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무기 - 이응준 이설집
이응준 지음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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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 싫어하는 단어 열 개로, 천국, 가족, 무지, 정치, , 율법, 영원, 희생, 속물들, 원망을, 지독히 좋아하는 단어 열 개로 비바람, , 나무, 짐승, 자유, 청춘, 해탈, 영혼, 고백, 그리고 김수영을 꼽는 작가, 이응준이 그 동안 자신이 세상에 선보인 산문과 혼자 간직하던 산문 들을 모아 이설집을 펼쳐냈다.

가을이다. 지하철 안 수많은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책은 고사하고 신문지 한 장 손에 쥐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나는 마치 우리가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타고 있는 듯한 착각에 소름이 확 끼친다. 내 직업이 책을 팔아먹고 사는 작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책을 외면하는 세상이 아니라 책에 대해 잘 모르는 세상이 다만 무섭고 슬픈 것이다. 책은 다양한 얼굴을 가진 물건이다. 책은 나무다.  푸르고 높은 아름드리나무로부터 책의 갈피갈피가 나왔으니 책을 품고 있는 우리는 푸르고 높은 아름드리나무를 햇살처럼 들고 다니며 그것 아래 고여 있던 그늘과 그것을 흔들던 비와 바람을 읽고 있는 셈이다. 뜻 깊은 책 한 권을 가진다는 것은 한 그루 영원히 자라는 영혼의 나무를 가진다는 뜻이다.

무려 팔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마치 벽돌처럼 두툼하지만 새빨간 표지의 도발 덕인지 너무 쉽게 읽히는 이상한 책 한 권을 만났다. 산문가도, 소설가도 아닌 이설가를 꿈꾸었다고 말하는 작가 이응준은 등단 26년차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칼럼니스트이며, 각본가에 영화 감독이기도 한,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독특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예전부터 이응준이라는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내가 그의 글을 처음 만난 것은 그의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년 전 신경숙 작가의 표절 의혹에 관한 길고도, 진중하고, 날카롭고 매서운 칼럼에서였다. 한국문단과 한국문학에 대한 그의 예리한 글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어쩌면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던, 다소 무모하고도 대담했던 용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신이 아니고서야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없으니, 우리는 악한 사람이기도 하고, 선한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했던 그는, 그러나 악한 일과 선한 일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글을 쓴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신경숙과 그 자신이 죽어서 흙이 된 다음에도 한국어가 살아있는 한 한국문학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도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그는 애정을 표현할 때도 과격하게, 분노를 표출할 때도 치열하게 글을 써내고 있다. 똑같은 책을 긴 세월 동안 반복해서 읽는다는 게 참 드문 일이지만, 자신에게도 그런 책들이 서너 권 있는데, 그 중 최고는 단연 <김수영 전집 2>이라고 애정을 보이고 있다. 책이 너덜너덜해지면 아무런 갈등 없이 새로 산 다음, 낡은 것은 화장실에 비치해두는 짓을 벌써 세 차례나 되풀이하고 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그는 <김수영 전집 2>를 백 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다만 주의할 점 한 가지로 좋아는 하되 닮지는 말 것.이라고. 왜냐하면 작가를 닮아 성격이 상당히 비뚤어질 수 있다며 자신이 그랬다고 마치 농담처럼 덧붙이고 있다. 그렇게 이 산문집은 무섭게 치열하지만, 능청스럽게 농담처럼 읽히기도 하고, 절절한 고백처럼 들리지만 정치와 세상과 문학에 대해 매우 논리적인 해설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소설을 황당한 이야기쯤으로 생각하곤 한다. "소설 쓰고 있네" "말 같지 않은 소리 집어치워라"는 뜻의 관용구인 것은 그런 까닭이다. 물론 때로 어떤 부류의 소설들은 황당한 이야기를 육체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된 소설이라는 전제 하에서, 소설은 황당한 이야기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려낸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뻥이 심한 친구에게 "소설 쓰고 있네?라고 타박하는 것은 기실, "넌 어쩜 그렇게 말을 말같이 하니"라는 칭찬이 될 수도 있다. 독자가 소설의 내용이 사실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의 구조 때문이다. 현대소설에 있어 이야기 자체는 공사장의 자재들일 뿐이다. 작가는 그것들을 가지고 설계도에 따라 이야기의 구조물인 집, 즉 소설을 짓는다. 소설가는 건축가이자 막 노동꾼이다.

신문 칼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평론, 시인, 소설가인 문인으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인터뷰, 대담, 그리고 그가 사랑한 문인들에 대한 글과 그의 독서 편력을 볼 수 있는 여러 책에 대핸 소개 글도 있고, 그의 반려견 토토와의 이야기는 정말 백미이다. 이응준이 또 애정을 표현하는 대상이 둘 있는데, '인생의 반은 토토이고, 나머지 반이 성호 형' 이라며, 시인 함성호 씨와 애견인 시추 토토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도 쏟아내고 있다. 재미있는 건, 그 두 대상을 가리켜 전자는 아예 말이 없고, 후자는 나한테만 하는 말이 너무 무섭고 황당한 소리들뿐이라며 말이다.

그리고 그의 내밀한 고백이 담긴 3년간의 일기도 있으며, 문학 파트너 시인 함성호와의 일화와 페이스북의 글등등.. 600편의 글. 멀게는 무려 2001년에 쓰인 글부터, 가깝게는 2016년에 쓰인 글까지. 압도적인 분량과 그 속에 담긴 너무도 자유 분방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의 내용은 이응준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후반부에 수록된, 그가 매일 남긴 일기이자 수기 같은 짧은 글들의 편린은 시간 순서대로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어 한 작가의 내밀한 부분까지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영혼의 무기'라는 엄청난 제목만큼 이 글이 누군가의 가슴에 와 닿아 그의 영혼을 일깨울 수 있기를. 요즘 같은 시국에 정말 필요한 전투적이고 치열한 이 글들이 상처받은 누군가의 영혼을 달랠 한 조각이 되어 주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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