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임수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무런 악의 없이, 너무도 사소하고 평범하게, 모든 드라마의 전형적인 시작처럼. 처음에는 다들 주목하지 않았지만 일찍이 수상한 조짐들이 있었다. 물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비밀도 마찬가지이고. 이 작품은 작은 실수가 얼마나 엄청난 파국을 불러올 수 있는지 보여주면서, 삶에 대해 묻는다. 과연 당신의 삶은 어떠했냐고.

"도무지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일이 있어요. 반장님도 아시다시피 저 역시 자신감을 잃고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살아왔어요. 나는 왜 이리 외로울까? 나는 왜 사람들과 쉽게 교감하지 못할까? 나는 왜 내 자신을 믿지 못할까?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자신에게 묻곤 했지만 답을 찾아내지 못했어요. 아마도 해답이 내가 결코 찾아낼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 숨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우린 자주 자신에 대한 결핍을 느끼고, 늘 극복하기 위해 애쓰기도 하지만 결국 완벽한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다고 봐요. 그저 열심히 살아갈 뿐이죠."

퇴직형사 리처드 린빌은 어느 날 한밤중에 유리창이 깨지는 듯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문을 걸어 잠그고 경찰에 신고했어야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강력계 수사 반장을 지낸 체면 때문에 곧바로 신고하지 않고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41년간 함께 살았던 아내는 3년 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고, 그 역시 다음 달이면 일흔 살이 되는 고령이지만 금연과 절주를 지속해 아직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 게다가 항상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은 덕분에 아직 체력이라면 자신 있었고, 위험한 사태에 대비해 권총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침입자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고, 3개월이 지나도록 사건은 진척이 없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케이트가 런던경찰국에 긴 휴가를 내고 스캘비로 내려와 독자적으로 수사를 진행시킨다. 그녀와 아버지 사이가 워낙 각별했기에 아직 그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프리랜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 조나스 크레인은 아내와 수 년 동안 인공수정을 여덟 번쯤 시도했으나 포기하고 현재는 아이를 입양해서 살고 있다. 하지만 클리닉에 다니느라 빌린 대출금도 아직 다 갚지 못했고, 집을 살 때 빌린 융자금도 많이 남아 있는데다, 아이를 위해 아내도 일을 그만둔 상태라 경제적인 부분에서 부담을 많이 느끼고 있는 상태이다. 파국이 임박한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다 번아웃 증후군을 진단받고 의사의 권유로 가족들과 일주일간의 휴가를 떠나기로 한다. 동료로부터 완전히 외따로 떨어진 지역에 있는 농장을 빌려 잠시나마 세상과 절연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노트북컴퓨터와 휴대폰도 놔두고, 그야말로 아무와도 연락할 수 없는 곳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행 직전 지난 5년간 한번도 연락 없었던 아들 새미의 생모인 테리가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며, 남자친구인 닐을 데리고 온다. 그리고 농장에 가서도 그들이 느닷없이 농장에 나타날까봐 신경이 곤두서있던 조나스의 예감은.. 그대로 실현되고 만다.

"설령 물었더라도 진실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을 거예요. 반장님은 제인이 보여주고 싶어 했던 모습만 본 거예요."

"사람들은 항상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지.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갈 때조차도 어두운 실상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

케이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샤를로테 링크의 소설은 거의 모든 작품이 드라마로 제작되었을 만큼 인기가 좋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이야기들은 매범 범죄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건과 수사라는 플롯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속에 관계된 여러 인물들의 삶과 심리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아버지를 신에 버금갈 만큼 완벽한 인격체라고 믿고 살아 왔던 딸의 철석같은 믿음에 균열이 가고, 죽고 나서야 가족들에게 숨겨왔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기도 하고, 한 남자에게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여인도 등장한다. 탁월한 상황 판단력과 뛰어난 직감과 인간심리에 대한 통찰력을 두루 갖추고 있는 형사지만, 성격이 괴팍하고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 동료들로부터 언제나 배척당해야 했던 케이트는 알코올중독과 싸우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스스로를 극복한 케일럽 반장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그는 케이트를 동료 경찰의 딸 그 이상은 아니었다.

리처드 린빌의 사건을 수사하는 케일럽 형사와 케이트의 독자적인 수사, 그리고 휴가를 떠난 조나스가 겪게 되는 입양한 아들의 생모와 그녀의 남자친구에 의해 겪게 되는 상황이 교차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처럼 흘러가다 어느 순간 교집합을 이루면서 증폭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실수, 하지만 두려움에 시작된 작은 거짓말, 가족에 대한 애정에 기인한 복수... 사실 따지고 보자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악인이 아니었기에 선과 악,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로 명백하게 판단하기에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을 법한 인간적인 동기들이니 말이다. 비록 그 사소한 일에서 시작한 그것이 결국 몇 사람을 죽이고, 몇 사람을 절망에 빠지게 하고,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어놓게 되지만.. 사실 그것은 그 누구의 의도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이번 작품에서는 평범하고, 그보다 더 부족하고 허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더욱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뜻하지 않은 실수를 저지르거나, 사소한 이기심으로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책임은 다름 아닌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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