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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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가 맞는 설명이 된다고 하여 진실은 아니다. '우리 딸이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유족의 비논리적인 감이 경찰이 모아온 차가운 사실의 조합보다 더 많은 진실을 내포할 때도 있다. 살인이든 자살이든 물리법칙에 맞는 설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동기'. 동기라는 인과를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동기 없이는 사건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을 구성하는 블록이 차례차례 맞아 들어가 물리법칙에 근거한 모든 의심을 잠재운다 하더라도 동기가 제대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해령의 모친인 타분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해령의 자살은 선뜻 동기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선택' 중에서

식당주인 50대 여성이 귀갓길 식당 앞에서 피살된다. 피의자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범행을 마음먹었고, 살인은 우발적으로 저질렀으며, 순순히 자신의 범행 사실을 자백했다. 게다가 CCTV라는 완벽한 증거도 있었기 때문에 법정에는 살인사건에 걸맞은 긴장감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피의자는 모든 범행 사실을 부인한다. 수사기관에서 자백은 했지만 본의 아니게 거짓말한 거라며, 자신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부인을 하면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은 증거로서 가치가 없어지고, 자백조서가 모두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만다. 하지만 다른 증거들이 워낙 명백하기 때문에 검사 입장에서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대체 피의자는 무슨 속셈인 걸까. 피고인 측은 피고인의 형을 증인으로 신청하는데, 그가 법정에 등장하자 방청객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일란성 쌍둥이였던 것이다. 피고인과 피고인의 형 모두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없고, CCTV에 찍힌 사람이 형인지 동생인지 구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둘 중 누구란 말인가. 그들 두 형제에게 놓인 혐의의 양과 질은 똑같으며, 따라서 피고인이 유죄일 확률은 50퍼센트, 무죄일 확률 또한 50퍼센트라는 것이 피고측의 주장이었다. 형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이 나려면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이 필요하고, 무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고, 그 의심에 합리성이 있다면 유죄로 할 수 없다. , 검찰 측에서는 과연 어떻게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변호사 사무실에 일흔을 넘었을 성싶은 할머니가 찾아온다. 사위는 3년 전에 죽었고, 딸에게 아이가 둘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가 딸과 함께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딸과 막내 손녀를 한꺼번에 잃고, 남은 건 첫째 손녀딸 한 명 인데 앞으로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하다고. 마침 딸의 생명보험금이 있는데, 보험사에서는 딸이 자살을 했기 때문에 지급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있다고 했다. 교통사고로 죽은 건 맞는데 경찰조사에서는 자살로 결론이 나왔다고. 이유인즉 딸이 운전 중에 외과용 메스로 자기 손목을 그었다는 것이다. 운전 중에 손목을 긋다니, 게다가 뒤에는 아기를 태운 채로? 전대미문의 이상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경찰 얘기로는 아기하고 동반자살하려고 운전 중에 손목을 그었다는데,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좀 이상한 결론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 사건은 사고인가, 타살인가, 자살인가? 검사 생활을 접고 변호사를 개업한 연정은 의혹을 안고 사건을 맡기로 한다.

 

"내가 결론 갖고 뭐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김옥선은 빙그레 웃었다. 백제의 마애불 같은 미소였다.

"어떤 아쉬운 생각이요?"

"그냥, 사람을 모르니 저런 판결이 나는 구나, 하는. 아이구 아니, 아무튼 그걸로 됐어요."

"사람을 몰라 내린 판결이라.........무슨 말씀이신지?"

                                                                              -'구석의 노인' 중에서

도진기 작가하면 '백수 탐정 진구'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가 대표적인 그의 캐릭터이지만, 이번 소설집에서는 그에 못지 않게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도 만나 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그가 쓴 첫 번째 단편인 <악마의 증명>과 그를 작가로 데뷔하게 해준 한국추리잡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한 <선택>이라는 두 작품에서 등장하는 호연정 검사이다. <악마의 증명>에서는 검사로 등장해 쌍둥이 용의자 앞에선 딜레마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선택>에서는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일을 시작하며 모두가 자살이라 말하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조사한다. 그녀가 그 사건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정말 가슴이 먹먹해지는 여운을 남겨 주었는데, 모성이라는 감정이 뭔지, 엄마라는 존재가 자식을 위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도진기 작가는 만약 자신의 딸이 법조인이 된다면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이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언젠가는 호연정 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도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물론 진구와 고진이라는 걸출한 캐릭터들이 버티고 있어서 새로운 시리즈의 히어로를 세우기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도진기 작가의 작품은 그 동안 장편으로만 만나왔는데,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느낀 건 추리 소설의 묘미가 단편에서 정말 잘 살아난다는 거였다. 짧은 이야기라 복잡한 플롯을 구성하지는 못할 테고, 캐릭터의 매력도 보여주기 어렵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단편 소설에 대한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고나 할까. 여기 실린 단편들은 기존에 다른 출판사를 통해 발표되었던 작품 7편과 미발표 원고 1편이다. 그가 추리소설을 써보려고 마음 먹은 후 쓴 첫 번째 단편 소설도 있고, 미스터리 신인상을 받게 해준 작품, 그의 오컬트 취향이 드러난 독특한 작품, 미스테리아 창간호에 실렸던 작품, 나혁진 작가가 원고를 읽고 최고의 단편이라고 극찬을 퍼부었던 작품도 있다. 굉장히 다양한 소재를 색다른 방법으로 접근한 이야기들이라 정말 흥미진진했다. 앞으로 국내 추리 소설가들의 단편도 이렇게 소설집의 형태로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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