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바람 진구 시리즈 4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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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뭐 잘못한 거야?"

"아니." 김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진구야...." 김민준은 입을 열어 조용히 말했다.

그건 진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마치 자기한탄처럼 들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남과 다르다는 것'이란다."

진구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아빠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구는 대형 벤처투자회사의 회장에게 아들의 애인에 대한 뒷조사를 의뢰 받는다. 회사에서는 자신의 유능한 비서이지만, 아들의 대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녀에게 흠이 있는지 찾아봐달라는 거다.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될 만한 그녀의 약점을 찾아달라는 그 제안을, 진구는 거절한다. 그저 일 내용이 썩 내키지 않는다며. 이유는 그 대상이 바로 어린 시절 둘도 없는 단짝이자 라이벌이었던 유연부였기 때문이다. 당시 진구와 연부는 학교에서 공인된 라이벌이었다. 성적도 그랬지만, 두 사람의 아버지가 같이 역사학을 전공하는 교수였고, 그들부터가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구와 연부 두 사람은 딱히 서로 라이벌이라는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에서 그렇게 만들어 불렀다. 그들은 아버지들이 참여했던 실크로드 탐사를 위해 함께 사막에 갔었고, 거기서 진구의 아버지는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연부의 아버지는 행방불명으로 역시 사망했다. 그 사건 이후로 둘 사이는 서먹해졌고, 서서히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하지만 진구의 여자친구이자 동료인 해미는 두 사람 사이를 궁금해했고, 당시 사건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을 주문해 읽어보기로 한다. 진구가 그 동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유독 예민해했었고, 과거에 대한 것도 역시 그랬었기 때문이다.

해미가 구한 책은 당시 조사단이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는 경로대로 써나간 탐사 일지 형식의 글이었다. 두 명의 교수와 자녀들인 진구, 연부, 그리고 젊은 역사학자들 대원과 현지 통역인까지 9인의 부대가 북경에 도착해 탐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당시의 에피소드들과 현재의 이야기가 교차 진행되며, 그 동안 숨겨져 있던 진구의 과거가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수학 천재 소리를 듣던 수재가 애정을 쏟아 부었던 수학을 버리고, 대학마저 중퇴 한 뒤 백수처럼 빈둥거리며 탐정 일을 하게 되었는지, 뚜렷한 목적 없이 살아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적 유희에만 반응하는 천재성, 선악에 대한 모호한 구분으로 상식에 벗어난 판단을 하는 진구가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미스터리도 어느 정도 해소된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른 사고를 했던 그와 그런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세상과 섞일 수 있도록 해줬던 아버지와 미모와 성적 모두 뛰어났지만 역시나 평범하지 않았던 친구 연부 모두 현재의 진구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었다. 

"사람들이 왜 살인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살다 보면 정말 저 인간만은 죽여버리고 싶다, 그런 마음을 먹는 대상이 한두 명쯤 있게 마련인데. , 양심 때문에? 아니, 모순이지. 죽이고 싶은 마음이 벌써 들었는데 다시 또 무슨 양심 때문에 그걸 안 한다는 거야. 이유는 간단하고 유일해. 잡힐까봐서야. 범행억지에는 강한 처벌보다 높은 검거율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어. 들키면 패가망신하는 불륜, 뇌물, 그런 것들이 왜 일어나겠어? 들키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하는 거거든.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만 없애주면 어떤 범죄든 일어날 수 있어."

그 동안 도진기 작가의 작품들을 꽤 읽어 왔는데, 거의 '막장드라마'스러운 이들의 비밀, 폭로, 속마음들은 너무도 리얼해서 가끔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당황스럽기 그지 없는 내용들이 많았다. 그런데 남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마치 일일연속극과도 같은 이들의 스토리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어처구니없게 현실적이었다. 온갖 작위적인 상황 설정들과 비도덕적인 인물들의 행동은 뭐 저렇게 까지 하나 싶어 혀를 차다가도, 실제 저만한 돈이 눈앞에 있다면 나라도 저럴까 싶을 만큼 섬뜩하기도 하고 말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실제 현실에서는 티비 속 막장드라마보다 더한 일들이 숱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재벌 회장과 비서, 그리고 그녀를 좋아하는 회장의 아들간의 관계, 재산싸움 등 역시 마찬가지로 티비만 틀면 연속극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설정이었지만, 진구와 연부라는 독특한 캐릭터들 덕분에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도진기 작가의 네 번째진구 시리즈는 그간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던 진구라는 캐릭터에 대한 비밀을 어느 정도 해소한다는 점에 있어서, 앞으로 진행될 시리즈의 반환점 같은 느낌도 든다. 진구 시리즈들은 읽는 내내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도 좋았지만, 특히 막판에 가서 그 동안의 모든 사실들을 뒤엎어버릴 만한 진구의 엄청난 추리가 매번 인상적인 반전으로 이어지며 '도진기 월드'를 구축시켜 왔다. 이번 작품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전개와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데뷔 7년 차를 맞은 도진기 작가는 법조계에 몸을 담고 있지만 결코 직접 처리한 사건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리얼한 범죄 기법과 치밀한 추리 과정은 매번 감탄스러울만큼 탄탄하다. 최근 20여 년간의 판사 생활을 정리한 후 변호사로 돌아온 작가의 행보가 그의 작품 활동에 더 새로운 전개를 가져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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