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계 사건부 - 조선총독부 토막살인
정명섭 지음 / 시공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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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 <쌍옥적>을 읽으면서, 정탐소설이라는 명칭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탐정소설이나 미스터리의 장르를 100여 년 전에는 정탐소설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당시의 사람들도 이런 류의 소설을 즐겨 읽었던 건지가 참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정명섭 작가의 신작을 설명하는 데 '경성 정탐소설'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이 작품 속에는 당시에 이런 류의 소설을 사람들이 즐겨 읽었는지, 어떻게 읽었는지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묻어나 있어서 실제 내가 경성으로 들어가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류경호는 사건에 휘말린 이후 처음으로 분노를 느꼈다. 독립 운동가도 아니고 친일파는 더더욱 아니었던 그는 정탐소설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죽은 이인도 기수는 모험가를 꿈꾼 몽상가였고 말이다. 그런 두 사람 중 한 명은 토막이 나서 비참하게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살인자로 몰렸다. 단지 그곳에서 일하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류경호가 박길룡에게 물었다.

10여 년의 공사 끝에 완공을 코앞에 두고 있는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설계와 시공을 맡았던 조선인 총독부 건축과의 조선인 기수가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그것도 살해당한 후 토막 나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대자 형태로 여기저기 흩뿌려진 채로 말이다. 얼마 남지 않은 조선총독부 낙성식을 앞두고 일본 경찰은 조사는커녕 조용히 덮으려고 하고, 이 일로 조선총독부 내의 조선인들이 위기에 처하자 육당 최남선의 부탁으로 류경호가 범인을 찾기 위해 나선다. 류경호는 흥미위주의 사건과 가십들을 주로 다루는 잡지사 별세계의 기자였다. 그는 집안에서 서자였던 터라 유학까지 다녀와서도 가족과의 문제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던 차에 정탐소설에 빠져 소설의 주인공처럼 추리하는 버릇이 생겼고, 똑똑하고 관찰력이 좋았던 터라 실제로 주변의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해주었던 이력도 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다는 상징이나 다름없는 총독부 안에서 벌어진 토막살인사건은 거대한 미로 같았다. 총독부의 거대하고 압도적인 이미지에 류경호는 난감했지만, 이 살인 사건을 제대로 밝히지 않을 경우 그곳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이 모두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사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사건 해결은 녹록지 않았고, 총독부 안의 조선인들은 단지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삶을 송두리째 파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극중 류경호가 셜록 홈즈의 팬이기 때문에, 작품 곳곳에 그것을 이용한 추리도 등장해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물론 추리 소설 자체로서의 매력보다 경성을 배경으로 한 시대 소설로서의 장점이 더 두드러진 작품이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 사람의 경력과 인생이 걸린 문제일세. 그 사람은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고 독립운동가는 더더욱 아닐세. 지금 이 땅에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만 살고 있겠는가? 대다수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일세. 최소한 그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없도록 해야지."

그 동안 만나왔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작품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항일 투쟁'이라는 소재였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과 무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의 리더 간의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이 펼쳐졌던 영화 <밀정>, 그리고 일제강점기였던 1933년을 배경으로 한국 독립군 저격수와 폭탄 전문가 등이 모여 친일파 암살작전을 벌였던 영화 <암살>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이들과 조금 다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역사에 의해 다들 잊고 있던 사실, 일제 강점기에도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거다.

이 땅에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만 있는 줄 아십니까? 99퍼센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대체 무슨 명목으로 그들의 삶을 파괴하려는 겁니까?

사실 일제강점기라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들만 존재했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그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위해 지냈고, 하루하루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연찮게 접한 <별건곤>이라는 잡지에서 우리가 몰랐던 그 시대의 사람들 이야기를 접하고, 자신이 알던 역사 속에는 그들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에 아무런 족적을 남겨놓지 않았던 삶이라도,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조선 총독부 건물에서 대한제국을 암시하는 토막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잡지사 기자와 조선인 건축사들을 비롯한 보통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일제 강점기의 경성을 배경으로 실존 인물과 가상의 인물이 함께 등장하고, 실존 취미잡지 <별건곤>에서 영감을 받아 극중 통속잡지 '별세계'가 만들어져 기자 류경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추리소설 이전의 명칭인 '정탐소설'로 불리길 바란다는 작가의 말처럼, 격동의 시대 경성이 매우 리얼하게 그려져 있어 마치 타임슬립이라도 떠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언론인 최남선과 도쿠토미 소호,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박길룡 기수 등 실존 인물들의 생생함과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이 중간중간 등장하면서 당시 시대상을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지게 만들고 있어 더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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