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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알았어야 할 일
진 한프 코렐리츠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평점 :
당신은 자신의 부모, 혹은 형제 혹은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누구나 가끔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진짜 모습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양면과도 같다. 사소한 행동, 말투들이 쌓여 오해를 만들고, 견고하게 쌓인 세월을 넘어 믿음을 깨트린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예정된 거였다면? 애초에 내가 그 혹은 그녀를 잘못 선택한 거였다면 어떨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법에 관한 이런 책들을 읽는 독자들이 그녀의 상담소를 찾아와, 만신창이가 된 자기 인생과 자기 자신의 결함을 고백했다. 제대로 결혼을 하지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도 못한 게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다른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진 것도 자기 체중이 늘어서라고 생각했다. 아기한테(그리고 친정 식구들과 아내의 친구들과, 우연찮게도 아내 본인에게도) 남자가 차갑게 대하면, 그게 다 자기가 직장에서의 출세 길을 포기했기 때문이며, 둘째 아이가 생길 경우 회사의 중역으로 승진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일이 다 여자 탓이었다. 사실이든 착각이든, 범죄도 다 여자 책임이었다. 더 치열하게 생각지 못해서,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가 낮아서. 여자들이 팔을 더 열심히 퍼덕거리지 않아서 비행기가 떨어졌다는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부부 생활 상담 전문 심리 치료사로 활동하는 그레이스는 이번에 책을 출간하게 되어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중이다. 그녀의 책 <진작 알았어야 할 일>은 절대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을 남자들과 결혼할 뻔한 수많은 여자들을 위한 내용을 그리고 있다. '애초에 일을 망치지 마라, 그러면 나중에 이런 수많은 문제들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이 이 책만의 장점이라고 기자는 말한다. 그레이스는 자신 만만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누군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면 늘 무슨 수로 알았겠냐고 기겁을 하지만, 사실 우리는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불행한 결혼 생활의 근본적인 원인은 '애초에 잘못된 남자를 선택한 여자'에게도 있다고 말이다. 많은 여성들이 남자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알고 있던 문제들을 외면했기 때문에 지금의 불행한 삶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잘못된 사람을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냉철하게 그녀는 조언한다.
대학 시절 만난 그레이스의 남편 조너선은 소아 종양학과 의사로 일하고 있으며, 열두 살짜리 아들 헨리는 뉴욕의 명문 사립 학교에 다니는 모범생이다. 그레에시는 자신의 커리어만큼이나 가정에서도 완벽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선택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평화로웠던 어느 날, 아들이 다니던 학교의 학부형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는 모임에서 우연히 한 두 번 봤을 뿐인 학부형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그런데 경찰이 그녀를 찾아와 남편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학회에 간 줄 알았던 남편은 갑작스레 연락이 되질 않고, 남편의 핸드폰 마저 집에서 발견된다. 대체 조너선은 핸드폰도 놔두고,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지나온 모든 시간 동안, 단 한번도 조너선이 자신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그레이스는 충격에 휩싸인다. 결혼한 지 18년이 됐고, 수많은 환자들의 인생 문제를 상담해 왔으며, 이제 막 결혼 생활에 대한 대범한 책을 발간한 심리 치료사인 그녀의 삶은 모래성처럼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다.
내가 뭘 알고 있지? 그리고 내가 모르는 건 뭐지?
우리 환자만 그런 건 아닐 테고 네 환자들도 다 그렇겠지만 말이야. 가끔 치료받으러 오면서 단 한 번 자기가 <대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로 인해 현재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믿음에 철저히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어. 내가 늘 <대실수>라고 분류하는 환자들이지. 대체로는 처음 마신 한 잔의 술, 아니면 첫 번째 마약 경험, 이런 거야. 가끔은 인간관계일 때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의 나쁜 조언을 들은 것일 수도 있고. 그리고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그 순간이나 그때의 결정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때 딱 한 번 실수하지 않았다면 모든 게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늘 그 앞에 앉아서 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 있잖아요, 그런 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늘 그렇죠. 실제 삶은 그런 식이 아니란 말이에요. 항상 노란 숲 속에 난 두 개의 갈림길에 봉착하게 되는 건 아니란 말이야, 안 그래? 그리고 많은 경우에, 과거에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든, 똑같이 지금 이 자리에 와 있게 되곤 해. 그때 그게 실수가 아니었다는 얘기가 아니야. 그보다 좀 복잡하다는 얘기를 하는 거지. 삶에 멋진 일들을 가져다 준 결정을 내렸다면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거야. 예를 들어서 네 아들처럼.
성공한 변호사의 외동딸로 심리 치료사라는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하버드 의대 출신의 종합 병원 의사인 남편을 둔 주인공 그레이스는 뉴욕의 전형적인 중산층이다. 그리고 그녀가 뉴욕의 명문 사립 학교에 아들을 보내면서 만나게 되는 학부형들은 부유한 금융 자산가 계층까지 맨해튼 상류층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유복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삶의 이면에 숨어 있는 허위와 어두운 진실의 맨 얼굴은 끔찍한 살인 사건만큼이나 무시무시하다. 아이들의 교육을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돈과 정보의 전쟁, 자산가와 전문직 종사자들 간의 보이지 않는 간극과 미묘한 열패감, 자기 위안과 질시로 얼룩진 욕망의 이면까지. 특히나 시종일관 그레이스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스토리라 끔찍한 일을 겪고 난 뒤, 모든 허세와 위선이 벗겨지고 난 다음 그려지는 그녀의 내면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고 리얼하다. 당연한 듯 여겨 왔던 평화로운 삶이 사실은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마저 허구의 인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한 번쯤 살면서 겪을 수도 있는 시련이기에 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가끔 우리를 완벽하게 배신하곤 한다. 그 사람의 말투, 행동, 평상시 습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들이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거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짓말쟁이라던가 하는 문제는 아니다. 누구나 여러 가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보여줄 수는 없다는 선택과 다양성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특히나 부부, 부모 자식 관계 등 가족간에 발생할 때 더욱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나 연인 사이라고 하더라도, 가족이 되기 전에는 어쨌거나 남남이기 때문에, 받아야 할 상처가 조금 덜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이에게서, 내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엄청난 충격을 가져올 수 있다. 내가 그 동안 믿고 있던 모든 것이 산산이 깨져버리는 경험은 단순히 '배신'이라는 단어로 치부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한 세계가 끝나는 경험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때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거다. 내가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기대하는 바가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났을 때 거의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직관적으로 본 뭔가를 모른 척 하지 말라. 우리는 늘 자기 일일 때는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봐주곤 한다. 하지만 결단코 자신에게도 같은 기준을 들이대야 한다. 인생이라는 덫에 걸리기 전에, 그 후가 아니라. 당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이 외면했던 그것이 언젠가는 당신의 인생에 가장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