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상은 어제와 오늘이 같고, 다가올 내일 또한 다르지 않다.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항상 제자리에 위치하고, 특별한 균열이 생기지 않는 동안 당신을 둘러싼 모든 것은 안전하다. 비록 곤경이 몰려와서 소리를 지르더라도, 그 곤경이 당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공격 당한다는 뜻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매 순간 세상과 주변 모든 사람들과 자기 자신까지 의심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일상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바로 이들처럼 말이다.
페이가 속삭였다. "이놈들은 누구죠?"
콘돌이 그녀 주위로 팔을 뻗어 냉장고를 닫고는 말했다. "놈들은 우리요."
그녀가 그를 쳐다보자 그가 덧붙였다. "우리가 놈들보다 뛰어나고 운도 더 좋기만 바랍시다."
"이건 내가 되고 싶었던 존재가 아니에요." 페이가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소."
제대로 된 현장 훈련도 받은 적이 없는, 총이라고는 사냥할 때 딱 한 번 쏴본 게 전부인, 이상한 첩보물의 주인공. 미국문학사협회에서 근무하는 CIA 조사원으로 실제 하는 일은 문학 분야에 기록된 모든 스파이 활동과 관련 행위들을 파악하는 것이었던 남자.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휘말린 사건 속에서 코드네임 콘돌이라는 이름으로 현장 요원이 되어 숨 가쁜 추격전에서 달아나고, 위험한 포위망을 피해 자신의 목숨을 지켜냈던 전작 이후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지만 작가는 첩보 스릴러의 모던 클래식으로 손꼽히는 그 작품 <콘돌의 6일> 이후로 무려 40여 년동안 콘돌을 그의 작품에 다시 등장시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코드네임 콘돌'의 로버트 레드포드가 그려낸 이미지와 경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영화가 아니었더라면 콘돌이 덜 유명해졌겠지만, 독자인 우리는 원래 작가의 구상대로 콘돌 시리즈를 5부작으로 만났을 수도 있었던 거였다. 어쨌거나 작가는 9.11이후로 콘돌을 다시 등장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해서 1974년 출간되었던 <콘돌의 6일>과 1975년 <콘돌의 그림자> 이후 계속 다른 작품들을 써왔던 제임스 그레이디는, 무려 40여년이 지나 2014년 <콘돌의 다음 날>, 그리고 2015년에 <콘돌의 마지막 날들>을 출간하며 콘돌을 다시 재 탄생시키게 된다. <콘돌의 다음 날>은 이번에 출간된 책의 마지막 부분에 수록된 짧은 단편으로 이미 스파이로서 전성기를 다 보내고 정신이 피폐해져 CIA 비밀 정신병원에 있다 막 퇴원한 후의 이야기였다. 따라서 우리가 만나보지 못한 수십 년의 공백 기간만큼 콘돌은 독자들 모르게 스파이로서 뛰어난 활약을 하며 자신의 전성기를 다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무슨 시리즈가 이런가 싶을 것이다.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사람을 갑작스레 현장 요원으로 둔갑시키면서 첫 편을 시작하더니, 중간 과정 없이 늙고 지친 스파이의 최후로 시리즈를 재개하면서 동시에 마무리하다니 말이다. 어쩌면, 혹은 당연하게도 이 작품이 콘돌의 마지막 모험담이 될 테니, 만약 오랫동안 그를 기다려왔던 독자라면 배신감 마저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처음과 끝만 존재하는 이 이상한 시리즈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현장보다는 책상 앞이 더 편한 초짜 스파이와 반대로 한때 전설이었던 노쇠한 전직 스파이를 통해서 한 캐릭터의 탄생과 끝만 보여주는 것이, 여타의 다른 시리즈들에서처럼 캐릭터의 성장을 함께 하는 것보다 더 임팩트 있게 와 닿았으니 말이다.
"명심해요, 빈." 덕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한에만 우리가 원하는 짓을 무엇이건 할 수 있어요. 어떤 작전이 됐건, 그게 반드시 고수해야 할 핵심 사항이라는 걸 잘 알잖아요. 그러니까 쿨하게 행동하세요. 사람들 이목이 쏠리지 않도록 절제된 행동을 하세요. 절대적으로 평범하게 행동하세요."
"지금껏 그놈의 평범함이 문제였어요."
"지금 당신은 그런 시절은 지났어요." 브라이언이 말했다. "기억해요?"
한때 전설이었지만 이제는 은퇴한 전직 스파이인 백발의 콘돌, 그는 CIA 비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요원 보호 프로그램 아래에서 평범한 것처럼 보이게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일상에 도처한 위험들을 감지하며 숨쉬고 있었고, 비밀 요원인 페이와 피터가 신변 확인차 그의 집을 방문하던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며칠 후 연락이 두절된 피터가 콘돌의 집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평범한 화요일에 퇴근해서 귀가했다가 칼로 벽난로에 못 박힌, 피에 젖은 미국인 요원을 발견하게 된 콘돌은, 선택의 여지 없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도망쳐야 했다. 전작에서처럼 자신이 몸담았던 기관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대로 저항하다가는 목숨을 잃게 되거나, 어느 정신병원 병실에 영원히 갇히게 될 테니 말이다. 그는 우선 그들로부터 완벽히 도망쳐야 했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표적이 된 이유와 적의 실체를 파악해야 했다. 페이는 상사였던 새미의 은밀한 지시로 콘돌을 찾아내는데 성공하지만,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로부터 습격을 받고, 그 와중에 몇몇을 사살하게 된다. 콘돌을 돕는 여인 메를과 페이의 연인 크리스까지 네 사람은 숨을 곳을 찾고, 그러면서 수많은 요원들에게 쫓기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일반적인 첩보 소설과는 다르게 음모의 플롯보다는 개인의 내면과 관계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상대방을 의심하고 주위를 살피며 살아 왔던 수십 년의 시간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것에 대한 심리 묘사는 매우 치밀하고, 페이와 연인 크리스가 어떻게도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방법은 설레 이고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관계와 내면에 집중해 스파이라는 존재 자체의 현실성을 보여주는 와중에도, 정보화 시대의 넘쳐나는 데이터와 정부의 빅 브라더 식 정보기관과 그의 음모에 대해 밝히려는 작가의 목소리는 서늘하면서도 예리하다. 콘돌 시리즈의 첫 작품을 읽으면서 '소설이 단순히 작가의 상상력으로 얻어낸 결과물이 아니라, 어떤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 쓰여졌다고 믿는 음모론'이야말로 제임스 그레이디가 보여주는 기막힌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을 만나고 나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생각 마저 든다. 왜 그가 첩보 스릴러의 거장인지 여실히 보여 준다고나 할까. 총격전과 육박전 등 액션 장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단순한 오락 거리 이상의 이야기를 보여줘 중간 중간 책장 넘기는 손을 멈춰야 했으니 말이다. 대부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는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하지만 죽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는 죽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극중 콘돌처럼 멋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