톨스토이가 바라보는 가정의 행복이라는 것도, 우리의 매일같이 겪어야 하는 일상 속의 삶이라는 것도 말이다.

이 작품의 제목인 [하우스프라우Hausfrau]는 독일어로 가정주부, 기혼 여성을 뜻한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하는 한 여성의 내면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불륜이라는 기본 서사 구조만 보자면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의 거리가 몇 뼘 되지 않을 정도이고, 안나의 육체적 욕망에 대한 파격적인 묘사로 보자면  E. 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못지 않게 선정적이고 노골적이다. 이 작품이 독보적인 부분은 바로 섬세한 내면을 그리고 있는 매우 놀라운 방법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정신분석 전문가가 아니므로, 극중 메설리 박사가 한 말을 소설 이상으로 받아들이지는 말라고 당부하고 있지만, 사실 저자의 남편이 정신분석학을 연구하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매우 전문적이고, 예리하고, 공감적이었다. 결론은 뭐 어떻게 읽더라도 이 작품은 굉장히 야하고, 선정적이고, 수치스럽고, 도발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질 알랙산더 에스바움은 그 모든 것들을 매우 세련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통찰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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