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의 완벽한 1년
샤를로테 루카스 지음, 서유리 옮김 / 북펌 / 2017년 1월
평점 :
누군가 당신에게 이런 숙제를 준다면 어떨까. 아침마다 감사한 것 세 가지 적어보기. 생각나는 것 뭐든지 상관없지만, 단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그리고 저녁에는 하루에 있었던 좋은 일 세 가지를 적어보는 거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 있냐고? 굳이 글로 적어보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감사한 것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과연 그럴까? 상투적으로 감사할 것들 말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감사. 정말 '감사'라는 표현에 걸맞고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주고 아침에 일어날 때 가장 먼저 생각나고 밤에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을 때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그런 것이, 과연 당신에게도 그런 게 있을까? 이 책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을 제시한다. 가장 평범하고도 특별한 방식으로 말이다.
정말 사춘기 철부지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 무슨 쓰잘데기 없는 짓인가. 이럴 시간이 있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그의 삶에 감사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굳이 거창하게 적을 필요가 없단 말이다. 아버지처럼 치매에 걸리지 않아 망각의 위협이 없다.
예를 들어 감사한 것... 음... 감사한 것은..........
내가 감사한 것이 도대체 뭐지?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출판사를 운영중인 요나단은 대저택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지만 마흔 두 살인 현재 혼자이다. 부인인 티나가 그와 가장 친한 친구와 눈이 맞아 7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이혼을 요구했고, 자신이 주었던 그 모든 부를 기꺼이 버리고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한나는 사귄 지 4년이 넘어가는 남자 친구 지몬의 프로포즈를 기다리며, 자신이 10년 넘게 꿈꿔왔던 '꾸러기교실' 프로젝트를 친구인 리자와 함께 운영 중이다. 매사에 까칠하고 친구가 없는 요나단과 무한 긍정주의에 아이들을 사랑하는 리사의 이야기가 그렇게 교차로 진행된다. 요나단의 현재와 두 달 전 리사의 시간이 차례로 진행되다, 어느 순간 하나의 현재로 만나게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여느 때처럼 새벽 조깅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요나단은 우연히 자신의 자전거 손잡이에 매달린 가방 속에서 두툼한 다이어리를 발견하고 어리둥절해한다. 가죽 표지의 다이어리 첫 페이지에는 '당신의 완벽한 1년'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고, 날짜당 매 페이지마다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짧은 격언과 그날 해야 할 일들로 가득한 다이어리는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모든 장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가끔은 거창한 스케줄도, 또 가끔은 소박한 스케줄도 있었다. 게다가 다이어리의 글씨체가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가 10살 때 아버지와 이혼하고 떠난 어머니였으니 말이다. 한나의 남자친구 지몬은 자신이 내년 말까지 살아 있을 가망이 거의 없다는 선고를 받고 절망에 빠진다. 그래서 한나에게 프로포즈 대신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놓아주고 싶다고 이별을 선언한다. 갑작스러운 비극을 받아들일 수 없어하던 한나는 지몬을 위해 내년 계획을 짜기 시작하겠다고 선언한다. 매일을 위한 365가지 아이디어로 그의 미래를 위한 초석을 쌓겠다는 것이다. 오직 그를 위한 다이어리를 만들어서 그가 다시 힘을 내 병과 싸울 의지를 북돋아주고,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 적어도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이 되길 바랬기 때문이다. 정말 그의 마지막 1년이라면, 정말 완벽한 1년을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몬은 다이어리를 선물 받고 얼마 뒤 완전히 잠적해버리고, 다이어리의 주인을 찾을 것인지 고민하던 요나단은 자신의 출판사가 파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생을 낭비하기에는 하루하루가, 단 1초도 너무 소중했다. 걱정과 근심에 파묻혀버리기에는 너무 소중한 인생이었다. 삶은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걸리느냐에 상관없이. 누구도 자기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지금' 그리고 '오늘'이다. '어제'는 상관없고 더는 중요하지 않으며 '내일'은 아무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죽을 병에 걸린 연인을 위해 새로운 사람을 찾아 준다는 설정은 매우 진부하고 뻔하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이것은 매우 사소한 디테일에 불과하다. 완전히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주인공이 각자의 시간을 겪어내다가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초반부가 아니라 완전히 후반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모른 채로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우연히 피해가기도 하면서 그들은 무려 500페지가 넘어서야 하나의 교집합으로 같은 시공간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그 많은 페이지에서 대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는 걸까.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작성한 다이어리대로 일상을 채우는 한 남자가 자신의 삶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상황들과 사라져 버린 남자친구 때문에 절망했다, 그 다이어리를 통해 완벽한 삶을 살고 있을 어떤 남자를 찾으려는 한 여자의 일상이 겪게 되는 다이나믹한 상황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과연 이들이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될까. 다이어리를 통해서 이들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되고, 또 어떤 순간을 만들어가게 될까 매 순간 고대하면서 두툼한 페이지들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
작가의 전작인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와 <타인은 지옥이다> 모두 흥미롭게 읽었기에 이번 신작도 기대를 했다. 두 작품은 비프케 로렌츠라는 이름으로, 이번 작품은 그녀의 또 다른 필명인 샤를로테 루카스라는 이름으로 발표가 되었는데, 필명이 여러 개 인 것도 그렇지만 각각의 작품들이 분위기가 전혀 달라 이거 같은 작가가 쓴 게 맞나 싶을 만큼 완전히 달랐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는 유쾌한 캐릭터와 다소 황당한 설정이 풋풋한 재미를 주었던 작품이라면, <타인은 지옥이다>는 소름끼치는 오프닝이 돋보이는 본격적인 스릴러물이었다. 두 작품의 유일한 공통점은 독창적인 소재와 섬세한 심리 묘사 정도가 될 것이다. 이번 작품 <당신의 완벽한 1년>은 유쾌발랄한 로맨스 소설처럼 읽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무언가를 던져주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극중 지몬을 위해 만든 한나의 다이어리 덕분에, 엉뚱하게도 요나단이 '지금 그리고 여기'의 삶에 집중하게 된 것처럼, 우리 삶의 수많은 우연들이 모여 인연을 만들고,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리고 내 현재를 가득 채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훌쩍 넘었다. 나의, 그리고 당신의 올 한 해가 이들처럼 '완벽한 1년'으로 만들어지기를 고대해본다. 어제보다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위해 살수 있기를 말이다.